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오는 길에 유진이가 일하는 편의점 앞에 잠깐 차를 세우고 안을 봤다. 유진이 막내 봄이랑 웃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 교복을 입은 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유진이를 올려다본다. 봄의 왈츠가 두 사람의 주변으로 음표를 날리며 흐르는 것 같은, 바야흐로 홀림과 눈부신 광채의 나날이다. 가을은 그 단계를 넘어 중독의 계절로 접어들었다. 그깟 사랑보다는 스펙이 우선인 겨울은 지금 어느 시절을 통과 중일까? 본인이 이 경이로운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데 일말의 기여도 하지 않은 스카프의 여왕이자 ‘리가르드 유럽중앙은행 총재’를 컴퓨터 바탕화면에 띄어 놓은 가을은 아직도 아홉 살에 말했던 것처럼 부자가 돼서 수영장이 딸린 집에서 사는 꿈을 꾸고 있을까?
드디어 시어머니가 있는 ‘내 집’에 도착했다. 집 앞에 차를 세우고 들어가려던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대문과 담을 타고 오르던 덩굴장미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애지중지하던 나의 장미 넝쿨이 한 마디로 작살이 나버렸다. 대문 옆 한구석에서 댕강댕강 잘린 장미 가지들이 쌓인 채 시들어 가고 있었다.
빨간 벽돌담 밑의 옥잠화도 찔레도 목수국도 멀쩡한데 사정없이 잘린 장미가 한여름의 오후의 햇살을 견디고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치우려고 했는데…. 아니, 그렇게 할머니를 말렸는데도 막무가내로 잘라 내시더라고요. 어찌나 힘이 센지 못 당하겠어요”
마당 한쪽에서 난장판이 된 정원을 치우던 간병인 아주머니가 본인이 저지른 일인 양 어쩔 줄 몰라하며 다가오더니 잘린 장미 가지들을 서둘러 치우려고 했다.
“그대로 놓아두세요.”
발밑으로 모든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암 수술이 후에도 느껴보지 못한 절망감이 장마전선 북상하듯 올라온다. 번열증 환자처럼 온몸에 열이 확 오른다. 이게 다 그놈의 난소를 제거한 탓이다. 아니 시어머니 탓이다.
“할머니는 주무세요. 피곤하신지. 벌써 네 시간째 주무세요.”
간병인 아주머니가 묻지도 않았는데 알려 준 후 이 상황이 민망한지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간다.
퇴근해 돌아온 남편 이 상황을 보고 뭐라고 할지 궁금하다. 시어머니가 집에 온 후로 부쩍 퇴근 시간이 빨라진 남편을 벤치에 앉아 한참을 기다렸다. 그가 올 때까지 꼼짝하지 않고 기다릴 생각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그가 시어머니가 나의 정원에 저지를 만행(?)을 확인하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퇴근이 늦다.
여섯 시면 정확히 퇴근하는 간병인 아주머니가 퇴근하려다 잘려 나간 덩굴장미 앞에서 멈춰 선다.
“무슨 욕을 그렇게 하면서 장미를 쳐내시던지…. 그나저나 이거 아까워서 어째요?”
“내년에 또 새로운 가지를 내고 꽃을 피우겠지요.”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면 다행이지만….”
“힘드시죠?”
“아뇨. 이 집 할머니는 제가 보살핀 분 중에서 제일 증세가 약하신 분이라서 제가 편해요. 고집이 좀 세시고, 가끔 저 보고 집에 안 가고 왜 여기 있냐고 호통을 치셔서 난감하지만. 그것 빼곤 좋아요.”
“아주머니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할머니가 참 점잖으셔서 저도 아직은 편해요. 그럼 낼 뵙겠습니다.”
간병인 아주머니가 대문을 열고 나가면서 다시 한번 잘린 덩굴장미를 보더니 내게 ‘내년에는 다시 꽃이 활짝 피겠지요?’라고 묻는다.
나는 웃으며 아마 그럴 거라고 대답했다.
아주머니가 돌아간 후 한참 동안 정원을 정리하며 잘려 나간 장미 가지들을 한 곳에 몰아서 쌓았다. 꽃이 필 때는 화려했으나 잘린 가지들은 시들고 초라했다. 하지만 일회용 쓰레기봉투에 아무렇게나 넣어서 버리고 싶지 않았다. 반드시 남편이 보는 앞에서 불 싸지르리라 벼르고 있었다.
퇴근이 늦는 남편을 기다리다가 라이터를 가지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 긴 낮잠에서 깬 시어머니가 거실 소파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너는 매일 어딜 쏘다니냐? 또 영화 보고 왔냐? 학교 간다고 그러고는 영화 보고 온 거 내가 모를 줄 아냐?”
시어머니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나를 흘겨보며 말했다.
시어머니는 철없는 며느리가 몰래 영화를 보러 다닌 것을 알고 계셨다. 어지간한 과거의 일들, 그리고 두 시간 전의 일도 잊어가는 중이면서 그 사실을 시어머니는 기억하고 있었다.
“알고 계셨어요, 어머니?”
“그럼 내가 등신이냐? 그래 오늘은 나 속이고 무슨 영화 봤냐?”
“그래서 마당에 장미를 다 잘라 버리신 거고?”
나는 시어머니를 보며 웃었다. 갑자기 시어머니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시어머니가 말이 없다. 며느리가 과거의 여느 날처럼 본인을 속이고 영화를 보러 간 것으로 안 시어머니는 당신이 보기에 며느리가 가장 애지중지하는 것을 대상으로 폭풍의 분풀이를 했다. 현실과 과거가 종종 실종되고 기억이 분실되어서 찾을 길이 없는 시간을 살고 있음에도 그 일은 잊지 않았다는 것이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롤랑 바르트의 말처럼 사랑의 대상을 하나의 전체로 인지하듯 미움도 하나의 전체를 보고 시작되니까.
“손은 어떠세요?”
나는 처음으로 시어머니 옆에 앉았다. 시어머니가 두 손을 숨겼다. 원예용 가위도 아니고 고기 구울 때 자르는 가위로 만만치 않은 장미 가지들을 잘랐으니 안 봐도 훤했다.
나는 시어머니의 손을 강제로 잡아서 폈다, 역시나 손바닥이며 손가락 여기저기가 가시에 찔리고 찢겨 있었다. 강하게 손을 뺄 줄 알았는데 시어머니의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잘라 내셔도 소용없어요. 내년에 꽃이 더 잘 필걸요.”
시어머니는 알까? 이미 게임은 끝이 나버렸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평생 짠 젓갈을 만지느라 수분이 자빠진 것 같은 시어머니의 손을 보며 생각했다. 아마도 시어머니의 시간은 과거의 어느 곳을 헤매고 있는 것 같다고.
“.......”
시어머니의 손에 난 상처에 약을 바르고 일회용 반창고를 붙이고 있는데 남편이 왔다.
“마당이 왜 저래?”
난장판이 된 마당을 이미 본 남편이 어머니와 나를 보며 묻는다.
“..........”
거실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경을 보고 충분히 알 수 있음에도 묻는 남편이 얄미워 대답하지 않았다. 남편은 더는 묻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마 그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시어머니의 손목에 마지막으로 일회용 밴드를 붙인 후 핸드폰과 라이터를 들고 정원으로 나왔다.
어둠이 내린 초여름 하늘에 별이 떴다. 며칠 전에 비가 와서인지 하늘이 맑고 투명해서 달 옆에 서 있는 별도 푸른빛으로 빛난다.
역시 광채와 황홀로 시작된 사랑의 길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과 다르지 않다. 나는 조용히 쌓아 놓은 장미 가지 더미 위에 불을 붙였다.
“당신 수국도 좋아하잖아. 우리 수국 심을까?”
어느새 나온 남편이 내 뒤에서 말했다.
“그거 당신 버전 아니거든. 그리고 한발 늦으셨어. 그런데 수국의 꽃말이 뭔지나 알고 그런 말 하나?”
“....... 뭔데?”
“말해 주지 않을 거야.”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밤공기 탓에 푸른색으로 보이는 연기가 하늘로 올라간다. 오월부터 한여름까지 아름다웠던 장미를 태운 연기가 하늘에 올라가 별들 사이로 사라지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봤다.
나는 조용히 아주 오래전 두 개의 이어폰을 나눠 끼고 들었던 페이퍼 레이스의 <러브 송>을 흥얼거렸다. 장미 넝쿨을 홀라당 태우고 나서 내가 깨달은 사랑은 그동안 너무 은밀하게 숨어 있어서 알지 못했다.
핸드폰에 카톡의 노란 말풍선이 떴다. 나의 오랜 친구 윤재가 보낸 카톡이었다.
‘마당의 수국이 다 지기도 전에 아내가 떠났다. 오늘.’
순간 내 안의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짐과 동시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낮에 보았던 장미의 잔해가 눈에 어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