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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사랑이라고 말하지 마

by Dear Lesileyuki

대만 영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를 밤새워 봤다.

난소를 잘라내고 잠 못 이루는 밤이 늘수록 영화 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내 몸 안에 고장 난 보일러가 있는 것처럼 냉탕과 온탕이 반복되는 탓에 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다. 한밤중에 잠에서 깨면 할 일은 영화 보는 일뿐이다.

식은땀이 얇은 셔츠를 흠뻑 적셨다. 의사는 모든 것이 폐경으로 인한 것이라고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 누군가 뒤에서 잡는 것처럼 발을 앞으로 내딛기도 힘들었다. 두 시간 간격으로 화장실에 가느라 잠은 늘 부족하지만 잠이 오지 않는 밤은 계속되고 있다. 늘 오줌이 차 있는 것 같은 불쾌함은 수술 후유증으로 오줌을 못 가리는 것보다는 났다고는 하나 긍정의 힘으로 쿨 하게 받아들이기엔 문제가 좀 있다. ‘젠장 헐, 등신 쪽팔린다고 산부인과 안 가다 개고생 한다’라고 중얼거리며 침대에서 힘겹게 일어나 발을 내디뎠지만, 예전에 수술한 무릎이 말썽이다.

시계를 보니 새벽 두 시였다. 어둠 속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갑자기 옆에 입원했던 전직 학장 출신의 노인이 정신이 반짝 났을 때 간병인이 사다 준 자장면과 탕수육을 먹으며 하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내가 남은 게 뭐가 있어. 먹고 싶은 거 맛있게 먹는 거밖에.’

노인은 눈을 반짝거리며 자장면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곤 다시 약에 취해서 긴 낮잠에 빠졌었다.

나에게는? 아쉽지만 담배와 커피는 이제 나와 이별을 고할 시점이니 고려대상은 아니다. 남편과 아이들 셋이 있지만, 온전히 나만의 것은 아니라 제외한다. 먹는 것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그러니 내게 오직 남은 것은 사유할 자유와 쓰는 일뿐이다. 그리고 남의 사랑을 훔쳐볼 수 있는 영화 보기가 오로지 나의 것이다.

식구들이 자는 새벽에 홀로 소파에 길게 누워 영화를 봤다. 소년이 나오고, 소녀가 나오는 그 영화는 약간은 촌스러운 설정이기는 하지만 나도 모르게 감정이입이 됐다. 내가 놓쳐버린 것을 생각하게 하는 여름비 같은 영화였다. 하얀 교복 등 뒤에 찍힌 푸른 볼펜 자국 때문에, 덜 익은 자두 같은 그들의 풋내 나는 사랑 때문에 눈물까지 흘리며 볼 필요는 없는데 나는 주책없이 울었다. 난소를 날리고 자궁을 날리고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렸는데 그냥 쏟아졌다. 울고 싶었는데 마침 시기적절하게 맞아떨어진 걸까? 암에 좋다는 삶은 브로콜리와 당근을 먹으며 울고 있는 내 모습은 그야말로 코미디이다. 게다가 믿었던 딸에게는 연애사기까지 당하고.

다짐했다. 당근을 씹으며, 생긴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평생 먹지도 않던 시퍼런 브로콜리를 먹으며 정신 차리고 이제는 정말 잘 쓰자고. 그동안 내 것이 아닌 일을 하며 너무 놀았다고. 하지만 쓴다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오히려 사랑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더 쉬울 것 같았다.

아침부터 암 수술하느라 지웠던 매니큐어를 다시 발랐다. 그것도 검은색으로 정성스럽게 발랐다. 이번엔 아예 발톱까지 발랐다. 전의를 불태우며 다시 한번 연애소설에 도전하려고. 진한 매니큐어 냄새가 코를 거쳐 뇌까지 스민다. 갑자기 내 마음속에서 오래전에 죽었던 연애 바이러스가 부활해서가 아니라 불황의 쓰나미가 덮친 출판시장을 뻔히 알면서도 선 인세를 주겠다는 허 편집장의 뜻이 갸륵해서 연애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퇴원 후 허 편집장이 전화했었다. 빈궁마마가 되신 걸 축하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위로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위로 아닌 위로 전화를 했다. 그는 여전히 연애소설을 가능한 한 빨리 내자고 졸랐다. 둘 다 망할 수도 있다고 하자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큰소리를 쳤다.

암 수술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자에게, 한방에 자궁과 난소까지 날린 마흔여덟의 여자에게 연애소설을 쓸 로맨틱이 남아 있겠냐고 하자 쓸개 어디쯤 남아 있을 로맨틱을 살려내서라도 쓰자고, 지난번 강남까지 40분에 주파해 줄 때 한 약속을 지키라고 했는데 이제 그 약속을 지켜야 할 때인 듯했다.

반나절을 고민한 끝에 쓰기로 결론을 내렸다. 자궁 핑계 대면서 침대에 누워 있는 것도 한심했다. 온몸이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지만, 그것보다 더 비명을 지르는 건 나의 영혼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하는 거울 속의 내가 나에게 물어온다.

‘도대체 뭐 하니?’

시어머니와 사는 동안 젓갈에 절여져 빠져나가 눈물 한 방울 나지 않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흐른다. 돌려받을 수만 있다면 돌려받고 싶은 게 있다. 순간 나는 결심했다.

허 편집장과 다시 삼청동에서 만나기로 했다. 수술한 지 고작 삼 주 지났는데 운전을 하기 뭐해서 일요일이라 쉬는 남편에게 삼청동에 데려달라고 했다.

“몸도 안 좋은데 집에서 쉬지?”

텔레비전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 남편이건 건성으로 말한다. 그는 역시 마누라보다 애지중지하는 리모컨과 텔레비전, 3인용 소파, 삼 종 세트와 일요일을 만끽하는 중이다.

“일이 있는데.”

“무슨 일?”

“허 편집장이 좀 보자고. 책을 내자고 해서.”

“둘이는 참 환상의 짝꿍이야. 돈도 안 되는 책은 열심히 낸다.”

갈치 왕자처럼 소파에 길게 우아하게 옆으로 누운 남편이 안 해도 될 말을 덧붙여서 염장을 지른다.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지만, 유난히 오늘은 나의 작가적 자존심을 긁는다.

“화났어? 농담인데?”

미안한지 그가 웃으며 날 본다.

“진짜 버리고 싶다."

첫 장편소설 이후로 죽 안 팔리는 책을 내온 나지만 그동안 남편의 농담 같지 않은 농담들을 잘 받아넘겼다. 안 팔리는 책을 써온 것도 사실이니까. 하지만 왠지 오늘은 자존심이 상해서 농담으로 넘기고 싶지 않다.

“......... 같이 가줘? 그럼 내 부탁도 들어줘야 하는데?”

남편이 하나 마나 한 이야기를 한다.

삼청동까지 운전 한번 해주고 치매이신 시어머님을 모시자는 남편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더구나 암 수술까지 하고,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온전히 나만을 위해 살겠다는 굳은(?) 맹세를 한 마당에 말이다.

“당신이 서방님에게 말해. 나는 분명히 말했다. 정 안되면 요양원 쪽으로 결정하자고. 결혼 후 10년간 애 셋 나면서 모시고 산 걸로 나는 끝이야.”

나는 일부러 더 야멸치게 말했다.

“나는 장남인데 너무 한 거 아니냐?”

그가 벌떡 일어나며 항의한다.

“누가 장남이래? 제사 지낼 아들 있는 아들이 장남 아냐? 그래서 어머님 가진 재산 다 서방님에게 몰빵 하신 거고? 그리고 당신 너무 한다, 삼 주 전에 암 수술한 사람이야. 항암치료 안 받고 앞에서 왔다 갔다 하니까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

“제수씨 임신했다는데 애 낳을 때까지 만이라도 모시자? 정 안되면 그때 다시 의논하고.”

남편이 한풀 죽은 목소리로 말한다. 늘 이런 식이다. 마음이 약해서, 대가 세지 못해서 집안에서 큰소리 못 내는 전형적인 소심한 장남이다.

“사람 쓰라고 해. 나, 작업 들어갈 거야. 이제 애들 다 키우고 좀 써보려고 하니까. 이래서 내가 명작을 못 써.”

더 이상 두말하지 않고, 현관 앞에 놓은 운동화를 신고 끈을 야무지게 맸다. 마음속으로 ‘절대로 넘어가지 않으리라 ’를 외치면서. 수술을 통해 내가 얻은 교훈이 있다면 인생은 다수가 행복한 방향으로 흘러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행복한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괜찮겠어?”

“더러워서 내가 택시 탄다. 자궁 하나 날리고 난소 두 개 날린 게 뭔 대수라고. 애 낳고 사흘 만에 책상에 앉아서 원고 쓰고 신문사 칼럼 쓴 년이야.”

“잠깐 기다려 사람이 왜 그렇게 성미가 급해, 데려다준다니까?”

나이 오십을 목전에 두고 축구선수 베컴이 입는다며 사 입은 추리닝 바람으로 자동차 키를 들고 따라 나오는 남편을 뒤로하고 현관을 나섰다. 지금 심정 같아선 남편의 그 노란 추리닝을 발기발기 찢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이에 마당의 덩굴장미는 다져버렸다. 옆에 있던 찔레도 속절없이 내가 없는 사이에 저버린 채 마당에 흩뿌려진 마른 꽃잎으로만 흔적을 남기고 있다. 운이 정말 나빴다면 정말 나 역시 한순간 시들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병원에 입원해 있는 내내 신중해도 너무 신중해서 돌아버릴 것 같던 주치의에게 무안한 감사가 마음 한구석에서 솟는다. 그 때문에 내가 산 건가?라는 생각을 하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의사를 신처럼 믿으라는 선배의 말은 정말 맞는 말이다. 납치범과 납치된 사람 사이에 발생하는 스톡홀름 증후군처럼 이걸 병원 증후군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갑자기 세상의 모든 의사가 위대해 보인다. 매달고 다니던 피 주머니를 제거한 후 상처 난 부위가 아물지 않고 터지자 호치킷 같은 기구를 들고 와서 마취도 안 하고 사정없이 박아버린 씩씩한 의사, 조유미 선생에게도 감사하고 싶어진다.

시간이 약이라고 약간의 위기가 있는 듯했으나 금방 잊고 다시 일상이며 우리 가족과 나의 뒤통수를 쳤던 ‘암’이란 단어는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되어버렸다. 언제 그랬냐는 식이다. 잊어도 너무 쉽게 잊는 게 남편의 습관이라 탓할 것도 없다. 남편이 따라오거나 말거나 마침 골목을 나오는 택시를 잡아탔다. 미련을 길게 가지면 가질수록 나만 손해다.

삼청동까지 냅다 달리니 정확히 이만 오천 원이 나왔다. 택시 안에서 내내 수술한 부위가 결리고, 뻐근했다. 순간 어쩌다 내가 자궁경부암이라는 것까지 걸려서 수술한 이후로 문고리 잡고 혼신의 힘을 다해 대변을 보고, 한 시간 간격으로 소변을 보러 가야 하는지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화가 치민다. 더구나 방광이 내게 신호를 보내고 있고, 그 시점이 바로 택시 안이라 더 미칠 노릇이다.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기사가 백미러로 바라본다. 이유를 말할 수도 없고 점점 차오르는 방광 때문에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택시가 카페 앞에 서자마자 기사에게 돈을 건네고 미친 듯이 문을 밀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터질 것 같은 방광이 사고를 치기 전에 화장실을 찾아야만 했다. 복도의 끝에 있는 화장실을 발견한 순간 붉은 깃발을 보고 돌진하는 황소처럼 전력 질주를 했다. 카페 안의 사람들이 보거나 말거나.

화장실에 뛰어들어 변기에 앉는 순간 터질 것 같지만 또 마음만큼 시원하게 나와 주지 않는 소변 때문에 문고리를 잡고, 내 원활한 배뇨 활동에 조금도 도움을 줄 것 같지는 않은 주기도문을 세 번 외우고 병원에서 간호사가 알려준 ‘아~’ 하는 소리까지 한 덕에 겨우 소변을 봤다. 순간 나도 모르게 입에서 욕이 나왔다.

십 년 전쯤 자궁경부암 검사를 했었다. 검사 결과 후 산부인과 의사가 바이러스에 감염됐다고 했을 때 대수롭지 않게 여긴 미련한 나와, 정기적으로 체크하지 않고 방심한 나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있는 것처럼 말한 남편의 얼굴이 화장실 문짝으로 보여서 주먹을 세게 한 방 날렸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 바람에 변기에는 생리대를 넣지 말라고 문 앞에 붙여놓은 플라스틱 모서리에 긁혀서 손등에서 피가 났다. 너무 화가 나서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있었다. 자궁을 날려버리고 난 후 마취에서 깼을 때도 이렇지 않았는데 미친 듯이 화가 났다. 자궁은 신체 장기 중의 하나가 아니라 그 이상의 존재감이 있는 건데 나는 그걸 날려버렸다.

흐르는 피를 대충 휴지로 닦은 후 화장실에서 나와서 허 편집장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갔다. 그는 야외 테라스에 앉아서 연신 담배를 피워 대고 있었다. 음악과 뒤섞인 채 그의 주변을 맴도는 그리운 담배 연기가 먼저 나의 신경을 건드린다.

“미친 듯이 어디 달려간 거야?”

“화장실.”

나는 그의 맞은편에 어기적거리며 앉았다. 수술 탓에 똑바로 앉는 것이 불편해서 늘 의자에 앉을 때면 건방진 자세가 된다.

“왜? 그거 수술한 사람 오줌도 못 가리고 그런다던데, 당신이 그래?”

“다행히 능력 있으신 의샘 만나서 그런 건 아니거든. 요즘은 거의 구세주의 눈빛으로 의사 샘 본다.”

“그래? 그럼 다행이네. 난 당신 모냥 빠지게 오줌싸개 되는 줄 알고 걱정했다. 인터넷 보니까 부작용이 있드라고. 암튼 의사선생 잘 만나서 불행 중 다행이지 뭐. 앞으론 죽 좋은 일만 있기?”

“허 편집장님?”

“왜 그러십니까, 이 작가님?”

“나보고 연애 소설 쓰라며 자꾸 오줌똥 이런 말만 할래? 아무리 같은 학번이라지만 못 참는다.”

삶의 질이 원활한 배변과 배뇨에 있다는 걸 실감하는 요즘의 나는 허 편집장의 실없는 농담을 받아줄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아, 그건 내 실수.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그나저나 당신의 영혼의 비타민, 담배 없이 글 쓸 수 있어?”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선 인세 입금 되는 순간 나의 낭만바이러스가 부활할 거야. 현재 처한 나의 상황과는 별개로.”

“이야, 증말 변했다. 혜성처럼 나타난 감수성 덩어리라고, 한국판 프랑스수와즈 사강이라고 난리들을 쳤는데, 이제는 돈 안 넣어주면 글 안 쓴다는 황금만능주의 작가로 변신을 하셨네?”

열렬히 연애하고 첫사랑과 결혼을 한 이십 대 초반의 나는 그런 작가였을 게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고 세상 모든 것이 저마다 아름다운 운율을 가지고 노래한다고 생각했던 그때가 언제인지 이젠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당신 첫 소설, 연애에 대한 환상, 사랑에 대한 낭만적 고찰하면서 썼던 소설 같은 걸로 다시 한번 해보자 나는 낭만적 첫사랑이 세상 풍파에 시달려서 장렬히 전사하는 꼴은 죽어도 못 본다.”

말하기도 바쁜 그의 입이 아메리카노와 담배 사이를 오가다가 긴 한숨을 쉰 후 비장하게 말한다.

“그거 다 뻥인데.”

나는 수술 이후로 유난히 쳐지는 몸을 가누며 어눌하게 말했다. 가끔은 내가 분명 걷고 있는데 지상에서 10센티쯤 떠서 걷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 당신 첫 소설 때문에 사랑에, 연애에 대한 환상을 갖게 된 여성들의 측면에서 볼 때 그건 배반이고, 사기야.”

“그러니까 그 후에 그 사랑이 어떻게 변질했는지를 보라구. 내가 답이라니까. <러브스토리> 밤새워서 보고, 토요일 오후에 <타임 인 어 버틀> 보며 질질 짜고 <라스트콘서트>의 스텔라를 너무 좋아하면 나처럼 된다니까. 한눈에 뻑이 가는 사랑, 한 방에 훅 가는 수가 있어요. ”

“미치겠다. 누가 대체 누가 감수성 방울 방울이라던 당신을 다 탄 구공탄처럼 만들어 버렸냐? 정말 묻고 싶다. 이래서 여자 작가들은 결혼을 안 하는 게 좋다니까. 된장국 끓이다가 돌아서서 써지는 게 아니거든. 글이라는 게."

“나도 묻고 싶어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 하지만 안드로메다로 날아간 연애적 감수성은 입금되는 선 인세와 함께 돌아올 거니까 걱정하지 마. 맹세해.”

나는 그에게 두 손을 들어 맹세하는 시늉을 했다.

“오호라 과연 그럴까? 나는 당신이 애를 냅다 날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 했어. 그런데 셋씩이나 났잖아?”

허 편집장이 왠지 미심쩍은 얼굴로 나를 보며 묻는다.

“내 손을 봐”

나는 그에게 검은 매니큐어가 발라진 손가락을 내밀었다.

“이 의미는?”

“죽기 살기로 쓰겠다는 이야기지. 뒤라스의 <연인>에 버금가는 스토리로 갈 생각이야. 내 안의 연애 바이러스는 죽었지만, 나의 상상력은 아직 쓸 만해. 오래전에 나의 조모가 그러셨지. 여자는 죽기 전까지도 사랑이라고. 그러니 죽어버린 내 필이 확 올 수도 있어.”

“예수님 재림을 기다리는 나을 것 같은데? 내가 생각하기에 당신의 상상력을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린 일등 공신은 남편이다. 아니, 애초부터 감수성 결정체인 당신이랑 가계부 쓰는 남자랑은 조합이 안 됐어.”

“그래서 쓰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써! 그 대신 집을 나와라. 남편이랑 붙어 있는 한 당신 로맨틱은 부활은커녕 저 몇십 광년으로 가버릴 테니. 더구나 자궁까지 날린 마당에….”

“누가 그래? 여자의 자궁이 날아가면 로맨틱도 훅 간다고? 연애적 감수성은 자궁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거라고 이 사람. 그리고 듣자 하니 허편이랑 나랑 20년을 안 사이지만, 너무한 거 아냐? 말끝마다 자궁 타령하는 거. 그래, 나 자궁 없는 년이야. 그렇지만 내가 연애 소설과 자궁은 일말의 관계도 없다는 걸 이참에 반드시 보여 줄 거야. 신체 장기 다 있으신 분, 사과해 당장.”

갑자기 열이 후끈 오르면서 갱년기도 거치지 않고 강제 폐경 된 여성의 신경질이 나도 모르게 나온다. 여성호르몬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유를 알겠다. 이미 폐경은 됐고 서서히 골다공증과 관절염이 찾아올 거라는 생각이 들자 얼굴에 더 열이 확 오른다. 뼈에 구멍이 숭숭 나기 전에 내 영혼에 구멍이 숭숭 날 것 같아서 절망이다.

신체 장기 다 있는 분이란 말에 한 번 터지면 걷잡을 수 없는 허 편집장의 웃음보가 터졌다. 나는 멍하니 웃음 때문에 넘어가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쏘리. 하지만 이건 알아줘. 당신의 작가로서 이력을 그 누구보다 걱정하고 아끼는 사람은 바로 나라는 거. 당신 그거 모르면 정말 나 화난다. 대부분 삼 땡인 책을 끈질기게 낸 사람이 누군지는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으니.”

물론 잘 안다. 그것도 너무나도 잘. 남편 말처럼 첫 작품 이후 돈도 안 되는 책만 줄기차게 내준 사람도 허 편이고, 여자 뺨치는 수다로 그런 나를 어르고 달래면서 지금까지 작가로서의 존재감을 만들어 준 것도 그라는 것을.

“알지. 심정적으로 내가 요즘 그래. 두 시간 간격으로 화장실 가고, 아침에 세 번 저녁에 세 번, 먹는 족족 가봐 사람이 미친다. 할머니들도 있는 자궁이랑 난소가 없잖아. 생각해 보면 별거 아닐 수도 있는데 아직은 좀 열받아.”

나는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자궁탈락과 함께 비염이 왔는지 요즘은 심심하면 콧물이 흐른다. 어쩌면 나의 내적 자아가 콧물을 빙자해서 서글픔을 짜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편 앞에서도 안 그랬는데 갑자기 울컥하려고 했다. 가슴에 먼짓덩어리가 한 뭉치 있는 것처럼 미어지더니 한숨이 나온다.

“그래도 똥싸개 오줌싸개는 면했고, 아무렇지도 않게 존재하잖아. 점쟁이가 그랬다며, 책이나 끼고 살라고. 억지로 참지 말고 한 대 피워 오늘만.”

그가 측은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담배를 건넸다.

나는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그가 건넨 담배를 피웠다. 정말 그리운 맛이다.

“맥주 한잔 마시면 안 될까?”

“안될걸. 수술한 지 한 달도 안 지났잖아.”

“카프리 한 잔만?”

“주치의 선생이 뭐래?”

“당연히 안 되겠다고 그러겠지. 그러나.…….”

그동안 내 눈앞을 국적별 종류별로 왔다 갔다 하던 맥주들의 환영이 한순간 나타났다 사라진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결국 나는 카프리 한 병을 시켜서 단숨에 마셨다.

“가고 싶다 타오르미나….”

한 병을 말끔히 비운 나는 카프리 맥주병을 흔들며 말했다.

시칠리아 언저리에 타오르미나가 있다. 분홍빛 종이로 오려 붙인 것 같은 부겐빌레아가 언덕을 따라 피어 있고, 내가 다 말려버린 낭만이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실려 온 지중해의 공기로 인해 다시 습기를 머금고 부풀어 오르게 해 줄 것 같은 것 타오르미나.

괴테가 그토록 찬양했고, D. H 로렌스가 <Lost Girl>을 쓴 타오르미나에 가면 이 인실에 입원했을 때 노인이 알려준 그 성벽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슨 귀신 쉰 나락 까먹는 소리야. 타오르미나가 어딘데?”

“그런 곳이 있어.”

나는 카프리 한 병을 더 주문했다.

“...... 이 작가 한 병만 마셔라. 사 개월 동안 조심하라며.”

허편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더니, 맥주병을 치운다.

“맥주가 아니라 성생활.”

“이 씨, 나를 아주 남자로 안 보는구먼. 거기에 음주, 흡연 다 포함된 거지! 장수해야 할 거 아냐”

“솔직히 다리 수술하고, 암 수술 연달아서 하니까 자신감 급 상실이야. 육십까지는 살아야 하는데. 막내 시집은 보내야 하거든.”

“전화위복이란 말도 몰라? 그리고 그런, 말하는 인간들이 벽에 그림 그릴 때까지 살아. 우리 모친, 나 사십 넘어서 낳고, 결혼하는 거 보고 죽는 게 소원이라고 하시더니 팔십 넘어서까지 생존하시면서, 아들 결혼 세 번 하는 거 원 없이 보시잖아.”

허 편집장의 말처럼 전화위복이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애초부터 문학사를 뒤집을 만한 글을 쓰겠다는 야심 같은 건 없고, 오로지 생활밀착형 작가로 살아온 나를 인정하고 변함없이 밀고 있는 허 편집장을 위해서, 그리고 막 폐경의 증후군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나를 위해서 다시 한번 처음처럼 써보기로 했다. 그것이 연애든, 사랑이든 아니면 허 편집장이 말하는 ‘엄밀히 말하면’ 그것도 사랑이라는 불륜이든 말이다. 아니면 나중에 남편이 목덜미를 짚고 넘어갈 가을의 사랑이든.

그러나 생각만큼 연애 소설 쓰는 게 쉽지 않다. 가을의 사랑은 한시적인 봄날을 맞아 한창 꽃을 피우는 중인지 남들은 죽을 시간도 없다는 레지던트인데도 화색이 돌지만, 나의 ‘연애 소설 창조’는 생각만큼 안 돼서 죽을 맛이다. 가을의 머릿속에 들어가서 딸의 사랑을 도둑질해서 그대로 베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도 표절인데.

도무지 책상에 앉아서 글을 쓸 수 없었다. 원고 쓰느라 한 시간 내리 책상에 앉아 있다가 겨우 기어서 내려왔다. 관절이란 관절은 다 아프고, 손가락은 부어서 제대로 굽혀지지 않았다. 수술한 무릎, 허벅지, 골반 삼 종 세트로 아프다. 그 덕에 두 시간을 엎드려 있었다. 마음을 잡았더니 이젠 몸이 안 따라준다.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한자리에 앉아서 써 대던 시절이 갔음을 실감했다.

아일랜드 식탁 앞에 서서 쓰는 것이 그나마 제일 편해서 30분씩 쪼개서 쓰고 있다. 무릎이 아파서 그것도 힘이 들면 안락의자에 앉아서 노트북을 무릎 위에 놓고 쓴다. 가끔 뭐 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나는, 생각한다. 내게 딸기를 줘서 고맙다고 말한 노인의 눈빛을. 노인과 함께 마시던 커피와 클럽 샌드위치를. 노인에게는 마지막 조찬이었고, 내게 시작의 조찬이었던 그 시간을. 노인에 내게 물었다.

“오길비를 아나?”

대답을 기다리는 노인이 고즈넉한 눈빛으로 나를 봤다.

“광고사에 길이 남을 카피라이터죠, 저야 전직 카피라이터니까 알지만 어떻게 그분을?”

“내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광고학을 좀 배웠지. 나는 대학에서 언론학을 강의 했다우. 어째 당신과 내가 통할 것 같더니. 음, 이 샐러드를 내가 몇 번을 더 먹을 수 있을까?”

노인이 샐러드를 먹으며 말했다.

생각 같아서는 백 번은 더 먹을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노인의 상태를 바로 옆에서 보고 있기에 할 수가 없었다. 거짓말이라는 것을 서로가 아니까. 한 달에 한 번씩 입원해서 항암치료를 받는 노인은 한눈에 보기에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노인은 이제 암 따위는 관심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미학과 광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광고에서 가장 중요한 건 상품이다’라고 했지. 표현기법 따위는 무시해야 하고 상품을 팔지 못하면 나쁜 광고라고 했지?”

“잘 아시네요.”

너무 놀라 모처럼 만에 활짝 웃으며 노인을 봤다.

낮에 늘 침대에 기대어 늙고 지친 하마처럼 잠만 자는 노인의 모습을 보며 아무리 과거에 학장이었더라도 늙고 병들면 과거의 지성 따위는 얼마나 소용없는지를 매 순간 확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빨간 스카프를 두른 간병인의 은근한 조롱과 무시를 참아내고, 본인이 마약성 진통제를 먹었는지 기억해내지 못해서 간병인에게 핀잔을 들을 때는 옆에 있는 내가 지적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 미학과 광고처럼 사랑과 결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내가 너무 냉정하게 말했나?”

노인이 희미하게 웃으며 네게 말했다.

“살아보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당신도 행복을 결혼에서 찾는 사람은 아니야…. 음.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이라고 봐. 어떤 사랑으로 시작했는지 동기는 중요하지 않아. 사랑해서 결혼했는데도 행복하지 않다면 그건 나쁜 사랑 때문이지, 결혼 때문은 아냐.”

“행복하셨어요?”

“애들 때문에 행복했지. 남편은…. 외출이 잦은 사람이었거든.”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전에 노인이 한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노인 역시 나를 보며 웃더니 왜 웃느냐고 묻는다.

“고수이신 거 같아서요.”

“어디가?”

“그냥. 간병인에게 하시는 것도 그렇고.”

“그 아줌마가 지금의 내겐 제일 필요한 사람이거든. 그리고 아줌마도 스트레스받을 텐데 나를 보면서 자기 위로도 좀 해야지. 작가지?”

“네. 이주영입니다.”

“나는 문영숙.”

“네.”

갑자기 노인에게서 나에게로 지금까지는 느껴보지 못했던 훈훈한 교감이 전해진 듯했다. 동일한 주파수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이해와 감동 같은 것이 분명했다.

사실 처음엔 늙고 병든 노인을 보는 것이 불편했었다. 노인의 앓는 소리 때문에 방을 바꿔 달라고 할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노인은 천천히 커피를 마신 후 옆 테이블에 놓고 티슈로 입을 닦는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으로 먹은 사람의 표정이다.

“음 다음엔 자장면을 먹어요. 그게 먹고 싶네. 지하 식당가에 있는 중식당 가원의 자장면이 맛있어. 테이크아웃도 되는 데 아줌마가….”

노인은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앉은 채로 잠이 스르르 들었다.

나는 ‘배달’이 아닌 ‘테이크아웃’ 이란 단어를 사용한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혹시 노인이 꿈속에서 자장면을 먹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을 했다. 부디 노인의 휴식이 달콤하길, 꿈속의 그곳에서는 고통이 없기를.

“아이쿠 이 사모님 또 앉아서 자네. 낮엔 자고 밤엔 나를 그냥 볶아대.”

밥을 먹고 들어온 빨간 스카프의 간병인이 신났다는 듯이 나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한 채 돌아누웠다. 이미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걸 알고 있고, 그런 눈빛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인과는 결국 자장면을 먹지 못했다. 다음날 퇴원하라는 주치의의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치의는 앞으로 별도의 치료가 없고 조직검사 결과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고 입원한 이래 최고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물론 그전에 터진 수술 부위의 살을 스테이플러 비슷한 걸로 인정사정없이 생살을 찝던 조유미 선생이 알려주긴 해서 전처럼 ‘믿습니다’ 하는 얼굴로 주치의 선생을 바라보지는 않았지만 담담하게 주치의 선생의 말을 오랜만에 불안감 없이 들었다. 그리고 의사 선생에게 감사의 의미로 무한 신뢰의 미소를 날렸다.

퇴원을 준비하던 날 노인은 아침부터 통증클리닉에 갔다. 밤새 통증 때문에 잠을 못 이룬 탓에 그렇게 됐다. 퇴원 준비를 마친 나는 노인이 좋아한다는 초콜릿 한 상자를 빈 침대에 놓고 한동안 서 있었다.

“뭐 해, 퇴원 안과?”

이미 퇴원 준비를 다 끝낸 동생이 재촉했다.

“얼마나 더 사실까?”

“누구?”

“이 침대의 주인 할머니.”

“노인들의 암세포는 진행이 더디다지만 그분은 좀 힘드시겠던데.”

어쩌면 동생의 말처럼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노인의 남아 있을 시간에게, 인생에게 부탁하고 싶었다. 가능하면 먹고 싶은 거 다 먹을 때까지 천천히 기다려 달라고.

퇴원 이후로 노인이 어떻게 됐는지 알지 못한다. 병원에 전화를 걸어보면 알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냥 드시고 싶은 거 다 먹으면서 졸고 있을 거라고만 생각하고 싶었다.

남편은 나의 퇴원과 동시에 내가 암에 걸렸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은 듯이 행동했다. 담배는 피울 수 없고, 술은 와인 한잔이나 캔 맥주 한잔 정도다. 완벽한 금욕생활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술, 담배 금지는 나에게 유쾌한 일은 아니다. 사 개월 동안 섹스 금지야, 뭐 아무래도 좋지만, 슈퍼에서 나는 홀리는 다양한 국가의 맥주들은 나를 처량하게 한다. 세상에 태어나서 맥주병이 그렇게 아름다운 줄 처음 알았다. 신제품 산사춘도 그렇고, 사케는 또 얼마나 내 속을 울렁거리게 하는지 죽을 맛이다.

늘 눈을 감고 상상한다. 적어도 사 개월 후에는 발리로 가서 아락발리를 피스타치오 아몬드 아이스크림과 함께 먹고 싱가포르에 가면 클락키에서 별빛을 조명으로 삼아 맥주를 마시리라. 또 겨울엔 <설국>의 배경이 된 유자와를 가면 내리는 눈을 안주 삼아 사케 한 잔을 마시리라.

그러나 그런 상상은 임시방편이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는 것이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울 줄은 몰랐다. 밤새 어디 가서 얻어터지고 온 사람처럼 여기저기 아프다. 난소를 제거한 후 나타나는 폐경 증상이다. 두 시간 간격으로 화장실을 가는 것도 고역이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이 힘들어서 죽을 맛이다. 책상에 앉아 있는 것은 더 했다. 허리도 아프고, 등까지 아파서 벽을 짚고 화장실을 갈 정도다. 그러나 집안 누구도 나의 이런 고충을 알지 못한다. 겨울과 봄은 아무 일 없이 학교에 다니고, 남편은 진시황 프로젝트를 실천하고, 하루에 세 번 단백질 가루를 물에 타 먹는다. 그리고 가을은 과거의 내가 그랬듯이 몰빵식 연애를 한다.

침대에서 발을 내딛기가 힘들었다. 림프를 제거한 후 문제가 생길까 봐 수술 이후 한동안 신어야 한다는 압박스타킹 덕에 무릎은 완전 나무토막 같다. 바로 옆의 침대에서 코를 골며 자는 남편의 얼굴을 보니 부아가 치밀었다. 장롱문을 열려고 했지만 밤새 굳어버린 손가락이 굽혀지질 않아 열 수가 없었다. 또 부아가 치민다. 이 모든 것이 의사 말처럼 지독한 폐경증후군에 시달리는 탓이다.

겨우 문을 열고, 장롱 안에 있던 이불과 베개들을 꺼내서 자는 남편 위에 죄다 쌓아 놓았다. 정신없이 쌓아 놓고 보니 베개와 이불 사이에 파묻혀서 압사 직전의 몰골이다.

있는 힘을 다해 방문을 닫고 나왔다. 아파트였다면 단번에 항의가 들어왔을 만큼 요란한 소리였다. 하지만 그보다 큰 소리가 뒤를 이어졌다. 놀란 남편이 지르는 비명이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작업실로 들어갔다. 이런 상황이라면 연애 소설은커녕 미저리에 버금가는 공포소설이 나올 판이다.

한 시간째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건만 단 한 줄도 쓰지 못했다. 재발 안 하고 오래 살아보겠다고 담배 끊고, 맥주 끊은 탓인가 보다. 매일 먹는 비타민C와 D, 칼슘제, 브로콜리와 토마토들은 나의 상상력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날이 상상력은 고비사막처럼 말라가고 있다. 첫사랑에 실패한 여자처럼 넋 놓고 울고 싶다.

소설이 이렇게 절절하게 다가온 적이 나에게 있었던가? 나는 무언가를 만회하려는 사람처럼 억지로라도 쓰려고 하는데 나의 상상력은 그동안 불의의 사고를 당했는지 떠오르려고 하지 않는다. 제거한 건 난소와 자궁 그리고 림프인데 수술할 때 상상력도 제거당한 것처럼 머릿속이 하얗다.

날은 밝아 오고 있는데, 한번 비워진 상상력은 채워지지 않고 있다. 허 편집장에게 없던 일로 하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알량한 나의 작가적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아침 안 줘?”

출근 준비를 이미 끝낸 남편이 작업실 문을 열더니 묻는다. 밤새 숙면을 취한 남편의 얼굴은 반짝반짝 윤이 난다.

"냉장고 열어봐. “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뭐 하는데?”

평소엔 겨우 고개만 들이밀던 남편이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책상 옆에 서서 묻는다.

“...... 소설.”

“몸이 좀 나아지면 쓰지?”

그의 걱정에서 도무지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 몸 나아질 때까지 아침 정도는 본인이 차려 먹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이제 난 밥상 안 차려. 당신이 그렇게 좋아하는 샐러드는 주문해서 매일 아침 배달될 거고, 빵 정도는 당신이 구워.”

“왜 그래? 새벽엔 유치하게 이불과 베개를 얼굴에다 쌓아 놓아서 사람 혼비백산하게 만들지를 않나. 당신 그거 살인 미수야.”

“미수는 무슨. 암튼 나는 밥상 안 차려. 딸년 밥상도 안 차리고, 내 밥상만 차릴 거야.”

“폐경기 증후군이야 이거? 언제까지 참아줘야 하는 건데? 수술은 깨끗이 됐고, 정상적으로 모든 것을 해도 좋다며?”

남편이 옆에 놓인 스툴을 끌어다 앉으며 억울하다는 듯이 말한다.

“참지 마. 그냥, 당신도 오십이 됐으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해. 어머님 모시고 싶으면 회사 그만두고 모셔. 나는 보시다시피 나 하나 건사하기도 힘드니까.”

“너무 예민해진 거 아냐?”

“도대체 해놓은 게 없어, 나는. 남들은 글 써서 상 받을 때 애 셋 낳느라고 에너지 다 쓰고, 내 안이 매미 허물처럼 비워져 가는 것도 모르고. 상도 받지 못하는 타인을 위한 삶을 맥없이 살다가 암이나 걸리고. 더 이상 나의 횡격막이 울리지 않는 시절이 온 걸 당신은 알아? 그러니 내가 밥을 하고 싶겠냐고?”

가만히 듣고 있던 남편이 말없이 작업실에서 나갔다.

그에게로 향하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암 수술은 오히려 간단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시댁의 전화도 일절 받지 않았다. 심지어 친정엄마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받지도 않고 전화도 하지 않을 사람들의 리스트를 작성해서 컴퓨터 옆에 붙여놓았다. 그 빌어먹을 관계들을 정리하기로 한 것이다.

남편은 출근했고, 식탁에는 그가 마시다 남긴 커피와 빵부스러기가 놓인 접시와 샐러드 접시가 쌓여 있었다. 샌드위치를 만들고, 단호박 수프를 만들어서 예쁜 접시와 수프 볼에 담고 적어도 세 가지의 과일을 갈아서 만든 주스를 제공하던 과거의 나는 이제 없다.

“엄마 아침은?”

겨울이 졸린 눈을 비비며 식탁에 앉아 있다가 나를 보자마자 ‘밥’ 소리를 한다. 봄은 아예 식탁에 엎드려 있다. 왜 이 집식구들은 나만 보면 ‘밥’ 소리부터 하는 걸까? 겨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머릿속에 갑자기 크레바스 하나가 생기는 느낌이다.

“밥 안 주냐고?”

겨울이 하품까지 하며 묻는다.

“왜 그걸 나한테 물어? 니들이 해 먹어!”

봄이랑 겨울이 목청껏 소리를 지르는 나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모처럼 만에 집에 와서 늦잠을 자던 가을도 놀라서 이 층 방에서 뛰어 내려왔다.

“엄마?”

“왜? 뭐? 어쩌라고?”

나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하루 녹차’ CF에서 그랬다. ‘괜찮아. 잘 될 거야, 너에겐 눈부신 미래가 있어, 널 믿어 의심치 않아’ 그러나 괜찮지 않은 건 역시 계속 괜찮지 않다. 나의 비명 아닌 비명에 놀란 딸들을 두고 노트북을 챙겨서 집을 나왔다. 도대체가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편의점을 지나려는데 문이 열리며 햇살 같은 청년, 유진이 cf의 한 장면처럼 문을 열고 뛰어나온다.

“이모, 무사 귀환 축하드려요!”

“고마워.”

“어디 가세요?”

“도서관 가는데.”

“바쁘지 않으시면 스타벅스 커피 한 병 하실래요?”

유진이 환하게 웃으며 묻는다.

도서관으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 순수 청년, 유진을 따라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유진은 정말 스타벅스에서 만든 커피 두 병을 들고 왔다. 손님이 없는 시간이라 유진과 나는 컵라면을 먹는 손님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창가의 테이블 앞에 서서 커피를 마셨다. 달달한 캐러멜 맛이 강한 커피가 제법 맛있다. 당이 들어가선 그런지 겨우 분노 조절이 된다.

“유진아?”

“네?”

아직도 솜털이 보송보송한 유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나를 본다.

“인생은 쿠폰 같은 거야. 공짜 같아서 정신없이 쓰다 보면 없어져. 그러니까 복학해라. 엄마 걱정하신다.”

나는 이른 아침이라 한적한 골목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골목을 돌아가면 세 딸이 있는 우리 집, 아니 내 집이 있다.

“다음 학기에 복학할 거예요, 이모.”

“잘 생각했네.”

“이모?”

“왜?”

“....... 저기.”

유진이 눈치를 보며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한다.

“봄이랑 사귄다고?”

“으엑, 봄이 벌써 말했어요?”

“편의점 사장님이 알려주던데.”

당황해하는 유진의 얼굴이 귀엽다.

“정말요?”

역시 유진은 순진하다. 넘겨짚을 때마다 훌러덩 잘도 넘어온다. 재채기하듯 웃음이 터졌다. 내가 계속 깔깔거리며 웃자 유진은 점점 더 어쩔 줄 몰라한다. 나는 눈물이 나올 만큼 웃고, 유진이 건네준 티슈로 눈물을 닦았다.

“유진아, 아마추어가 하는 연애는 숨길 수가 없어. 냄새가 나거든.”

“아, 그렇구나. 지금은 오빠 동생이지만 대신 봄이 대학 가면 정식으로 사귈게요.”

“믿을 수가 없는데.”

“아뇨. 믿으셔야 만 해요. 맹세해요.”

“믿을게. 먼저 말해줘서 고마워.”

“네, 감사합니다.”

유진이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모른다. 뭐가 그리 좋은지 커피 한 모금 웃음 한 모금이다. 거기에 사랑한 모금 추가다.

아쉽지만 이제는 정말 내가 딸들의 사랑을 지켜봐야 하는 나이가 됐다. 일흔이 넘었음에도 돌싱 아들의 손주 키우느라 젊은 엄마들과 학원 순례하고 녹색어머니회 가입해서 맹렬히 활동 중인 영원한 현역 친정엄마가 아시면 뭐라고 할지 궁금하다. 박장대소하며 손뼉을 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하늘은 맑은데 갑자기 후두득 소리가 나더니 비가 내린다. 여우비다. 유진은 신기한지 편의점 문을 열고 뛰어나간다. 햇살이 가득한 거리에서 비를 맞으며 서 있는 유진이 미루나무처럼 싱그럽다. 한참 청춘과 광합성 중인 그의 모습이 부러워서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연애 소설을 쓰기에 나의 작가적 내면이 너무 구닥다리가 되어버린 듯하다.

장마 끝이라서인지 장미들 꼴이 말이 아니다. 식물도 제 주인의 상태를 먼저 안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며칠째 벼르다 손을 보기로 했다. 남편은 영 식물 키우는 데 관심이 없고, 사다리 가지고 올라가라면 올라가는 내내 잔소리를 해댈 것이 분명하기에 직접 하기로 했다. 이러니 집식구들이 모두 내가 이젠 아무 걱정 안 해도 되는 암 수술 전의 엄마이며 아내로 되돌아간 줄 안다. 사다리에 올라가 대문의 덩굴장미를 손질하는데 가을이 다가와서 티켓을 건넨다.

“뭐야?”

“지호 공연 티켓이야. 엄마 와서 보라고.”

“...... 아빠랑 같이?”

“아니 엄마만 와. 아빠는 좀 시간을 두고. 아직 아빠한테 말하지 마.”

“조만간 네 아빠 뒤로 넘어갈 일만 남았네.”

나는 정원용 가위로 인정사정없이 시든 가지를 잘라냈다.

“미안해.”

“뭐가?”

“엄마가 마음에 안 드는 사랑 해서.”

할 말이 없어진다. 아주 오래전 나는 친정엄마에게 사랑은 내 자유라고 부르짖으며 단식을 하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나에 비하면 가을인 양반인 셈이다.

“결혼하기 전에 애부터 갖지 마라. 외할머니 모전여전이라고 비웃을 게 분명하니까. 아마 그러면 밤새도록 잠 안 자고 고소해서 웃으실 양반이다.”

“엄마, 그랬어?”

“안 그랬으면 내가 왜 나이 스물에 결혼을 했겠냐?”

“대박이다 엄마.”

가을이 신기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트린다.

“비웃는 거냐?”

“아니. 엄마에게도 그런 열정이 있었다는 게 놀라워서.”

물론 열정이 있었다. 지금은 그 열정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서 찾을 수 없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인생에서 장미의 계절은 짧다. 이어지는 가지치기의 계절이 너무 길어서 사람들은 종종 장미의 아름다움을 위해들인 지루한 시간을 망각한다. 장미는 그냥 키워지는 것이 아니다. 손에 가시가 찔리고, 입이 병들어서 하얗게 말라갈 때도 포기하지 않고 지켜야 다음 해에 보답처럼 그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그러나 사람은, 자식은 좀 다른 것 같다.

장미 가지들이 정원용 가위에 의해 사정없이 잘려 나갈 때마다 쾌감이 느껴진다. 딸 앞에서 장미 가지를 자르는 기분이 이렇게 좋을 줄은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엄마, 사랑도 가지치기가 필요해. 엄마가 키우는 장미만 가지치기가 필요한 게 아니야.”

팔짱을 낀 채 서서 사다리 위의 나를 올려다보고 있던 가을이 한마디 한다. 역시 가을은 예리하다.

“아빠가 할머니를 집에 모시고 오고 싶어 하는 걸 엄마가 좀 이해해. 물론 수술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사람을 쓰면 그 부분이 해결되지 않을까?”

“너나 잘하세요. 말은 쉽지. 그다음은 어떻게 할래, 네가 할래? 또 내가 해야 하는 거 아냐?”

“..........”

가을이 할 말이 없는지 말이 없다.

가을의 말이 맞는다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선뜻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말없이 장미 가지만 쳤다. 동서가 셋째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전했지만 내 마음은 절대불변이다.

십분 이상 같은 자세로 앉아 있으면 일어날 때 굳어버린 관절 때문에 어기적거리고, 모든 관절이 비명을 지르는 나날이 계속되는 시점에 시어머니와 같은 공간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다. 결혼생활을 신앙생활로 유지한다는 친구 진애는 남편과 시댁에서 전도를 안 하는 이유가 천국에 가서는 절대 시댁 식구들도, 남편도 만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농담처럼 말한다.

아들에 오매불망하며, 들에 잡초도 제 씨앗을 남기는데, 당신의 아들은 아들이 없어서 제삿밥도 못 얻어먹으니 불쌍해서 어찌하느냐고 볼 때마다 끌탕을 하셨던 시어머니와 눈뜰 때마다 보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남편과 단둘이 저녁 식탁에 앉았다. 반찬가게에서 사 온 반찬으로 한 상 가득 차려내자 남편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나를 위한 저녁은 특별히 암의 재발을 막아 준다는 식단이라며 동생이 알려준 레시피로 만들었다. 모두 삼거나 구우면 되는 간단한 것들이다. 거의 대부분이 식물성인 나의 밥상과 남편의 저녁을 보니 한숨이 나온다.

“애들은?”

남편의 풍성한 저녁상 앞에서 흐뭇한지 이층을 올려다보며 묻는다.

“봄은 독서실, 가을과 겨울은 저녁 약속 있데.”

“........ 그렇구나. 애들 시집 다보내면 우리도 작은 아파트로 이사 가야겠어.”

“.........”

대답하고 싶지 않다. 그가 말한 의도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아주 썰렁하네.”

반찬가게에서 사 온 된장국을 후루룩 마시며 또 한마디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말없이 삶은 브로콜리를 된장에 찍어서 먹었다. 정말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한의사인 남편 친구의 말대로 내가 맛있는 고기 놔두고 세렝게티 초원을 누비는 초식동물도 아니고 암 재발을 막기 위해 적어도 오 년은 초식동물 흉내를 내야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동생이 메일 보내주는 식단대로 먹다가는 절로 가서 득도할 판이다. 조만간 공중부양도 할지 모른다.

“소설은, 잘 돼?”

남편이 나의 눈치를 살피며 묻는다.

“잘 안 돼”

“왜?”

“매일 풀떼기만 먹는데 무슨 글이 나와.”

소설 안 풀려서 우울하고, 동생이 추천하는 암 재발을 방지하는 체질 개선 식단도 우울하고, 치매 걸리신 시어머니도 나를 우울하게 하고, 연애사기를 친 가을까지 온 세상이 도무지 협조해주지 않는다.

치매 걸린 시어머니를 요양원으로 모실지언정 같은 집에서는 안 살겠다는 나의 굳건한 의지를 지켜서 천하의 나쁜 며느리로 살기로 작정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시어머니의 친척들, 시댁 식구들을 무시하고, 암 수술을 했다는 그럴싸한 이유로 밀고 나가야 할지, 아니면 매일 밥상에서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앉아 있는 남편과 적절한 타협을 해야 할지 매일 시험에 든다.

소설도 그렇다. 굿 발이 다 된 무당처럼 계속 헛지랄을 하는 것은 아닌지 하루에도 열두 번은 후회가 된다. 연애 소설을 쓰기에는 너무나도 척박한 나의 환경을 탓해야 할지 아니면 나의 갱년기와 폐경증후군을 탓해야 할지, 그도 아니면 이미 증발해서 연애 화학작용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는 감성을 탓해야 할지 모르겠다.

남편이 말없이 밥만 먹더니 사라진다. 그 좋아하는 커피도, 포도주도 하지 않은 채. 나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브로콜리, 파프리카, 당근을 씹어 먹었다. 역시 몸에 좋은 것은 죄다 맛이 없다. 인생도 도덕과 도리가 심하게 끼어들면 재미가 없듯이.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인생을 합리적으로 살고 싶다. 누가 무어라고 하든 간에 말이다. 언제부터 감수성에 사는 여주인공 같던 내가 합리를 부르짖고 살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젓갈 장사로 소규모의 부를 이룬 시어머니와 함께 살면서부터다. 나의 감수성은 젓갈 냄새에 버무려지고, 현실에 버무려지고, 나중엔 나의 로맨틱이 젓갈과 삼투압 현상을 일으키면서 그나마 있던 것도 고갈되어 버린 것이다.

초콜릿과 사탕을 한 움큼 움켜쥐고 정성스럽게 내린 에스프레소 한잔을 든 채 주방 옆 작업실로 들어왔다. 노트북을 켜고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골랐다. 클래식으로 할지 아니면 올드팝으로 할지 고민하다가 유키 구라모토의 피아노곡으로 정했다. 이미 주변은 Lake Louise의 바람이 분다. 서서히 충전되기를 기다리다가 글발이 머리부터 가슴으로 내려올 때까지 사탕과 초콜릿을 번갈아 먹었다. 에스프레소와 입안에서 뒤섞이는 초콜릿 맛이 일품이다.

다크초콜릿 탓인지 순간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이 보고 싶었다. 12시가 넘은 시간에 그에게 카톡을 보낸다는 건 적절치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핸드폰의 전원을 컸다. 이제 나도 때론 전원을 끌 때도 필요하다는 것 아는 나이가 된 것일까?

아무래도 예감이 좋다. 접신의 지경은 아니지만, 나의 안테나가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달아나버린 로맨틱을 잡아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방해만 받지 않는다면 말이다.

남편은 출근하고 애들도 다 제 갈 길로 가버린 집에서 일주일에 한 번 부르는 도우미 아줌마가 청소하는 동안 마당 벤치에 앉아서 햇볕을 쬐고 있었다. 주치의 선생이 말하길 땀이 흠뻑 날 정도의 운동과 비타민 D 섭취가 폐경 이후의 골다공을 예방해준다고 한다. 의무적으로 햇살을 하루에 한 시간씩 쬐고 칼슘과 마그네슘 섭취로 뼈의 골다공은 예방한다지만 숭숭 뚫린 영혼의 골다공은 어쩌라는 건지.

오랜만에 햇볕을 쬐며 영혼의 광합성을 했다. 부드러운 햇살과 정원의 꽃 냄새 새삼 내가 살아 있음을 절실히 느끼게 해 준다.

“세월 좋네!”

문이 벌컥 열리며 친구 진애가 들어섰다. 마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화이트로 갖춰 입은 진애의 목에 어린애 눈깔사탕만 한 진주목걸이가 걸려 있다.

“와서 앉아. 내가 벌떡 일어나서 환영할 상황 아니다.”

“그 정도로 심해? 초기라며? 게다가 항암치료도 안 하고 좋다던데 네 남편 말로는. 소리 소문도 없이 수술하시고 암튼 잘 나셨어.”

“뭐, 골반이 좀 아프고, 관절이 아파서 일어나고 서는데 좀 동작이 느려서. 노인네가 다 됐다.”

“그래?”

진애가 바로 옆에 앉으며 말했다.

그녀가 옆에 앉자 진한 향수 냄새가 진동한다. 이게 바로 신체 장기 다 있는 여인의 냄새인가 보다.

“기분은 어때?”

“엿 같아.”

“그래? 그럼 오리고기 먹으러 가자. 암 환자들에게 오리고기가 그렇게 좋다더라. 생각 같아서는 네가 좋아하는 마블링이 꽃처럼 핀 소고기 먹으러 가고 싶지만 그건 안 된다며. 인터넷 찾아보니 그렇게 나오더라. 너 같은 육식주의자는 풀 먹고 글 못써. 글도 에너지가 있어야 쓰는 거야. 나가자. 뭐 해? 어서 따라나서지 않고?”

갑자기 햇살 아래서 양팔을 펼치고 서 있는 진애가 세상을 구원하러 온 재림예수처럼 보였다.

모처럼 만에 교외로 나와 바람도 쐬고 소고기는 아니지만, 오리고기를 마음껏 먹은 탓인지 기분이 좋았다. 게다가 맥주 한 캔을 마신 후라서 한강의 풍경이 울컥할 정도 아름답게 보였다. 이것도 그놈의 호르몬 탓이다.

“우리 나이는 사거리에 서 있는 나이야.”

진애가 강을 아스라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왜?”

“어디로 갈지 몰라서 헤매는 나이니까. 그래도 나는 네가 부럽다. 우울증 때문에 어떻게 될까 봐 올 화이트로 빼입고 교회 가서 찬양이나 해야 좀 살 것 같은 나보다는 낫잖아.”

“부러울 것도 많다. 생계형 작가가 뭐가 부럽냐. 정작 내 소설은 산으로 가는 중인데........”

“하긴 네가 여자 작가 중에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못 되는 이유가 있지.”

“뭔데?”

“결혼했지, 이혼도 하지 않았지, 애들도 셋이지, 무엇보다 첫사랑과 결혼했지. 반전이 없어. 정상에서 벗어 난 게 없잖아. 그러니 스토리가 없지.”

“그런가?”

생각해 보니 진애의 말도 틀리지는 않는다. 나는 그저 내가 가진 재능을 허비하면서 지내왔고, 암 수술과 난소제거로 인한 폐경 이후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내가 되어버린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지금까지는 무심했던 소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결혼이 종교 생활의 연장이려니 생각하고 살아. 내가 이혼한들 이 나이에 어디 가서 이만큼 누리고 살겠니? 그러니까 날 위해서라도 연애 소설 그거 꼭 써라. 내가 우리 교회에 100권 기부할 거니까 수위 조절 잘하고. 목사님 고민하게 만드는 내용은 피해 주시고.”

진애는 제가 말해 놓고도 우스운지 깔깔댄다.

“행복해?”

“너는?”

“몰라.”

“나도 몰라.”

진애가 피식 웃는다. 네가 모르는 걸 나는 알겠냐는 눈빛이다.

“왜 우리 장 국영 오빠는 만우절에 갑자기 자살해서 내 인생 후반을 재미없게 하시냐? 안 그랬음 일본 아줌마들 욘사마 하듯이 나도 그렇게 홍콩 투어나 했을 텐데.”

진애는 정말 아쉽다는 듯이 웃으며 영웅본색의 주제가를 흥얼거린다. 그러나 진애는 모른다. 장국영이 그렇게 죽었기에 전설이 되고 로망이 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영웅본색의 장국영은 거짓말처럼 갔고, 달러로 담배를 피우던 포스 작렬의 주윤발은 끝까지 남아 할배가 되어 영화 <와호장룡>과 <공자>에 나왔다. 아름다운 시절은 시간 속으로 사라졌고, 현실은 너무 사실적이어서 서글프다. 나 역시 그러하다.

핸드폰이 울렸다. 항상 갑자기 의외의 장소에서 울리는 전화는 불길하다. 한 번의 전력이 있었기에 나는 한동안 핸드폰을 들고 멍하니 바라봤다.

다행히 남편이다. 한낮에 나게 전화를 거는 법이 별로 없는 남편이 내게 왜 전화를 했을까? 난데없는 그의 전화가 불안하다.

보고 있던 진애가 누군데 전화를 안 받느냐고 눈빛으로 묻는다.

“이 사람 회사에서 절대 전화하지 않는데, 무슨 일이지?”

갑자기 불안해진다. 이 남자도 혹시 회사에서 건강검진받은 게 나처럼 결과가 안 좋아서 전화를 건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핸드폰을 들고 멍하니 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던 진애가 핸드폰을 빼앗더니 대신 받는다.

“예, 저 주 진애입니다. 그러게요. 오리고기는 괜찮다고 해서 내리고 나와서 좀 먹였는데. 아, 뭐 저야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이잖아요. 지금 전화 받기가 뭐한데 전화하라고 그럴게요. 다행이지 뭐. 주영이 잘 부탁해요. 스위트 홈은 거저 만들어지는 거 아니잖아요. 건강은 좋죠? 아휴 다행이네.”

진애의 수다가 길어진다. 예전부터 서로 잘 아는 사이인지라 허물이 없다. 둘의 전화 통화가 길어진다. 진애는 남편과의 전화 통화가 뭐 그리 재미있는지 까르르 소녀처럼 웃기까지 한다.

남편과 진애의 전화 통화를 들으며 천천히 맥주를 마셨다. 살이 다 발라진 생선 가시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그야말로 뼈대 인생이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아서 행복하지 않다. 보통의 여자인 진애의 웃음이 새삼 부럽다. 나에게 있어서 보통이란 의미는 신체리듬이 정상적이고 모든 호르몬이 생체리듬에 따라 분비되는 것을 말한다.
“참, 이분은 바른생활 인생이야.”

진애가 전화를 끊으며 말했다.

“왜 전화했데?”

“집안에 급한 일이 생겼다는데, 전화 좀 하래.”

진애가 핸드폰을 건네며 말했다.

어쩐지 유쾌한 일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전화 달라는데?”

“됐고, 오늘 너, 나랑 콘서트 가지 않을래?”

“무슨 콘서트? 부활. 아니면 이승철?”

“그들보다 더 잘 나가는 로커가 콘서트를 한데. 공짜 티켓 있어.”

“누군데?”

“가보면 알아.”

나는 말할 수 없었다. 그 로커가 가을이 사귀는 남자이고, 여섯 살이나 연하이며 앞으로 어쩌면 의사 노릇을 하며 평생 먹여 살려야 될지도 모를 남자라는 걸.

살다 보면 예상치 않는 일들을 종종 겪게 된다고 하지만 요즘의 나는 종종이 아니라 꽃으로 치자면 한 다발 분량의 일들을 겪다 보니 어지간한 일들은 이제 충격적이지도 않다. 나는 인생이 늘 내게 적당히 공평하고, 친절하며 보장보험에 든 사람처럼 기본을 되는 삶을 보장할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면서 살았다.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에 죽어라 의사 공부시켜 놨더니 네 살 연하의 로커와 사귀는 딸에, 장남 콤플렉스를 가진 남편까지 인생 삼단 케이크 위에 암 수술로 정점을 찍어버린, 주치의 말처럼 난소와 자궁을 제거해도 아쉬울 것도 손해날 것도 없는 나이 마흔여덟 살을 발로 차주고 싶다.

하늘에서 막 임무 수행을 마치고 지상으로 내려온 천사 아줌마 복장을 한 진애를 데리고 콘서트장으로 향했다.

로비서부터 진애는 시선 집중이다.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젊은 애들이 죄다 한 번은 돌아본다. 진애는 그런 젊은이들의 시선을 즐기는 듯 보였다.

언더그라운드치고는 잘 나가는 그룹인지 대형 사진이 걸려 있다. 물론 가운데는 그 얼굴 하나만으로도 밥은 굶지 않고 살 것 같은 가을의 어린 연인이 차지하고 있다. 얼굴엔 아이라인까지 그려서 꼭 지하의 신 하데스 같은 음울한 기운마저 도는 그들이 내게는 부모 속을 어지간히 썩였을 골칫덩이로밖엔 보이지 않는데 젊은 애들은 비명을 지른다.

갑자기 로비가 웅성웅성하더니 네 명의 덩어리들이 걸어온다. 전생에 서커스단 맹수였는지 온통 올블랙 가죽에 체인까지 감은 네 명의 청년이 지나갈 때마다 무리의 여자애들이 비명을 지른다.

“재들이냐? 우리 교회 목사님이 보시면 기절초풍하겠다.”

진애가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웃는다.

“기절하고 싶은 사람 여기도 있다.”

“누구?”

“나.”

“왜, 몸이 안 좋아?

진애가 놀라서 묻는다.

바로 그때 홍해 바다 갈라지듯이 내 앞의 여학생들이 길을 비켜준다. 살아생전 나는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다. 호기심 어린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고 한 젊은 남자가 나에게 다가오고 있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져 어디론가 가버릴 만큼 충격이었다. 가을도 이래서 저 어린것과 연애를 한 건가?

뒤에 아우라가 대형커튼처럼 드리운 것 같은 딸의 어린 연인 지호가 나에게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그가 걸을 때마다 체인들이 철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내 심장도 다시 한번 철렁했다. 저 대책 없는 어린 연인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지호가 다른 세 명의 청년을 이끌고 다가오더니 내 앞에서 90도 각도로 허리를 접더니 인사를 한다. 다른 청년들도 마찬가지다.

“고맙습니다. 어머니.”

지호가 고개를 들더니 흰 이를 드러내며 씩 웃고는 무리를 이끌고 바람처럼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무리의 여자애들이 ‘지호 오빠 엄마인가 봐?’라며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한동안 로비에 서 있었다. 졸지에 나는 젊은 애들 우상의 엄마가 되어버린 것이다. 여자애들이 나를 바라다보는 눈빛은 미래의 시어머니를 바라보는 눈빛과 흡사했다. 잠깐이지만 딸만 셋인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감정 때문에 어깨에 각이 지려고 한다.

“뭐야? 언제 네가 저런 날라리 아들이 있었냐? 너, 고아 후원했냐?”

역시 태생이 부르주아인 진애의 눈에는 지호가 날라리 뽕짝에 고아처럼 보이는 컨셉인 것이다.

“저 애가 어디 고아로 보이냐?”

발끈하며 말했다.

“그럼?”

“아티스트지.”

“암튼 우리 목사님 보시면 당장 두 손 잡으시고 ‘어린양, 기도합시다.’ 할 비주얼이다. 참, 뉘 집 아들인지 부모 속 엄청스레 썩이겠다. 주여,”

진애의 그 주님을 지금은 나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다.

콘서트장 안은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였다. 재야의 고수는 역시 가을이 말대로 지호였다. 무대 위의 지호는 기타를 비스듬히 매고 서서 있기만 해도 여성이나 소녀 동지들의 심장에 그만의 매력을 난사한다. 평소엔 몽롱하고 멍해 보이는 눈빛이 무대에서는 카리스마와 아우라가 넘친다. 무대에서의 지호는 그야말로 접신의 경지다. 순간 나는 다이하드의 주인공 부루스 윌리스와 이혼 후 아들 같은 남자와 결혼한 데미 무어를 이해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의 호감은 거기까지였다. 어둠 속에서 드럼을 치던 인물에게 환한 조명이 비치기 전까지 나는 사랑은, 사랑하면 그럴 수도 있을 거로 생각했다. 갑자기 올 화이트의 정장에 눈깔사탕만 한 진주목걸이를 한 진애가 야광봉을 흔들며 젊은 애들 틈에서 같이 환호성을 질렀다.

“첫눈에 반해서 제 눈이 돌아갔습니다.”

지호가 드럼을 치고 있던 긴 생머리의 여성을 데리고 오더니 그 높은 무대에서 노래하듯 소리를 질렀다. 순간 내 머릿속은 또 하나의 크레바스가 균열을 일으키며 생겼다. 그곳에 가을이 서 있었다. 사랑은 그렇다 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언제 드럼은 배운 걸까? 저러다 의사 노릇 집어치우고 남친 따라 언더그라운드로 잠수 타겠다고 하는 건 아닌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꼭 딸에게 두 번 사기당한 기분이다.

“어머, 쟤…. 어머머 어쩌니?"

신실하고 우아한 크리스천인 진애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진다.

둘이 만천하에 보란 듯이 키스를 나눈다. 게다가 엄마가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프렌치키스를 하고 있다. 주변의 환호성과 소음들이 일제히 사라지고 대책 없는 두 연인만 내 두 눈에 들어왔다.

“어머, 역시 DNA는 배반을 모르는구나. 역시 네 딸답다. 어머, 주여, 저 두 젊은이를 축복하소서.”
“개뿔, 축복은 무슨, 가자.”

나는 진애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니 왜, 재미있는데. 우리가 얼마나 오랜만이니 저런 사랑을 구경하는 게. 어머, 정말 축하한다. 인생은 역시 판타스틱해.”

진애가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깔깔 웃는다.

“쟤한테 들어간 돈이 얼마인 줄 아냐? 억도 넘어. 죽 쑤어서 개 주게 생긴 꼴이잖아!”

너무 억울한 나는 목청껏 소리쳤다.

“사랑한다잖아.”

진애가 소리 지른다.

“사랑이 밥을 주냐?”

“밥이 사랑을 주진 않는 건 확실해.”

그렇게 주도면밀하게 개입하려고 했건만 실패했다. 가을이 사랑을 시작했고, 나는 그 사랑을 인정할 수가 없다. 하지만 말릴 수도 없다. 그랬다가는 의사도 때려치우고 말 그대로 언더그라운드로 내려앉을까 봐서이다.

콘서트 중간에 결국 진애를 끌고 나왔다. 진애는 아쉬워했지만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는 나 때문에 따라나섰다. 집에 돌아오는 내내 진애와 나는 말이 없었다. 차 안에는 그저 무거운 침묵만이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가끔 진애가 한숨을 쉬며 나를 봤지만 그녀의 한숨은 나의 한숨에 비하면 깃털처럼 한없이 가볍다.

“스트레스받지 마. 지들 인생이야. 막말로 의사 때려치우고 그 길로 나간다고 안 하는 것만 해도 다행이지. 막말로 애부터 덜컥 안 가지면 다행이야. 너만 생각해. 우린 스위트 홈 판타지에 벗어나야 한다니까. 스트레스받으면 4대 암에 걸릴 확률이 높아져. 가을인 영리하니까….”

진애가 할 말이 없는지 말끝을 흐린다.

“영리한 년이 그러냐? 어이쿠 영리가 다 죽었다.”

“남편 밑에서 기죽고 사는 나보다 낫지 뭐. 능력 있어서 지 좋은 일 하면서, 제가 좋아하는 사람 데리고 살면 돼. 이젠 능력 있으면 여자가 남편에게 목매고 사는 시대는 아니잖아.”

“그거 지금 위로라고 하는 거냐?”

“말인즉 그래. 너는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잘난 사위 보고 싶겠지만 가을이 행복하지 않으면 그거, 네 말대로 다 개뿔이야. 남에게 보여주는 쇼윈도우 패밀리 그거 한마디로 지랄이다. 이젠 로맨틱으로 세상을 좀 봐.”

“그러는 너는?”

“나는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진애가 백미러에 걸린 십자가를 보며 ‘주여’ 한다.

하긴 그녀가 남편의 바람기 때문에 나가기 시작한 교회를 이토록 오래 다닐 줄 몰랐다. 성악을 전공한 탓인지 찬양을 할 때가 제일 행복하다며 진애가 웃는다. 그렇지 않으면 어디 가서 배운 성악을 써먹겠냐며.

“정 억울하면 오 년 동안 잘 관리해서 암 완치 판정을 받은 후 가을에게 복수해. 하지만 가을이도 한 때는 행복을 주는 사람이었다는 걸 잊지 마.”

진애가 교회에 다니더니 달라졌다. 예전엔 하루가 멀다고 ‘결혼이 정녕 이런 거냐’ 며 전화를 해대며 우울증 약을 콩 먹듯이 먹는다고 하소연을 했었는데 말이다.

“아홉수도 아니고 참, 하루하루가 쇼킹이다.”

“그래도 사랑의 풍경을 지켜봐. 사랑이 없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거지 같겠니?”

진애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사랑이 있어도 종종 거지 같은 일상이 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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