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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 중 다행은 없다

by Dear Lesileyuki


엄지발과 손가락의 매니큐어를 지웠다. 수술은 한 시 넘어서라고 전날 간호사가 알려줬는데, 갑자기 간호사가 오더니 압박 스타킹을 신고 속옷은 벗으라고 했다. 시계를 보니 여덟 시가 조금 넘었을 뿐이었다. 갑자기 수술 일정이 당겨졌다. 잘 될 거라는 마음과, 알 수 없는 시간 동안 일어날 일로 인해 느껴지는 두려움이 마찰을 일으키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압박스타킹을 신으며 생각했다. 연초에 운세를 봐준 그 철학관 할아버지는 왜 이런 결정적인 것을 못 맞췄을까? 망할 놈의 할배 같으니라고. 남편보다 오래 살 거라고 하더니 그 말도 다 뻥인가 보다.

수술실까지 데려갈 남자와 그가 밀고 온 철제 침대를 보는 순간 수술실의 호출이 실감이 나면서 힘이 빠진다. 나는 걸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임무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규칙대로 해야 한다고 해서 결국 중증 환자처럼 침대에 누워서 수술실로 향했다.

나름 담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보다. 어제까지도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수술실로 가는 침대에 누우니 비로소 실감이 났다. 여덟 시간이나 걸리는 수술을 통해 난소와 자궁, 림프가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간다는 사실이 나를 겁먹게 했다. 담담히 포기하는 듯 보였지만 기실은 그렇지 않았다. 갑자기 김광석의 노래를 들으며 펑펑 울고 싶어진다. 그나마 움켜쥐고 있던 한주먹도 안 되는 내 안의 감수성이 자궁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질까 두려웠다.

남편은 정해진 출장 때문에 없었고, 여동생만이 곁을 지켰다. 드라마에서처럼 수술실로 실려 가는 도중 따라오며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가족은 없었다. 누구도 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인생이란 놈이 내 앞에 갑자기 놓고 사라진 허들을 혼자서 넘고 싶었다.

치매인 시어머니는 내가 수술하는 것도 잊었을 것이고, 친정엄마는 나의 안위는 신중과 분석이라도 얼굴에 쓰인 주치의가 쥐고 있건만 신에게 부탁하기 위해 어느 산사를 찾아가 백팔 배를 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여동생은 나보다 더 긴장한 얼굴이었다. 눈물까지 글썽인다. 그런 동생에게 괜찮다고 웃어주었지만 나 역시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천정의 하얀 불빛을 따라 수술실로 향했다. 마음을 떠다니던 부유물들이 차가운 빛을 따라가다 보니 마음 밑바닥으로 내려앉는다. 이상하게도 가족 중 누구도 생각나지 않았고, 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머릿속에 떠오른 건 싱가포르의 <클락키>였다. 그곳에서 마시던 코로나 맥주가 마시고 싶었다.

‘수술이 잘되면 싱가포르에 가야지, 클락키에 가서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리알토의 <Monday morning 5:19>를 들으리라. 그리고 발리로 건너가서 배스킨라빈스의 피스타치오 아몬드 아이스크림과 함께 40도의 아락발리를 마시자’ 나는 그런 상상을 하며 수술실로 들어갔다. 서늘하다 못해 차가운 수술실로 들어서는 그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같은 건 개나 물어가라는 것이었다. 수술실에서 나올 때는 달라지고 싶었다. 차가운 냉기가 나의 온몸을 랩처럼 감쌌다. 이래저래 울고 싶어진다.

수술실 침대에 누워서 의사들이 수술준비를 하는 동안 벌집모양의 밝은 등을 바라봤다. 순간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수술 전날까지 읽었던 정약용의 시중 하나를 외우며 주변을 돌아봤다. 갑자기 긴장한 나에게 의사가 우주인이나 쓸법한 마취기구를 입에 대더니 숨을 쉬라고 한다. 별거 아니구나, 의식을 잃는다는 것이. 이후에 일어나는 일은 내가 모르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두려운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작별도 없이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쉬운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어차피 그들은 잘 살 거니까.

수술실에서 현빈을 봤다. 마취로 인한 환각이 아니라 우연히 고개를 돌리는 찰나에 컴퓨터 화면에 떠 있는 현빈을 본 것이다. 수술방의 누군가 현빈을 좋아하는가 보다. 어이없게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수술실에서 현빈의 얼굴을 보다니. 검은 슈트를 입은 현빈의 얼굴을 보며 의사의 말에 따라 심호흡을 했다.

테니스를 치다가 다친 후 이차 퇴행성 질환이 와서 어쩔 수 없이 추벽 제거 수술을 할 때 했던 하반신 마취와는 다른 느낌이다. 도대체 내가 전생이 얼마나 싸가지 없는 짓을 해서 이 지경이 됐을까? 정형외과 의사와 한의사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까지 지난해 초부터 시작된 의사와의 불편한 만남이 계속되고 있으니 말이다.

천정의 불빛이 오버랩되며 나의 의식이 진공상태가 되어 어디론가 사라지는 걸 조용히 지켜봤다. 너무 긴장하면 시야가 하얗게 변한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버튼을 누르면 TV의 화면이 꺼지듯 나의 의식이 아웃됐다.

의사가 나를 깨우는 소리를 들었다. 그가 말했다. 다 잘됐다고. 부디 그의 말이 초지일관하기를 빌며 다시 눈을 감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실험실의 개구리 신세였을 것이 분명한데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깨어났고, 이 나이엔 조금도 아쉬울 것이 없는 자궁과 난소 그리고 림프가 사라졌다. 적어도 꿈은 꿀 줄 알았는데 하얀빛을 따라가서 천사를 만나거나 조상님을 만나는 것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중간 과정은 생략되고 병실에서의 기억만 났다. 여동생이 자꾸 잠자려는 나를 깨우려고 얼굴을 때렸지만 나는 그냥 자고만 싶었다. 생각보다 아프지는 않았다. 큰 숙제를 끝내고 잠이 드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문득 깨어나지 않아도 나쁠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을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생과 가을이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를 들으며 잠과 현실의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가을이 제 이모에게 엄마에게 호흡 훈련을 시키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곤 다시 애인이 있냐고 묻는 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을의 웃는 소리가 들린다.

뭐지, 저 의미는? 나는 귀를 기울여 들으려고 했는데 다시 잠이 쏟아져서 듣지 못했다. 쏟아지는 잠과의 사투를 벌이며 세 시간을 채운 후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꿈속에서 아비정전에서 나왔던 장국영이 맘보춤을 추는 것을 봤다. 하얀 러닝셔츠를 입고 춤을 추던 그와 초록빛이 가득했던 화면이 사라지면서 눈을 떴다. 잠든 사이 여동생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형부 카톡 왔었어. 잘됐냐고.”

“개뿔.”

“어?”

“개뿔이라고.”

“수술은 잘 됐다던데.”

“알아.”

“어떻게?”

“수술실인지 회복실인지 의사가 깨우며 잘됐다고 말해준 기억이나.”

“다행이다 언니.”

“이런 걸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하는 거지.......”

나는 내 몸에 달린 소변주머니와 배꼽 아래 달린 복숭아 로즈와인 빛깔의 피 주머니를 보며 말했다. 수술 전에 신은 압박 스타킹은 거의 엽기 수준이었다. 몰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두 달은 제거한 림프 때문에 신고 있어야 한다니 할 말이 없다.

"엄마는 낼 오신대.”

역시 엄마답다. 모든 친정엄마는 보통 이 정도면 한걸음에 달려오는 것이 맞을 텐데 시크한 친정엄마의 모성애는 역시 남다르다. 내일을 기약하시는 걸 보면.

나는 천정을 바라보며 웃었다. 수술 후 처음 웃는 웃음이다.

“왜?”

동생이 묻는다.

“그냥. 역시 우리 마님은 특이하셔.”

“내가 보기엔 언니도 특이해. 그래서 글을 쓰는지 모르지만. 암튼 수술 잘 돼서 다행이다. 초기라니까. 언니 의사 잘 만난 난 줄 알아. 그 의사샘 아니었으면 몇 달 후에 더 나빠져서 수술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꼬장 부리지 말고 그저 신처럼 모셔. 앞으로 오 년 동안.”

“내가 언제?”

“언니 무릎 수술했던 정형외과 의사한테는 그랬거든......."

여동생은 그사이 의사선생의 팬이 되어 있었다. 동생의 말인즉 여기저기 구겨지고 헐렁한 초록색 수술복과 흰 가운이 그렇게 경이로운 패션인 줄 처음 알았단다. 진지와 시크를 오가는 의사선생인지라 동생이 반할 만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홀릭이 아니라 존경의 눈빛이었다.

사실 그때, 무릎 수술 후 이차 퇴행성이 진행됐다는 의사의 말에 실망한 나는 조심스럽게 지금까지 내가 신어온 12㎝의 힐은 신을 수 없냐고 물었다가 돌아온 답이 ‘물론입니다. 운동화만 신으셔야 합니다.’라는 단호한 말이어서 실망했던 터였다. 물론 그 이후로도 한동안 의사의 충고를 무시하고 지상에서 12㎝를 포기하지 못했다.

“어머님 사건 알지? 그 이후로 언니 별명이 ‘이름을 불러주세요’가 됐다는 이야기가 있지 아마.”

동생이 생각만 해도 우습다는 듯이 나를 보며 킥킥댄다.

생각난다. 수술 후 엑스레이 찍는 선생이 내게 무신경한 목소리로 ‘ 어머님, 올라가주세요’ 했다. 나와 연배도 비슷한 사람이 말끝마다 ‘어머님’ 하는 바람에 열받아서 참다가 ‘샘도 보아하니 저랑 비슷한 나인 거 같으신데 말끝마다 ‘어머님’ 하시느냐’고 따졌다. 흥분한 내가 앞으로는 이름을 불러달라고 하자 당황한 그 선생은 정형외과는 하도 연세가 드신 분들만 와서 ‘어머님’이 습관이 됐다고 변명을 하더니 이후론 정중하게 이름을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설혹 그런 일이 있더라도 그때처럼 항의할 힘도 의지도 없다.

내가 6시간 넘게 수술하는 동안 6인 병실은 새로운 사람들로 바뀌어 있었다. 내내 마음에 걸렸던 병실 입구의 글자를 모르는 여인은 여전히 있었지만 두 명의 환자들이 새롭게 바뀌었다. 맞은편 침대와 바로 옆의 침대가 주인이 바뀌어 있었다.

새로 온 맞은편의 티나 터너 파마를 한 아주머니는 낭만 카페 마담 같은 분위기였다. 낙천적인 웃음 덕분에 생긴 눈가의 잔주름이 친근해 보이는 그녀는 원자력병원에서 수술했지만, 폐에 종양이 생겨서 아산병원에 재입원을 했다며 수줍게 웃었다.

바로 내 침대 옆의 김문숙 할머니는 평생 손주를 키우느라 본인이 암에 걸린 줄도 모르고 제주도 여행을 갔다가 갑자기 체중이 빠지고, 하혈해서 입원했다는 데도 활짝 웃고 계셨다. 할머니라고 하기엔 마음이 젊어 보이고 하이톤의 결 고운 목소리를 가지신 분이셨다.

먼저 입원한 금옥여사를 포함한 세 명의 여인들은 죽이 잘 맞았다. 수술 후 가스가 나오지 않아서 식사도 못 하고 멍하니 앉아서 멍 때리는 일이 전부인 나로서는 그 세 명의 여자들의 입담을 즐기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녀들은 병실의 치고 빠지는 말솜씨가 탁월한 만담가였다.

각각 다른 주치의로부터 다음날 조직검사를 받기로 되어 있는 아산병원 항암 병동인 65병동의 세 여자는 본인들 스스로 <날라리 삼총사>라고 이름을 짓고 쉴 새 없이 이야기하고, 눈만 마주치면 깔깔거린다. 종일 세 여인의 수다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 어지간한 만화책 20권 돌파하는 것보다 재미있을 정도였다. 세 여인은 뭐든 함께했고, 소녀들처럼 몰려다녔다. 그들에게 내일은 아직 다가오지 않았기에 현재를 즐기고 있지만 한번 경험한 나는 그녀들이 걱정스러웠다. 이왕 지나갈 바람이라면 각각의 형편에 맞게 강약조절을 해달라고 운명에게 부탁하고 싶었다.

이미 한 번의 경험이 있는 금옥여사가 갑자기 장을 비우는 약을 타 먹는 데 필요한 생수를 사러 가자고 선동을 했다. 내가 그녀의 이름을 안 것은 침대 앞에 걸어 놓은 이름표 때문이다. 나이, 성별, 병명 이름이 적힌 표는 새로 들어온 환자에게 묻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아우트라인을 잡을 수 있다. 나 역시 침대 앞머리에 금식이라는 큰 글자와 함께 나이 성별 병명이 적힌 표를 걸고 있다.

잠시 낮잠을 자거나 검사를 받으러 간 사람들 덕분에 조용했던 병실에 세 여인의 웃음소리가 퍼진다. 환자복을 입었어도 머리만은 티나 터너 스타일인 사임 씨를 동생과 나는 티나 여사라고 불렀다. 어쩐지 사임이란 이름과 그녀의 머리 스타일이 어울리지 않아서 입원하는 내내 그녀는 티나 여사였다. 티나 여사는 아이는 없고 남편과 단둘인데 남편이 그녀에게 워낙 지극정성이어서 연세가 좀 드신 분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타나 여사와 반장 격인 금옥 여사, 두 명의 며느리와 딸의 아이까지 키우느라 육아의 달인이 됐다는 문숙 할머니는 지하에 있는 슈퍼로 물을 사러 간다고 아주 신이 나셨다. 너무 명랑 유쾌해서 그녀들이 입은 환자복이 여행 가기 위해 맞춰 입은 단체복처럼 보였고 암 환자들이 간혹 생사를 넘는 항암 병동이 일반 병동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근데, 견딜 만은 해?”

자칭 육아의 달인인 문숙 할머니가 선 경험자인 내게 묻는다.

“저는 견딜 만했는데. 차갑게 해서 단숨에 마시는 게 비결이라면 비결이지요.”

나는 먼저 매 맞은 자의 여유를 부리며 말했다. 어제와 오늘의 기분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날라리 시스터’는 나의 말을 듣고 냉장고에 보관된 물을 사야 한다며 슈퍼로 몰려갔다. 그 세 명의 여인이 빠져나가자 병실이 조용해졌다. 갑자기 눈물이 나려고 했다. 아무래도 수술로 비워진 자리가 슬픔으로 채워졌나 보다. 주책없이 이유 없이 그냥 눈물이 흐른다.

동생이 볼일이 있다며 집에 가고 친정엄마가 와서 하룻밤 봐주기로 했는데 소식이 없다. 사실 소변줄을 달아서 소변은 때가 되면 저절로 나오고, 누워 있기만 하면 되는 나로서는 누군가 옆에 있는 오히려 불편했다. 물에 적신 탈지면을 입에 문 채 그저 멍하니 누워서 음악을 듣고, 빠른 회복을 위해서는 무조건 움직여야 한다는 간호사의 말 때문에 링거와 소변줄, 피 주머니 같은 것을 주렁주렁 달고 복도를 왕복하며 운동을 하면 된다. 금식이기에 먹을 필요도 없다. 자고, 운동하고, 세 개의 파란 공을 입으로 불어서 띄우는 연습을 하는 것이 수술 이틀째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이지만 그래도 견딜 만하다. 그런데도 가끔 볼풀에 빠지는 것처럼 깊은 슬픔에 대책 없이 빠져둘 때가 있다. 바로 지금이 그런 순간인데, 내 옆에는 아무도 없고 남편은 먼 곳에 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딱 하나 폼생폼사인데 그 점에 관한 한 나의 상태는 ‘웃기고 있네!이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부은 얼굴, 수액을 너무 맞아서 팅팅 부은 손은 굽히기조차 힘들었다. 호박죽 생각이 간절했다. 호박죽은 친정엄마가 한 것이 일품인데 혹시나 만들어서 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친정엄마를 기다렸다.

<날라리 시스터즈>가 병원 지하에 있는 슈퍼에 간 사이 친정엄마가 왔다. 친정엄마는 늘 그렇듯이 보무도 당당하게 병실 안으로 들어서더니 주변을 한번 휘리릭 둘러본다.

“아휴, 아무것도 못 먹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 사 왔다.”

병실을 한번 둘러본 친정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대뜸 그렇게 말하더니 맞은편에 앉는다.

그럼 그렇지. 나는 아음속으로 깊은 탄식을 하며 친정엄마를 바라봤다. 엄마의 모성애는 역시 평균이 이하다. 혹시나 하고 기다렸던 호박죽이 머릿속 한구석으로 일순간 처박힌다. 아무래도 호박죽은 나중에 거동이 좀 편해지면 지하에 있는 식당에 가서 주문해 먹어야 할 것 같다.

“밑에 다 있는데 뭐. 점심은 드셨어?”

“나야 늘 가지 늘 가지고 다니는 거 있는데”

소식을 하고 매일 등산을 하는 탓에 칠십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정정한 친정엄마는 랩으로 싼 콩찰떡을 꺼내더니 먹는다. 건강에 좋은 잡곡류를 넣고 직접 만들었다는 찰떡이 친정엄마의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인 셈이다. 순간 콩찰떡을 오물오물 먹는 친정엄마를 보고 있자니 울고 싶어진다. 아무래도 자궁이 날아간 대신 그 자리를 울음주머니가 채운 것 같다.

“그나마 빨리 발견해서 다행이다.”

친정엄마가 그렇게 말하고 두 개째 콩찰떡을 입으로 가져가는 찰나 모성애를 기대하고 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간다.

“그러게….”

나는 멍하니 천장을 보며 말했다.

“나, 내일 아침 일찍 가야 하는데, 세영이가 일찍 온다니?”

친정엄마는 오자마자 내일 아침에 갈 걱정부터 하신다. 수술한 후 소변 주머니에 링거에 피 주머니까지 달고 있는 딸보다는 내일 당장 학교에 갈 손주가 걱정이다.

“아마도. 요즘 나 때문에 고생이 말이 아니지.”

“아, 동기간끼리 서로 도와야지. 자매 좋은 게 뭐냐?”

“그래도.”

“수술은 잘 됐데?”

“뭐 그렇다고는 하는데. 적출한 것 조직검사 들어갔는데 결과가 어떨지는 봐야 한대.”

“뭐, 무슨 말이 그래? 좋으면 좋은 거지.”

“세상에는 확인과 통계 확률 이런 게 중요한 사람들이 있어.”

“....... 그럼 다 끝난 게 아니야?”

“재발을 배제할 수 없어서 앞으로 오 년은 관찰한다던데. 봄이 아빠 친구 부인은 유방암인데 삼 년 만에 재발해서 죽었어. 작년에.”

처음 그 소리를 들었을 때는 안타깝고 남겨진 아이들 때문에 가슴 아팠는데 지금 말하는 순간에는 마음에 서늘해진다. 내가 암이라는 것을 알고 인생 앞에서 그 누구도 예외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실감했기 때문일까.
“어휴 왜 그런 게 걸려서. 글 쓴다고 너무 신경 쓰고 살아서 그런 거 아냐?”

엄마는 역시 도움이 안 된다. 차라리 혼자 누워 천장을 멀거니 보고 있는 게 나을 뻔했다. 어차피 소변 주머니도 차고 있으니 화장실 갈 일도 없고, 금식 중이니 일어나 밥 먹을 일도 없으니 말이다.

“너는 시집을 늦게 가야 좋다고 했는데….”

“그래서 내가 암에 걸렸다는 거야 뭐야? 수술하고 누워 있는 딸에게 엄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셔?”

“편한 짝을 만나야지. 그렇게 말렸더니만. 맨 날 아들 타령이나 하고, 벌써 올해로 병원 신세만 몇 번이냐, 한의원에, 정형외과에 이젠 암 수술까지….”

“그만하셔. 엄마는 그러고 싶으셔? 아니면 그냥 집에 가시든지.”

“내 친구 딸들은 다 멀쩡한데 너만 이러니까 내가 천불이 나서 그렇지. 젊으나 젊은데”

“나 그렇게 안 젊거든. 내 나이 정도면 있을 수 있는 일이야.”

있을 수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정말 내 주변의 사람들은 죄다 멀쩡했다. 순간 기분이 급 다운되며 지금까지 날 위로해 주던 ‘불행 중 다행’이란 말이 순식간에 개뿔이 되어 허공으로 사라진다. 아무래도 친정엄마의 비관 바이러스가 감염됐나 보다.

“엄마 집에 가셔.”

“승질머리 하곤. 그 승질은 나한테만 부리지?”

“내가 승질을 제대로 부려보기나 했으면 말을 안 해.”

“아휴, 세영이 그건 팩해도 금방인데 너는 승질 내면 눈에서 불이 나와. 가겠다고 우겨서 시집보냈더니, 나중에 그때 패서라도 말리지 왜 안 말렸냐고 지랄을 떨어서 사람 뒤로 넘어가게 하질 않나….”

엄마는 생각만 해도 기가 막힌다는 얼굴이다.

“내가 언제?”

“셋째 봄이 낳고 네 시어머니랑 나랑 한바탕 하고 난 후에.”

“엄마가 그때는 어서 그런 집구석으로 시집을 갔냐고 정신 나간 년이라고 그래서 그랬지.”

“암튼 네가 볼 적에 너도 딱 너 같은 딸 하나 때문에 속 좀 썩어 봐야 해. 그래야 그 배신감이 어떤 건지 알 거다.”

엄마는 또 그놈의 콩찰떡을 오물오물 드시며 말했다. 아무리 이전에 착한 딸은 아니었어도 콕콕 박히는 말만 하는 엄마를 보며 생각했다. 역시 고모 말대로 엄마와 나는 합이 안 맞는다고. 그렇지 않고서야 암 수술한 딸을 앞에 두고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다.

“물이나 드시면서 잡숴.”

“물이 어디 있는데?”

“아 진짜. 내가 벌떡 일어나서 가져다 드려?”

“알았어. 그저 나한테만 승질이고 지랄이지?”

“언제?”

“느이 시댁서는 왔어?”

“어.”

호르몬 탓인지 아니면 친정엄마 탓인지 등줄기에서 열이 확 올라오더니 얼굴이 화끈거리고 부아가 치민다.

“그 정정하던 노인네가 치매를 앓으시니…. 앞으로가 걱정이다.”

“뭐가?”

“맏며느린데.”

“맏며느리 같은 소리 하지 말라고 해. 제사 지내는 사람이 맏며느리지 무슨. 난 몰라. 난 암 걸린 년이야.”

“뭐 초기라며?”

“어찌 됐든 간에. 난 이제 나 꼴리는 데로 살 거야.”

갑자기 친정엄마가 나를 보며 노인답지 않게 배시시 웃는다.

“왜?”

“언제는 니 맘대로 안 살았냐?”

“엄마?!”

“....... 나도 며느리 있는 시어머니 관점에서 솔직하게 말하면 며느리로서 너, 별로야. 글 쓴다고 담배 피우지, 한 마디도 안 지고 토 달지. 뭐 그리 잘났는지. 네가 머리는 좀 좋아도 이쁨 받을 짓을 하는 며느리는 아냐. 봄이 낳고 아들 타령하는 시어머니에게 ‘뿌린 대로 거두는 겁니다.’라고 말하는 며느리는 나도 별로야. 친정엄마로서는 시원한 소리지만.”

아주 명쾌하게 염장을 지르신다. 엄마 말을 들어보면 결론은 내가 좋은 딸도 좋은 며느리도 아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다. 앞으로도 나는 좋은 며느리든 좋은 딸이든 될 생각이 전혀 없으니까.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나서 제일 먼저 한 생각이 인생의 반 이상을 돌은 마당에 누구의 눈치도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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