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여덟번째 항암치료와 그 이후
이번엔 호중구수치(ANC)가 420으로 많이 낮았지만 교수님께서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으셨다.
500 미만으로 떨어질 경우에는 치료를 미루는 경우도 있는데,
교수님께서 내 나이나 치료 진행 상황 등 여러가지를 고려하셔서 판단을 내리셨을 거라 생각한다.
지난 번과 동일한 처방
항구토제 아칸지오 캡슐
스테로이드 덱사메타손(dexametasone) 정맥주사
신경안정제 아티반(lorazepam) 근육주사
여기에 덱사메타손 알약을 3일치 더 처방해주셨다.
사실 지난 회차에도 덱사메타손 경구약을 처방해주셨지만,
혹시 부종이나 체중증가, 불면 등 흔히 알려진 스테로이드의 부작용이 생기지 않을까 싶어서 안먹고 버텨봤다.
안 먹고도 견딜만하면 굳이 먹을 필요가 없긴 하니까..
그렇지만 울렁거림이 너무 심해서 힘들었고, 그래서 이번엔 무조건 다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참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도 별 문제 없이 지나갔다.
두 번 연속 큰 탈 없이 지나가니 확실히 더 안심이 된다.
이번에는 처방대로 덱사메타손을 끝까지 복용했더니 정말 구역감도 별로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이따금씩 딸꾹질이 나와서 완전히 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구토를 하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
그렇게 딸꾹질도 잦아들어갔고, 월요일인 27일부터는 몸상태가 80% 정도는 돌아온 것 같다.
최근 항암치료를 진행하면서 가장 빨랐던 컨디션 회복이다.
[4-2]까지, 어느새 전체 치료의 2/3를 해냈다.
처음 항암치료를 시작했을 때의 기온과 30도 가까이 차이가 나는 요즘.
어느덧 여름도 가을도 내 뒤로 가고, 이제는 앞에 겨울만이 남아있다.
지금 계획대로라면 연중 가장 추운 1월 중순 무렵 치료를 완료하게 될 것 같다.
가장 더울 때 시작해서 가장 추울 때 끝나게 되는 셈이구나.
앞으로 나아가기 두려울 때마다 뒤를 돌아보곤 한다.
그러면 용기내서 내딛었던 내 발걸음들이 보인다.
그 땐 더 두려웠으니까, 한 발자국에 더 큰 용기가 필요했다.
불과 여섯번째 항암까지만 해도 '아직 반밖에'라는 생각이었는데, 이제는 '벌써 네 번밖에 안 남았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힘들었던 순간들을 견뎌내며 조금씩 더 단단해지고 있는 내가 대견하기도, 안쓰럽기도 하다.
지난 몇 달 간은 혼자서 사색할 시간이 참 많았다.
삶에 대해서 더 진지하게 고민했고, 삶을 대하는 태도 역시 많이 달라졌다.
가장 큰 변화는, 보게 되는 모든 사람들과의 만남이 오늘이 마지막일 수 있음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다들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바빠지고 삶에서 여유를 찾기 힘들어지기에, 그 여유를 나에게 나눠달라고 말하기가 미안해진다.
그래서 아무리 친한 사이더라도 1년에 1~2번 보기가 쉽지 않고, 그 마저도 서로의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여기에 더해 나는 건강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마음 한 편엔 언제든 사회에서 이탈할 수 있다는 불안함이 자리잡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모든 사람들과의 만남이, 아니길 바라고 아니겠지만, 이번이 마지막일 수 있음을 늘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다.
오히려 그렇기에 그 모든 만남이 더없이 소중하고 의미있다.
마지막일 수 있음을 생각하기에 서로에게 더 좋은 만남으로 기억되길 바라고, 그래서 더 좋은 사람이 되고싶다.
더 많이 비워내고, 더 다듬어 나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