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열한번째, 열두번째 항암치료와 그 이후
다른 수치들은 모두 괜찮았고, 호중구수치(ANC)는 510으로 다소 낮았다.
교수님께서는 치료를 미룰 정도는 아니라며 진행해도 되겠다고 하셨다.
이제 전처치 처방은 고정.
아칸지오 캡슐
덱사메타손(dexamethasone) 정맥주사
아티반(lorazepam) 근육주사
역시 항암 다음날 덱사메타손은 복용하지 않기로 했다.
항암주사는 이번에도 수월한 편이었고, 3~4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최종 검사 일정은 마지막 항암을 [6-2]를 진행하는 날 잡기로 했고,
케모포트 제거시술 일정은 검사 결과가 나온 후에 잡기로 했다.
나를 가장 괴롭혔던 부작용은 구역감과 변비였다.
구역감과 변비의 정도가 반비례적으로 나타나다 보니 변비가 좀 덜하면 구역감이 심하고, 구역감이 좀 덜하면 변비가 심했던 경향이 있었다.
그러다 이제는 최적의 중간지점을 찾은 것 같고,
불편한 게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견딜만 한 정도가 됐다.
(언젠가 이 말을 했던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다시 힘들어졌다가 회복됐달까...)
작년 말부터였나, 내가 투여받는 항암제는 아니지만 일부 항암제가 품절이 되면서 암환자들의 치료가 지연되고 있었다.
교과서에서만 봤던 '5-FU'라는 항암제였는데, 여전히 일부 암의 치료를 위해 종종 사용되는 약이다.
생산하는 제약 회사에서 공정 설비를 개선하느라 공급이 일시적으로 지연됐다고 한다.
그런데 이 항암제는 값이 싼 의약품이라 채산성이 낮아서, 수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생산량을 늘리기가 힘들다.
고정적인 수요가 존재하는데 공급이 부족해지니 약은 품절이 되었고, 결국엔 암환자들이 항암치료를 받지 못하게 되는 일이 생겼다.
엊그제는 지방에서 치료를 받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가, 항암제가 품절이라 치료를 받지 못하고 다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는 분의 소식을 접했다.
그 사이에 병이 커지면 어떡하나, 걱정되고 속상하기도 하셨겠지.
아픈 사람이 아픈 거 외의 다른 일로 걱정해야 한다는 게 참 서글프다.
역시 호중구수치(ANC)는 580으로 낮은 편이었지만, 치료를 진행하기엔 무리가 없었다.
많은 것들이 마지막이 된 날이었다.
마지막 전처치 항구토제 역시 지난 번과 동일한 처방이고, 항암주사도 마지막이라 그런지 훨씬 수월했다.
지난번만 해도 중간중간 울렁거림이 있었는데, 이번엔 전혀 없었다.
고생해주신 간호사 선생님들께 마지막이라 감사인사도 드렸고, 선생님들께서도 축하의 말씀을 해주셨다.
프로세스 상 CT 및 PET/CT 촬영은 마지막 항암치료일로부터 6~8주 후이다.
그 후 결과를 가지고 최종판정을 하게 된다.
한편, 교수님께서 3월부로 안암에 위치한 다른 병원으로 이직을 하시게 되어서, 나 역시 고민 끝에 교수님을 따라 병원을 옮기기로 했다.
하여 3월에 해당 병원에서 다시 예약을 잡기로 했다.
어제를 마지막으로 예정되었던 6사이클, 총 12번의 항암치료가 모두 종료되었다.
돌이켜보니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처음엔 식도 이물감이 왜 이렇게 오래갈까싶어 병원을 갔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심상치 않다는 게 조금씩 밝혀지다가 마침내는 호지킨림프종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그 후엔 4일 정도 병원에 입원해서 항암치료 전에 필요한 여러 검사들을 받았고, 이어서는 2주에 한 번 씩 항암치료를 위해 병원을 왔다갔다 했다.
총 4회의 치료가 끝나고 나서 실시한 중간평가에서는 이미 완전관해 수준에 도달했다는 판정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수월할 것만 같던 치료에도 점점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
몸이 힘들어 2주의 기간이 3주로 미뤄지던 날들도 있었고, 구토를 심하게 해서 치료를 받지 못하고 귀가를 하던 날도 있었다.
그래서 진지하게 포기하고싶다는 생각을 하던 날도 있었고, 그런 내 마음이 나를 더 불안하게 해서 혹시 내가 부작용으로 다른 병에도 걸린 건 아닌지 의심하던 날도 있었다.
그렇게 내가 나를 의심하던 그 무렵, 나를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끔 만들어준 건 다름이 아닌 주변의 응원과 격려였다.
구역질에 도움이 된다며 레몬캔디와 포카리스웨트를 보내주신 분도 있었고, 치료를 미루게 됐다는 소식을 접하고나서 필요한 건 뭐 없는지 물어봐주시는 분들도 있었으며, 장문의 메시지로 격려를 보내주신 분들도 있었다.
배려심 넘치는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딱 한 발자국 정도만 뒤로 물러서 있었을까.
그 거리는 내가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내가 손을 내밀면 어렵지 않게 잡아줄 수 있는 거리였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그 때의 나에게 가장 필요했던 건 그런 사소한 관심이 아니었을까.
무엇보다 신경써주는 그 마음에 가장 감사함을 가지고 있다.
덕분에 힘겨웠던 시간들을 이겨내고 다시 나아갈 수 있었다.
끝이 가까워질수록 다시 탄력이 붙었고, 마지막 3회의 항암치료는 처음처럼 2주의 간격으로 받게 되었다.
그렇게 마침내 어제부로 모든 치료가 마무리되었고, 이제는 정말 자유를 되찾은 것 같다.
(물론 아직 변비 등의 불가피한 부작용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진 않았지만..)
혹자는 젊은 나이에 찾아온 큰 불행으로 너무 고생하는 거 아니냐며 걱정해주기도 하셨는데요.
참 감사한 마음이지만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20대 후반에 암을 진단받았는데요,
우리 사회에서 20대 후반이라는 나이대가 갖는 의미는 되게 초라하거든요.
경쟁은 치열하고 문은 되게 좁아요.
그래서 오랜 시간 스스로를 갈고 닦아야 하고, 어찌저찌 사회에 진입을 해도 초년생으로서 겪게되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고,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경력을 쌓아나가도 여전히 저년차거든요.
그러다보니 칭찬받을 일, 박수받을 일은 별로 없고, 되려 자존심은 내려놓고 내 잘못이 아님에도 고개를 숙여야하는 일들이 생기더라고요.
이렇게 초라한 나이대가 바로 사회진출을 앞두고 있는, 혹은 이제 갓 사회에 진출한 20대 후반인데요,
어째서인지 저에겐 다들 다르게 대해주셨어요.
사회도 사람들도 제게 더 큰 관용을 베풀어 주었고, 더 많은 배려를 건네주었어요.
그렇게 잘 이겨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큰 격려를 받았고, 심지어는 건강하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박수를 받았네요.
그게 저에게 참 감사하고 행복한 기억으로 남을 것 같아요.
그러니 저는 사실 불행한 사람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에요.
또 지난 몇 달의 경험이 앞으로 내 삶을 살아가는 데 큰 자산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요.
요즘에는 서사가 곧 경쟁력이라고 하잖아요.
암에 걸린 게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겠지만, 이 열두번의 항암치료를 견뎌내고 암을 이겨내는 과정은 충분히 자랑스럽고 의미있었거든요.
원치는 않았지만 이 과정 모두 내 서사가 되었으니, 저는 계속 저만의 이야기를 써내려갈 거예요.
침착하게 최종 결과를 기다려야지 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얼른 사회에 복귀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제 몫을 하고싶다는 생각을 해요.
세상이 유독 더 밝아보이는 요즘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