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아홉번째, 열번째 항암치료와 그 이후
지난 회차에는 호중구 수치(ANC)가 420으로 낮아서 걱정을 했지만 다행히 별 탈 없이 새 주기가 돌아왔다.
이번에는 ANC 1785로, 치료에 전혀 무리가 없을만큼 수치가 회복되었다.
구토때문에 치료를 미뤘던 날 이후로는 늘 같은 처방이고 효과도 좋다.
아칸지오 캡슐
덱사메타손(dexamethasone) 정맥주사
아티반(lorazepam) 근육주사
+ 이후 3일간 경구 덱사메타손 복용
전처치 이후에는 바로 항암 주사를 맞는데, 3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이제는 남은 회차 모두 잘 넘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16일부터 18일까지 매일 오전에는 처방받은 덱사메타손을 복용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구역감은 효과적으로 조절되었고, 지난 회차에 이따금씩 나오던 딸국질도 없었다.
다만, 다른 부작용이 없었던만큼 변비가 더 심했다.
이제는 일반적인 변비약으로도 효과가 없다.
장의 운동성이라 해야할까, mobility가 정상적으로 회복될 때까지 시간이 좀 더 걸리는 느낌이다.
결국엔 최후의 수단인 관장약까지 사용하게 되었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오늘은 일년 중 밤이 가장 긴 날인 동지이다.
내가 림프종을 진단 받았을 때는 낮이 가장 긴 하지 무렵이었는데, 벌써 반년이 지났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밤이 가장 긴 동지와 비슷한 거 같다.
가장 춥고 깊은 어둠을 지나고 있는 순간.
그렇지만 오늘 밤이 가장 길다는 뜻은 내일부터는 낮이 계속 길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게 다시 낮이 밤만큼 길어지고, 또 낮이 밤보다 길어지다가, 마침내는 낮이 가장 긴 하지가 돌아오겠지.
정말 힘들지만 다가올 항암치료는 걱정보다는 기대가 더 크다.
딱 한 가지, 끝이 가까워지고 빛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둠이 무서운 이유는 언제가 가장 어두운 지 모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이 가장 어둡다는 걸 알고 있고, 그걸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둠이 무서울 이유가 없다.
다음 항암치료 예정일은 1월 5일.
다음 주기가 어서 돌아왔으면 좋겠고, 그 때의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도 궁금하다.
이번 회차는 3주의 텀이 있었기에 모든 수치가 정상수준으로 회복되었다.
호중구 수치(ANC) 1995로 아주 괜찮았다.
모니터를 보며 수치가 괜찮다는 교수님께서 이어서 말씀하셨다.
"남은 2회의 항암은 딜레이 없이 빨리빨리 하고 끝내버립시다."
하여 [6-1]은 1월 19일, 마지막인 [6-2]는 2월 2일이 될 것 같다.
오늘로서 딱 20여일 남았다.
짧은 진료를 마치고 치료실로 갔고, 역시 구토 예방 전처치는 지난번과 동일했다.
아칸지오 캡슐
덱사메타손(dexamethasone) 정맥주사
아티반(lorazepam) 근육주사
다만 이번에는 지난 번에 변비가 심했음을 고려하여 이후 3일간 복용하던 덱사메타손은 교수님과의 상의 하에 복용하지 않기로 했다.
이어서 맞는 항암 주사는 이번에도 역시 수월한 편이었는데, 총 3시간 반 정도 걸렸다.
지난 2~3회 정도 나를 지독하게 괴롭혔던 변비의 범인은 스테로이드인 덱사메타손이 아닌가 싶다.
구역감이 두려워 꾸준히 복용했던 항암 이후 3일간의 약을 이번엔 복용하지 않았다.
다행히 구역감도 없었고, 관장약 사용도 없이 변비에서 해방됐다.
겨우 0.5mg 짜리 약 몇 알이 이런 차이를 만드는 게 약사인 나도 신기할 때가 있다.
구름은 걷혀가고, 걷힌 만큼을 햇살이 채우고 있다.
항암치료일이 오지 않았으면, 조금만 더 쉬었다 했으면 하는 생각들이 나를 지배하던 날들도 있었으나, 지금은 어서 항암치료일이 다가왔으면 좋겠다.
얼마나 긴지 몰랐던 터널을 하염없이 걷고 있었는데, 드디어 출구가 보이고 빛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미 오래 걸어서 다리도 아파오고 많이 지쳤지만, 머지 않은 곳에 빛이 보이니 되려 더 즐겁고 설레기도 한다.
기쁨, 슬픔, 즐거움, 외로움 등의 감정을 나타내는 추상적인 단어들을 문자로서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고민해보고는 한다.
그러다 어느날 '외로움'이라는 감정에 대하여 '혼자가 아니었던 사람이 혼자가 되었을 때 느끼는 감정'이라고 나 혼자 정의해보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 정의에 따르면 나는 옛날에도, 지금도 외롭지 않은 사람이다.
그 옛날의 나는, 내가 늘 혼자여서, 그러니까 한 번도 혼자가 아니었던 적이 없어서 외로움을 느낄 수 없고, 외로움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 때의 나는 늘 혼자서 모든 걸 다 해내야 하던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내가 이뤄낸 모든 것들은 오롯이 내가 잘나서 이뤄낼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내가 나이가 조금씩 들어가고, 여러 경험들이 쌓이고, 많은 것들을 배우면서 나의 '외롭지 않음'의 원인이 다른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사실 '늘 혼자여서' 외롭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한 번도 혼자였던 적이 없어서' 외롭지 않은 것이었다.
내가 지금껏 이뤄냈던 모든 성취는 사실 나만의 힘으로 가꾼 것이 아니었다.
나에게는 늘 조언을 구할 수 있는 믿을만한 사람들이 있었고, 내 결정을 지지해주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내 고민을 경청해주는 사람들 역시 있었다.
그리고 내 앞에는 먼저 걸어갔던 길의 발자국을 지우지 않고 남겨두어 참고하게끔 배려해주는 사람들이 있었고, 어느덧 내 뒤에는 내가 새긴 발자국을 보고 따라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요즘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응원해오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중이다.
여러 경로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나의 쾌유를 빌어주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행여나 부담이 될까봐 내 상태가 어떤지, 잘 치료받고 있는지 등을 나에게 직접 물어보지도 않는다.
그렇게 신경써주는 마음이 참 고마워서, 그래서 이렇게나마 잘 이겨내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제 딱 1사이클을 남은 시점, 그래도 내가 외롭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나를 응원해주는 주변의 모든 분들 덕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