친정엄마는 밤새도록 잠 못 이루는 딸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푹 주무신 후 아침 일찍 집으로 돌아가셨다. 돌아온 싱글인 남동생의 아들을 키우는 엄마의 상황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섭섭한 것 어쩔 수 없었다. 딸이 아침 먹는 것을 다 보지도 않고 말 그대로 날이 새자마자 ‘몸조리 잘해라’라는 말을 지난밤의 꼬리표처럼 던지고 가시는 엄마는 보며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고등어의 가시를 발라냈다. 수액 바늘이 꼽힌 손으로 고등어의 가시를 발라내며 생각했다. 세상에는 발라내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고.
6 병실에서 나의 관심사는 병실 입구에 자리 잡은 글자 모르는 여인이었다. 수술 후 누구나 파란색의 공이 세 개가 들어간 기구를 불며 호흡 연습을 하는데 그녀는 종일 잠만 잤다. 거대한 배를 반쯤 드러내놓고 자는 그녀나 나나 암으로 수술했다는 신세는 마찬가지지만 왠지 그녀가 애처로웠다. 심지어 가래가 차서 숨쉬기도 힘든 엄마 앞에서 치킨을 시켜 먹으며 앉아있는 있으나 마나 한 아들 녀석의 뒤통수를 한 대 때리고 싶었다.
만 네 살짜리 아이들도 글을 읽는 마당에 글을 모른다는 건 그녀의 인생이 얼마나 서글프고 신산했을지 알려주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팠다. 수술 전날 간호사가 가지고 온 차트를 읽을 줄 몰라서 멍한 눈빛으로 딸이 오면 해줄 거라고 말하는 그녀를 지켜본 이후로 내내 그녀의 멍한 눈빛이 지워지지 않는다.
남편이란 사람은 올 때마다 성질만 내고, 먹다 죽은 귀신이 들러붙었는지 아들 녀석은 눈만 뜨면 먹어대고, 간혹 들리는 딸은 밥을 안 먹는 엄마에게 왜 아깝게 안 먹느냐고 타박이다. 하소연을 하려 해도 할 데가 없어서 저녁 늦게 교대하러 온 딸에게 짜증이라도 낼라치면 딸은 화를 버럭 내며 자신도 힘들어 죽겠단다. 마트에서 종일 일하고 병원에 들르는 것이 그렇다는 이야긴지 아니면 부모를 잘못 만나서 남들처럼 못 사는 게 힘들다는 이야긴지 모르지만 내가 추측하건대 후자 쪽에 가까운 듯했다.
그들은 서로 가족이면서 서로의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그리고 그 끝은 언제나 글 모르는 여자 탓이다.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보면 딸은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마트에서 일하는 것이 엄마 탓이고, 일찌감치 학교에서 잘리고 게임이나 하느라 몸무게만 불린 아들도 그것이 수술한 후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엄마 탓이란다.
사실 나를 포함한 병실 안의 사람들은 처음엔 모두에게 적대적이고, 의사도 못 믿고, 세상 사람 다 못 믿는다는 식으로 나오는 그녀에게 호의적이지 않았지만, 점점 가족들의 행태를 보고 그녀에게 동정적으로 되어갔다.
“새끼가 되어서 엄마가 아픈데 닭 시켜 먹을 맛이 나나?”
잠만 쳐 자던 아들이 화장실을 가자 금옥 씨가 한마디 한다. 물론 여자가 들을까 봐서 숨죽인 목소리로 말이다.
“그러게요.”
티나 여사가 맞장구를 쳤다.
티나 여사의 사람 좋아 보이는 남편이 밥도 먹지 않고 잠만 자는 그녀를 깨워보기도 하고, 억지로라도 운동하라고 권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무기력한 얼굴로 바라볼 뿐 대답이 없다. 다 비워서 진공상태가 되어버린 눈빛이다. 그녀에게 삶이란 벗어버리고 싶은 낡은 옷처럼 여겨지는 듯했다.
남의 일에 참견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나도 오가며 한 번씩 파란 공 세 개를 부지런히 불라고 말해줬지만, 그녀는 소처럼 큰 슬픈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지치고 힘들어서 다 포기하고 싶다는 눈빛이다. 어쩌면 입원해 있는 동안이 그녀 일생에 가장 편안한 순간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는 권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나는 병원 생활 체질이다. 주는 밥 먹고, 운동하고, 책 읽다가 잠자고, 멍하니 생각하고. 모두 다 내가 좋아하는 일들만 일어나니 말이다. 암에 걸려서 입원하지 않았다면 결코 해보지 못할 완벽한 나만의 시간 체험인 셈이다. 처음의 우울함은 사라지고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식 담당 아줌마가 병실마다 도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놈의 생선만 아니라면 콧노래가 나올 지경이다.
오랜만에 꺼두었던 핸드폰을 켜고 카카오톡을 확인했다. 내가 수술하고 있는 사이에 ‘나의 오랜 친구’인 윤재가 카카오톡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아내의 건강 때문에 제주도로 내려간 그에게는 알리지 않았는데 도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아마 입 가볍기로는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을 허 편이 알려줬을 게 분명하다.
‘네가 잠자고 있는 사이에 세상의 꽃들이 바람에 다 져버렸다.’
그가 제주도 집 마당에 떨어진 꽃들을 찍은 사진을 함께 보냈다. 본래의 색보다 짙은 색으로 시들어가는 사진 속의 꽃들이 나를 닮았다.
‘........ 많이 사랑한다. 나보다 오래 살아줘야 해.’
그의 마음이 노란 풍선을 타고 전해진다.
나는 제주도의 윤재에게 카톡을 보냈다.
‘......... 오랫동안 사랑해 줘서 고마워. 나도 사랑해’
갑자기 설움이 북받쳐서 눈물이 나려고 한다. 버스에 나란히 앉아서 페이퍼 레이스의 <love song>을 듣던 시절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 시절 남편과 몰래 데이트하고 있었다. 어느 날 강의만 끝나면 사라지는 나를 잡고 도서관 창가로 데리고 가더니 윤재가 갑자기 나의 귀에 마이마이 이어폰 한쪽을 끼웠다. 그때 흘러나오던 노래가 신문 레이스의 <love song>이었다.
그와 나는 한참 동안 도서관 복도에서 그 노래를 들었다. 그가 눈으로 묻고 있었다. 그 노래의 가사처럼 너의 마음은 지금 어디로 달려가고 있느냐고.
그 시절 우리가 함께 한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서 중간고사를 끝내고 그가 없는 틈을 타서 대타로 미팅을 나가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윤재와 함께했을까? 그리고 또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는 윤재에게 챙겨놓은 삶은 계란을 주러 갔다가 영어과 여학생과 나란히 앉아서 공부를 하는 그를 보지 않았다면, 며칠 후 집안 사정으로 제주도에 내려가지 않았다면 나는 남편을 만나지 않았을까?
윤재는 알까? 아름다웠던 그 시절을 함께 했던 소녀가 여자의 삼 종 세트를 날리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머리 꼬랑지나 잡고 흔드는 것으로, 학교 식당에 먼저 가서 줄을 서주는 걸로 마음을 표현하는 게 고작이었던 그와 나 사이에 흐르던 감정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무한긍정으로 무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순간 모든 게 서글퍼진다. 떨어지는 꽃들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때 내가 어떤 상태였을지 상상이 가기에 그렇다. 그런데 비단 바람이 가져간 것은 꽃뿐이었을까. 새들만 소리 없이 세상을 뜨는 게 아니었다. 사람도 그랬다. 내가 수술에서 깬 후 파란 공 세 개를 열심히 불어 올리고 있을 때 한 사람은 특실에서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암 병동이니 당연히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겠지만 처음 보는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침부터 암 환자들이 모인 65 병동에 갑자기 통곡하는 소리가 들렸다. 전날도 한번 들렸지만 연이어 들리는 통곡 소리에 갑자기 병실 안 사람들이 눈이 동그래지고 불안한 눈빛이 된다. 울음소리가 있는 곳에 늘 죽음이 머문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기에 모두 불안해지는 것이다.
더구나 검사를 앞둔 <날라리 시스터즈>의 마음은 더 해 보였다. 암 병동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암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입원해 있기에 조그만 변화에도 금방 예민해진다. 나 역시 울음소리를 오전부터 오후까지 잊을 만하면 다시 들으려니 화가 났다. 심정적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저래야만 하느냐는 생각이 들었는데 저녁 즈음에 또 한 번 통곡 소리가 나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링거를 달고 피 주머니에 오줌주머니까지 찬 채로 간호사에게 갔다.
복도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울음은 더 커지고 있었고 1인실 앞에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간호사 두 명이 달려가더니 시트를 걷어 내오고 무언가를 다시 가지고 들어갔다. 한 남자가 울먹이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장례 절차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해하세요. 환자가 마흔네 살밖에 안 됐는데 갑자기 악화해서 돌아가셨어요.”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왔는지 안다는 듯 간호사가 말했다.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 순간 ‘저렇게도 갈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생각이란 걸 할 수가 없었다. 죽음이 바로 곁에 머무는 것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오전 내내 통곡한 사람은 친정엄마였다. 젊은 딸을 보낸 엄마가 화장실과 샤워실 사이의 벽에 기대어 통곡하는 모습이 보였다. 애가 끊어질 듯이 운다는 말이 바로 저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의 울음은 처절했다. 하지만 정작 나의 눈물을 쏟게 만든 건 막내 봄이 정도의 여학생이 한강이 바라보이는 창가에 서서 소리 죽여 우는 모습이었다. 까만 후드티를 입은 여학생은 조금 전 엄마가 운명한 방에서 나오더니 복도 끝에 있는 그곳으로 가서 등을 돌린 채 울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갑자기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엄마 없이 살아갈 세상이 소녀에게만은 특별히 관대했으면, 마음이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에 먼발치에서 그 소녀를 위해 신에게 기도했다. 가능하다면 그녀에게 부는 인생의 바람이 아름답기를 소망했다.
수술 후 늘 내가 걸으며 운동하던 그 복도를 그날 이후 나는 가지 않았다. 울고 있던 소녀의 모습이 자꾸만 오버랩되어서이기도 했지만 죽음이 머물다가 간 그 자리에 가고 싶지 않아서라는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삶과 죽음이 같은 공간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아득해졌다. 그곳을 스쳐 지나갈 때마다 나는 불과 마흔네 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녀를 위해 기도했다.
간호사가 오더니, 병실을 옮겨야 한다고 말했다. 6인실에 있을 수 있는 기한을 다 채웠으니 2인실로 가야 하는 것이 규칙이란다. 아직 피 주머니를 달고 있고, 오줌주머니는 언제 땔지 모르는 상황이라 동생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침대에 누워 있다가 일어나는 것 자체가 고역이어서 차라리 서서 병실을 서성거렸다. 한 손으로는 링거와 오줌주머니가 결린 행거를 밀고 다른 한 손으로 읽던 책을 가방에 넣었다.
방을 옮긴다니까 그동안 정이 든 날라리 삼총사 아주머니들 아니 ‘날라리 시스터즈’가 아쉬워했다. 더구나 셋 다 다음날 검사를 앞둔지라 마음이 어수선할 텐데도 나서서 짐 싸는 것을 도와줬다.
“세 분 다 항암치료 없이 파이팅 하세요.”
“그러게, 난 난소에 종양이 있는데….”
환자복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금옥여사가 말한다. 어제의 일로 그녀의 마음도 심란한 듯 표정이 어둡다.
“난 봐야 알아….”
활달하던 문숙 여사가 한숨을 푹 쉬며 말하고
“나는 담배를 좀 피웠는데…. 폐에 혹이 있다고 하는데 걱정이야. 전에 자궁암 수술을 했는데 하도 고생해서.”
카페의 여인, 티나 여사가 역시 전염이 됐는지 덩달아 한숨을 쉬며 말한다.
“괜찮을 거예요. 저도 담배 그렇게 피워 댔는데 폐암 아니고 자궁경부암 걸렸잖아요. 그러니까 힘내시고, 종종 놀러 올게요.”
“언제 퇴원해? 방사선 항암 이런 거는?”
“자궁, 난소 두 개, 림프 다 제거해서 소변 줄을 열흘 넘게 매달아야 하니까. 제가 젤 늦게 할지도 몰라요. 소변도 자력으로 가려야 보내 준대요. 항암은 주치의 샘이 수술한 조직검사 나와 봐야 안다고 하니까.”
“항암치료는 안 받으면 좋겠다.”
이미 항암치료를 받은 전력이 있는 티나 여사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그러게요. 그런데 처음엔 잘 됐다고 그러더니 이젠 결과 나와 봐야 한다고 하니까. 아주 돌겠어요.”
나의 주치의 선생은 워낙 신중론 자라서 아침에 행복했다가 저녁 회진 때 김 빠지게 하는 일이 종종 있는지라 사실 걱정이었다. 그나마 긍정의 기운이 보이는 사람은 치료를 담당해 주는 유미 선생이었다. 그녀의 박하사탕처럼 시원한 기운이 다른 사람까지 편하게 해 준다. 병원에서 또 하나의 즐거움이라면 매일 아침, 저녁으로 딸 같은 그녀를 보는 것이다.
며칠 전 운동을 하는 중에 복도에서 만난 유미 선생이 수술할 때 적출한 조직의 검사 결과가 나오면 알려주겠다고 살짝 귀띔을 해줬다. 그 고마운 말 한마디가 혹시라도 조직검사에 이상이 발견 돼서 항암치료, 방사선 치료까지 하는 건 아닌지 조바심치 던 나의 마음을 조금은 가라앉혀 준다.
어느 정도 거동을 할 수 있게 된 나는 동생을 기다리다가 늦어지는 바람에 동생 없이 방을 옮기기로 했다. 얼마 되지 않는 짐과 책은 병원 도우미 아주머니가 옮겨 주기로 했다. <날라리 시스터즈>의 아쉬운 배웅을 받으며 병실은 나서는데, 입구 쪽 침대에 누워 있던 ‘글 모르는 여인’이 내게 말했다.
“놀러 와요.”
늘 잠만 자던 그녀가 건넨 말이라 나는 눈이 동그래져서 그녀를 봤다.
“그동안 정들었나 봐. 나도 결과 기다리는데 걱정하지 말아요. 인생 뭐 한방이지.”
“한방은 무슨, 인생이 폭죽처럼 터지는 날도 있을 거예요.”
“지금껏 불발인 내 인생, 암까지 걸렸는데, 그런 날이 올라나?”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죽 가보기는 해야지요.”
나는 우울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도 실천하기 힘든 말을 해버렸다. 그녀나 나나 앞으로 십 년은 오 년 단위로 인생을 재계약하면서 살아갈 사람이면서 말이다.
새로 배정받은 방은 2인실이었다. 햇볕이 하염없이 들어오던 신관 7층 75 병동 32호 3번 창가 쪽과는 달리 약간 어둡고,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암이란 진단을 받은 후 갑자기 소심해진 나는 혹시 이게 결과에 대한 징조가 아닐까 하는 황당한 생각을 하며 짐을 정리했다. 소심도 이 정도면 병이다.
한숨을 푹 쉬며 침대 끝에 걸터앉아 병실을 둘러봤다. 딱 이 인실 병실 크기만큼 우울하고 썰렁했다. 날라리 시스터즈와 함께 있는 동안 잊고 있던 우울함이 숨죽이고 있다 서서히 되살아나려나 보다. 그래선지 럭셔리한 이인실임에도 불구하고 불안하고 마음이 방 온도만큼 서늘해진다. 습관적으로 텔레비전을 켰다. 6인실과 2인실이 다른 점은 높낮이 조절이 가능한 개인 텔레비전 있다는 것, 침대 높낮이 조절이 버튼 하나로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제일 먼저 선배와 허 편집장이 보낸 꽃바구니를 창가에 나란히 놓고, 책들을 정리했다. 그런데 그 꽃바구니가 허 편의 취향이 아니었다. 모든 여자는 붉은 장미에 훅 간다는 믿음이 있는 그러면 당연히 장미꽃이어야 할 텐데 장미가 아니라 청보라와 연보라가 어우러진 탐스런 수국이었다. 언제 그가 내가 그에게 수국을 좋아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적이 없는데 우연의 일치치 고는 수국이 절묘하다.
동생에게서 저녁에나 들린다고 문자가 왔다. 2인실을 혼자 쓰려니 갑자기 6인실의 소란스러움이 그리워진다. 6인실에 익숙한 탓인지 2인실의 낯선 정적이 불편해서 정약용의 시집을 펴 들었다. 그가 유배지에서 아내에게 보낸 시를 천천히 소리 내어 읽었다.
‘한밤에 지는 꽃은 천 떨기, 지붕을 맴도는 건 울어대는 비둘기와 어미 제비. 외로운 나그네는 돌아가지 못하니, 언제쯤 침방에서 아름다운 만남 가질까. 그리워 않노라 그리워 않노라 슬픈 꿈속의 그 얼굴.’
유교가 팽배하던 골수 보수파 시대에 정치와 당파의 거친 시간을 거치면서도 아내에게 그런 시를 날릴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고 수묵화 같은 그의 감성이 부러울 뿐이다. 한동안 나는 그의 시대를 상상하며 시를 읽다가 책으로 얼굴을 덮은 채 잠을 청했다. 병원에 입원해서 좋은 점은 불면증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눈만 감으면 그대로 다른 세상이니 그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터보니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고, 동생이 개인 냉장고를 정리하고 있었다.
“언니 그만 일어나.”
등에도 눈이 달렸는지 동생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한다.
“지금 몇 시니?
“여섯 시. 엄마는 전화 없었어?”
“없는데. 지난번에 무슨 놈의 팔자가 그러냐고 하도 잔소리하셔서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그냥 안 오시는 게 나아.”
“뭐 팔자가 어때서?”
“암 걸렸다는 이야기지. 집안에 그런 사람이 없는데.”
“호박죽 먹을래?”
동생이 병원 지하에 있는 죽집에서 사 온 호박죽을 건넨다. 그렇지 않아도 죽이 먹고 싶어서 지하에 내려갔다가 환자복은 입은 사람은 식당 출입이 안 된다고 해서 그대로 돌아서 나왔다. 그 이후로 노란 호박죽이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던 참이었다.
“눈물겨운 호박죽이구나….”
나는 호박죽을 받아 들고 걸신들린 사람처럼 먹었다. 그런 나를 동생이 물끄러미 바라본다.
“뭐가 눈물겨운데?”
“엄마가 해올 줄 알았는데 그냥 오시더라고.”
나는 호박죽 그릇의 바닥까지 긁으며 바보처럼 헤벌쭉 웃었다.
“엄마가 손자 키우느라 정신없으셔서 우리 돌볼 시간이 있기나 해? 손자 영어학원 상담 다녀야지, 학교 녹색 어머니 가입해서 활동해야지, 매일 산에 다니면서 운동하셔야지.”
“사실 우리가 돌봄을 받을 나이는 아니지만.”
“포기해. 그냥 사서 먹고 말아. 언니가 스물에 형부하고 결혼하던 그날 저녁부터 언니는 상행선 엄마는 하행선 된 거니까. 식 마치고 저녁에 대성통곡하시면 죽일 년, 살릴 년 했다니까. 언니는 대학 안 마치고, 작가 안 됐으면 엄마가 아마 평생 언니 씹었을걸. 언니도 알잖아 엄마의 교육열. 언니 열아홉 살 때까지 엄마의 자랑이었어. 공부 잘하지, 글 잘 쓰지….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못된 엄마는 요즘 말로 언니를 당신의 아바타로 생각했던 거지.”
“알지. 지금은 그 교육열이 손자에게 발현되는 중이시고.”
동생의 말처럼 엄마의 호박죽은 그래서 아마도 평생 못 얻어먹을지도 모른다. 나도 가을에 종종 배신감을 느끼고 거품을 무는데 그 시절 엄마는 오죽했을까.
“참, 낼 봄이 온다는데, 연락받았어?”
“아니. 지난번에 왔으면 됐지, 뭐 하러? 애들 암 병동 오는 거 싫은데.”
“왜 못 오게 하냐고 난리야.”
“그냥, 보여주기 싫어.”
왠지 이런 나의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싫다. 특히 고등학생인 봄에게는 더욱 보여주기 싫다.
“그러니까 그렇게 가버렸구나.”
동생이 혼잣말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무슨 소리야?”
“있어 그런 게. 참 엄마가 고모들에게는 언니 수술 사실 안 알렸데.”
“말들 많으실까 봐 그러신 게지.”
“시댁에서는?”
“며칠 전에 잠깐.”
시댁에서는 딱 한 번 왔다 갔다. 치매가 오신 시어머니를 동서가 모시고 왔는데 내가 암 수술한지도 모르셨다. 아니 알려드렸는데도 자꾸 잊어버린다고 동서가 웃으며 말했다. 시어머니는 봄에 수술한 무릎을 다시 수술한 줄 아시고 왜 자꾸 나이도 젊은데 무릎이 부실하냐고 한마디 하시기에 암 수술을 했다고 하니까 ‘네 친정에 누가 암 환자 있냐? 그것도 집안 내력이라던데?’라고 말씀하시더니 삼십 분쯤 앉아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최근의 기억은 자꾸 잊고, 과거의 기억만 선명하게 기억한다고 동서가 말했지만 나는 모른 척했다. 이 시점에서 나는 누구의 기억에도 관심이 없으니까. 한평생을 두 아들을 위해 살아온 인생을 보상받으실 나이에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가 안쓰럽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착한 맏며느리 역할에 충실할 생각은 없다.
“언니도 큰일이다. 시어머니 때문에.”
“몰라. 나는 이제부터 내 꼴리는 대로 살 거니까. 나만 생각하고, 내 일만 생각하고 살 생각이야. 나에게만 포커스를 두고 살 거야.”
“뭐야, 다시 태어난 거야?”
동생이 웃으며 말했다. 처음엔 나의 암 소식을 듣고 펑펑 울던 동생이 한시름 돌렸는지 웃기까지 한다. 사실 나는 암이라는 확진을 받고도 눈물이 안나 왔는데 동생이 통곡하며 우는 바람에 나도 얼결에 눈물을 흘렸었다.
“수술하고 병실로 돌아오면서 그렇게 생각했어. 남의 인생에는 개입하지 말자.”
“그 남의 범위는?”
“나를 제외한 모두.”
하지만 나중에 알았다. 그게 말처럼 간단하고 쉽지 않다는 걸.
동생과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잠 많은 동생이 2인실이라서 좋다며 일찌감치 자버리는 바람에 홀로 깨어 있어야만 했다. 블라인드 사이로 스며드는 달빛만이 나의 한심한 신세를 알아줄 뿐이다.
한 번도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예상한 적이 없어서 처음엔 당황스럽기 그지없었으나 한편으로는 달리기를 마친 사람처럼 담담하다. 결과가 걱정되기는 하지만 처음에 의사가 말한 것처럼 혹시라도 항암치료를 받게 될 상황이 오면 그것도 받아들이자는 생각 쪽으로 정리는 해두었다.
이상하게 수술 한 이후로 남편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카톡을 보내오는데 답장도 하지 않고 있다. 그가 아주 오랜만에 사랑한다고 문방구에서 파는 스티커를 닮은 하트를 카톡으로 날렸다. 하지만 현재 시점에서 그 하트는 감동적이지 않다. 그를 사랑했던 기억은 선명한데, 아직도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사랑보다 무서운 건 정이라는데 나는 그 정보다 한 단계인 의리로 뭉쳐서 사는 건 아닌지 묻고 싶을 정도다.
꿈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 멋진 소설을 쓰는 것. 나는 그 둘을 가졌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는 카피본만 들고 살았단 생각이 든다. 원본은 어딘가에서 잃어버리고, 말이다.
‘카톡’ 하고 소리가 난다. 핸드폰에 카카오톡의 노란 말풍선이 떴다. 남편이 왜 전화를 안 받느냐고 문자를 보냈다. 온종일 그가 전화할 때마다 수신 거부를 눌렀다. 나는 아직 그의 말을 수신하고 싶지 않다. 아니 그의 진심을 확인하고 싶지도 수신하고 싶지도 않다. 당분간은 남편과 수신 불가의 시간을 보낼 참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바보였다. 이건 바보가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살면서 삼십 대에 한번 찾아간 점쟁이가 분명 사주에 자궁이 약하니 반드시 명심하라고 했고, 사십 대 초반에 찾아간 철학관에서도 자궁으로 인해 고생할 거니 명심하라고 했건만 그 나이 때 여자는 어지간하면 다 그래,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코웃음 친 죄, 산부인과라면 막내 난 이후로 뒤돌아보지도 않은 무심하고 무식한 죄, 내 인생에 너무 자신만만한 죄. 그 모든 죄 때문에 나는 달을 보며 잠을 못 이루고 있다.
밤새도록 내 몸 안에 냉탕과 온탕이 번갈아 가며 가동했다. 열이 갑자기 확 오르며 땀이 나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훅 떨어진다. 근 한 달 사이에 내가 겪은 일들에 비하면 냉탕과 온탕은 우스운 일이기는 하지만, 왠지 억울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생선의 난소와 나의 난소는 분명 다르기에, 그렇게 쉽게 손해 날 게 없지, 뭐 하고 퉁을 치고 웃어 넘기기엔 십만 분의 몇백 명이라는 숫자가 나를 열받게 한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밥이 도착했다. 밥을 보는 순간 한숨이 나왔다. 모조리 내가 싫어하는 반찬이었다. 콩자반에 찐 고등어에 두부. 거기에 두유까지 후식이다.
“왜?”
“빵이랑 커피 마시고 싶다.”
간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멍한 눈으로 식반을 노려봤다.
“이렇게 먹어야 암에 안 걸려. 잘 기억해 뒀다가 그대로 해. 의사 선생님이 그렇잖아 암이 무서운 이유는 재발이라잖아.”
“후 그만해라, 두 번만 더 들으면 경기 일으키겠다.”
매일 아침 밥상 앞에서 고뇌하면서 먹어야 한다. 몸에 좋다는 식단이겠지만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형부가 또 전화했어. 전화 왜 안 받느냐고?”
“받고 싶지 않으니까. 그것 외에 달리 이유가 있나?”
나는 생선 토막이 남편이라도 되는 양 노려보며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내 결혼을 반 토막 내버리지 않은 이유는 내 인생에 대한, 내가 했던 사랑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는데 나만 그 예의를 지키고 있었던 것 같다. 삶에 버무려진 사랑이 그렇지 뭐라는 생각이 들자 지나온 세월에 화가 났다.
애 셋을 낳고, 장편 세 개를 썼고, 암에 걸렸고, 난소와 자궁 그리고 림프를 제거한 것이 내가 마른 여덟이 될 때까지 일어난 일의 전부다. 내가 생각했던 마흔여덟은 분명 이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 분명한데,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