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궁에서 태어나 책이 나를 기르고 여자들이 수정을 더한 나
"보기전에 뛰어라" 번지 점프에 도움 될진 몰라도 누가 인생을 다시 살라 하면 그런 무서운 짓은 다시 하고 싶지 않다. 난 이미 인생의 폭풍을 보앗고 그 바다에 다시 뛰고 싶진 않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인생은 (찰리 채플린) 어떤 여자를 만나냐에 따라 희극 또는 비극이 되기도 또 비극을 희극으로도 만든다. 1972년 (1971년 태어 났으니) 어느날 내 부모는 자신들의 집중한 물건들이 각자의 고독을 참을 수 없던 날 밤, 난 통섭되었다. 어머니 아버지는 섹스를 했고 난 자궁에 착상되었다. 이 세포 하나가 뇌수를 일으켜 지금 글을 쓰고 꿈을 꾸고 사랑을 한다. 꿈에는 가격이나 세금이 없으며 햇빛도 공짜다. 하지만 사랑은 공짜가 아니다. 크고 작던 댓가를 치룬다. 아버지는 그 시대에 장식이 없는 심풀한 아무 의식이 없는 브레지어를 벗겼을 것이고 어머니의와 정사를 치뤘다. 그 댓가로 내가 태어 났고 태어나면서 받은 성교육(사랑은 댓가를 치뤄야 함을)은 덤이다. 이 원초적인 탄생에 비해 그 후의 삶의 폭풍은 간단치 않았다. 나는 여자의 자궁에서 태어 났지만 책이 나를 기르고 성장 시켰으며 그 중간에 여자들(어머니를 포함한)이 약간의 수정을 더했다.
책을 읽는 다는건 다른 시각을 공유함이지만 실은 나의 자아를 찾는 과정이다 즉 책을 읽는 다는건 은하철도 999의 철이나 프란 다스의 개, 혹은 말괄량이 삐삐가 여행을 떠나려던 목적인 슈풍크의 의미를 찾는 일이다 (말괄량이 삐삐의 여행은 우연히 그네를 타다 입에 터져 나온 의성어 슈풍크의 의미를 찾는 여정이었다). 책을 읽을 수록 나는 내가 원래 속했던 곳에서 오히려 나날이 멀어 져 갔고 나날이 낯설어 지고 나날이 가벼워 졌다. 그리고 그것은 과거 어느 시절의 내가 간절히 원하던 바였다. 축구 혹은 골프를 한 뒤 와글 와글 거리며 하는 식사 자리보다 혼자 달리거나 수영을 하고 돌아와 맥주 한캔이나 와인을 마시는데 더 행복감을 느낄 뿐이다. 그래서인지 승마, 스쿠버 다이빙, 스키, 테니스 등 주로 혼자 하는 스포츠를 즐겼다. 떠벌리지 않아도 내부에는 근사한게 있으리라는 믿음을 주는 남자가 되고 싶었다. 이건 무라 까미 하루끼나 헤밍웨이하고도 통한다. 내가 책으로 길러진건 부정할 수 없다.
적어도 난 외로움을 피해 관계로 도망치는 바보는 아닌거다. 하지만 때론 그것이 나의 이질성을 두드러지게 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책을 많이 읽으면 무거워 진다 생각한다. 책을 많이 읽어도 뇌하수체의 세포수나 질량은 변함이 없을 텐데도 우린 때론 상식에 전혀 범접하지 않은 것들에 현혹된다. 우리는 세상을 알아 갈수록 이 세상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해 깨닫게 된다. 사람들은 빈약한 진실 보다 화려한 허위를 더 사랑한다. 그러니까 이런가다. 세상은 가볍다. 그래서 난 생의 무거움을 더 느끼는 것일뿐이다. 그녀는 적어도 내 이런 습관을 사랑한다.
사랑이 시작 된 후 내 안의 난쟁이 다섯 마리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소소한 차이, 이를테면 세심함의 정도 차 같은 부분에서 우리 사이에 깊은 강이 흐른다는 것을 그리고 나란 사람은 그 강을 결코 건널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내 선택은 강을 건너지 말고 강이 되어 바다가 되어 품어 보려고 안달 중이다. 사랑은 인격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격을 성숙 시킨다. 그렇게 내 인생은 수정되어 진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너무 사랑한다거다. 사랑은 사랑의 아이러니를 낳는 속성이 있다. 우리의 관계는 너덜 너덜 하고 지저분해져서 이제는 도저희 이어 붙이기가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얇은 종이 정도의 잔해 밖에 남지 않았으나 마치 SF영화에서 나오는 칼에 찔려도 살이 재생되어 5분만에 다시 살아 숨쉬는 모습으로 수술없이 봉합되었다 사랑 접착제의 효능은 놀랍다. 우리는 나란히 걸어 가면서 더 이상 우리 자신들의 침묵을 듣지 않아서 좋았다. 각자의 영혼이 숨쉬고 서로의 숨이 섞인다. 숨을 볼 수 잇는 유일한 계절 겨울이 그립다. 독서 포만감이 들면 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