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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39, 2부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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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다흔넷 Oct 30. 2022

너의 기억 (2)

Y said

>> 너의 기억 (1)에 이어


   충분히 자고 일어났는데도 간밤에 도깨비방망이에 두드려 맞기라도 한 듯 온몸이 뻐근하다. 파리에도 도깨비가 있을까라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하며 헛웃음을 내뱉는다. 9는 벌써 나가고 없었다. 간밤에 내가 저지른 만행이 떠오를 때마다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자괴감에 벽에 살짝 쿵하며 머리를 박아 보았으나, 어젯밤 머리에 씌운 방어막이 그새 힘을 잃었는지 아프기만 할 뿐, 현실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집에서 쉬다가는 오히려 내가 감당이 안될 것 같아서 혼자만의 꽤 거창한 여행 계획을 세웠다.


나는 시테역에 가서 생트 샤펠과 노트르담 성당을 보고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서점에 들른 후 라파예트 백화점에 갔다가 시간이 되면 생마르탱 운하에 가보려고 했다. 시테역에 내려서 어둡고 기이한 구조물을 지나 몇 개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밝은 햇살 아래 초록 물결이 나를 맞았다. 큰 화원에서 특이한 골동품 혹은 여러 제품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생트 샤펠로 이동하는 길은 지도를 볼 필요도 없이 간단했다. 그냥 이정표만 보고 우측으로 이동했더니 바로 전면부가 보였다.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고 안으로 들어가려면 입장료를 내야 해서 대충 지하 전시실만 둘러보고 나왔다.


파리가 내게 준 세 번째 기쁨인 노트르담 성당으로 가는 길 역시 매우 간단했다. 금세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노트르담 성당의 전면부에 다다랐고, 이내 내부로 입장했다. 매우 편안한 느낌이었고, 스테인드글라스로 된 장미 창이 참 예뻤다. 가우디의 그것이 나를 몽롱하게 비현실적인 세계로 인도했다면, 노트르담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차분하게 나를 평정의 세계로 이끌었다. 소원을 비는 노트에 나의 흔적을 남기고 잠시 의자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다. 계속되는 혼란과 방황의 근원이 무엇인지. 도대체 이놈의 PMS는 언제까지 나를 괴롭힐 작정인지. 제발 어렵게 떠나온 시간들 속에서 부디 절망이 아닌 희망을 보게 되길... 문득 9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지만, 또다시 어제의 괴로운 기억이 스멀스멀 밀려오기 시작했기에, 큰 털북숭이 개가 자신을 괴롭히는 온갖 먼지와 벼룩들을 힘차게 털어내듯, 그 모든 생각들을 털어내기 위해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보았다. 긴 머리가  목에 감기며 양 볼을 찰싹찰싹 때렸다. 갑자기 띵하며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 자리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걸음을 옮겨 서점으로 향했다.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잠깐이라도 정말 파리지앵의 삶을 느껴본 것 같았다. 서점에 도착하니 외관부터 빈티지하다. 서점 자체는 넓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서점의 구석구석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걸리적거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장 그곳을 벗어나고 싶지는 않았다. 주로 시집이 꽂혀 있었던 2층이 압권이었다. 피아노도 맘대로 칠 수 있고 매트리스와 의자도 놓여 있어 편하게 책을 볼 수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시집을 하나 집어 들었다. Emily Dickinson -My life had stood-a Loaded Gun- 예전에 영미문학수업에서 보았던 그 시였다. 에밀리 디킨슨은 사랑했던 사람들을 떠나보낸 후 평생 은신하며 시를 썼다. 언제나 하얀 옷을 입었고, 편두통으로 힘들어했으며, 바닐라향이 나는 하얀 관에 묻히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시에선 슬픔과 아픔에 대한 담담한 통달이 묻어 나온다. 고뇌의 표정을 좋아하고 죽음을 위해 자신은 멈출 수 없기에 스스로를 장전된 총이라고 했을 만큼, 내면의 악마와의 힘겨운 줄다리기를 하면서도 길 위에 뒹구는 작은 돌의 소박한 행복을 부러워하고 애타는 가슴 하나 달랠 수 있다면 자신의 삶은 헛되지 않을 거라는 절절한 구원에의 소망이 공존한다. 그래서 내겐 어느 시인보다 유독 더 독특하고 감각적으로 다가왔었다. 여기 파리에서 그녀의 시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내가 지금 느끼는 고통과 번민의 순간들은 세상에 대해 좀 더 초연하고 대담해지기 위한 훈련의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베어도 베어도 계속 나오는 머리가 아홉 개나 달 ‘히드라’처럼, 나는 무시무시한 맹독을 품은 채 없애고 없애도 계속 자라나는 온갖 망상과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다. 그래도 언젠가 헤라클레스가 그랬듯, 내 스스로 아홉 개의 머리를 싹둑 잘라 다시는 그 머리를 쳐들 수 없도록 불로 지져버릴 것이다.


   에밀리 디킨스에서 헤라클레스로 이어진 끝없이 밀려오는 생각의 파도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때쯤, 멀리서 눈에 익은 실루엣이 어른거렸다. 처음엔 내가 환영을 보고 있나 했다. 물을 한 모금 마시면서 정신을 깨웠다. 다시 고개를 들었다. 9와 비슷한 사람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진짜 9가 거기에 있었다. 약속 없이 마주치니 반가웠다. ‘부디 오늘 하루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길 바라.’라고 텔레파시를 보내며, 어색하게 눈빛을 교환하고 급하게 서점을 빠져나왔다.


그리곤 라파예트 백화점에 갔다. 아름다운 돔이 있다길래 굳이 보러 왔는데 기대에는 못 미쳤지만 제법 볼만했다. 이어서 오늘의 미션 중 하나인 럭셔리한 카페에서 우아하게 커피와 마카롱 먹기에 도전했다. 카페오레와 마카롱 4개 세트 (한 개에 2유로, 앉아서 먹으면 2.5유로, 4개 세트에 8.9유로)를 주문하고 앉아 파리의 부와 사치가 집중된 이곳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알록달록 달달한 마카롱 덕분에 눈과 입이 즐거워졌고, 한껏 기분이 고조되었다. 화장실에 들렀다가 나오니 5시 45분. 생마르탱 운하로 빨리 이동하면 30분 정도 볼 수 있겠다 싶어 발걸음을 재촉했는데 웬걸 반대 방향 버스를 탔다. 다시 되돌아오는 바람에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과감히 생마르탱 운하는 포기하고 그냥 집으로 향했다. 9는 왔을까. 일부러 집을 지나쳐서 동네빵집도 구경하고 마트에서 내일 먹을 6개짜리 계란 한 판도 사 왔다.


   숙소에 도착해서 정리하고 있는데 9가 왔다. 민박집에서 제공한 오늘의 저녁은 라볶이와 미니 콜라였다. 난 오랜만에 참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9는 그렇게 좋아하는 라볶이도 먹는 둥 마는 둥 해서 신경이 쓰였다. 식사를 마치고 용기를 내어 오늘의 여행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며 대화를 시작했다. 오늘 경험했던 내용과 각자의 감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 각자 가치 있는 시간을 보내고 발전적인 생각을 많이 한 하루였다. 앞으로도 종종 개별 여행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내가 미안하다는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가 미안함을 표현하기는 했는지도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렇지만 힘겹게 대화를 이어 가던 9의 축 처진 어깨와 괜찮다는 말과는 달리 생채기로 얼룩진 9의 눈동자, 그리고 내내 불편해 보이던 일그러진 9의 잔상은 내게 또렷이 각인되어 있다.    



   다음 날, 여전히 똥 싸고 뒤를 닦지 않은 것처럼, 찝찝하고 석연치 않았다. 그래도 그 모든 감정을 뒤로하고 오늘은 9와 다시 이곳저곳을 다녀보기로 했다. 벼룩시장은 이것저것 신기한 물건들이 정말 엄청나게 많았다. 그런데 너무 후텁지근한 날씨 때문에 쉽사리 불쾌하고 피곤해졌다. 일부러 찾으려고 하면 절대 못 찾는다는 ‘에디 삐아프’가 데뷔한 바를 우연히 발견했다. 들어가서 잠시 맥주를 마시며 샹송을 감상하기도 했다. 그런데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고 자리를 돌며 연신 돈을 걷어내는 모습이 좀 민망했다. 게다가 호기롭게 주문한 구운 소시지의 냄새가 너무 역해서 건드리지도 못했다. 프라하의 로스티드 덕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암내의 극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냥 바로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아뿔싸, 우리가 내리려고 했던 chateau Rouge역에서 정차를 안 한단다. 다음 역에 내려서 그냥 걷기로 했다. 가방은 무겁고 사람은 오지게 많았어도 우리는 그냥 무작정 위로 오르고 또 올랐다. 9에 의하면 여기가 지름길이라고 했다. 참 다행이다. 더 오래 걸었으면 길에서 누웠을 뻔했다. 언덕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잔디에 누워서 휴식을 취하거나 계단에 앉아 전망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도 잠시 앉아 경치를 감상하며 숨을 돌렸다. 확실히 좀 쉬니깐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잠깐 쉬었다고 바람은 시원하게 느껴지고 에너지가 솟았다.


커피 한잔 마실까 싶어 언덕 옆으로 구불구불 난 길을 따라 가보기로 했다. 조금 내려가니 소설 속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의 동상을 볼 수 있었다. 언젠가 작가 마르셀 에메가 쓴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를 읽으며, 그의 재기 발랄한 상상력에 박수를 쳤다가 결국 주인공이 벽 속에 갇혀버리게 되는 의외의 결말에 대략 아홉 번 더 박수를 치며 책을 덮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뒤티유욀은 꼼짝달싹 못 하고 담벽 속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지금 그는 여전히 돌과  한 몸이 된 채 그 담 속에 있다. 파리의 소음이 잦아드는 야심한 시각에 노르뱅 거리를 내려가는 사람들은 무덤 저편에서 들려오는 듯한 희미한 소리를 듣게 된다. 그들은 그것을 몽마르트르 언덕의 네거리를 스치는 바람의 탄식으로 여기지만, 사실 그것은 ‘늑대인간’ 되티유욀이 찬란한 행로의 종말과 너무도 짧게 끝나버린 사랑을 한탄하는 소리다. 겨울밤이면 이따금 화가 젠 폴이 기타를 들고 소리가 잘 울리는 적막한 노르뱅 거리에 나가 담 속에 갇힌 가엾은 벗을 위로하기 위해 노래를 부른다. 그러면 추위에 곱은 손가락들로부터 기타의 선율이 날아올라 달빛이 방울방울 떨어지듯 담벽 속으로 동당동당 스며든다.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중에서



   정말 그는 돌과 한 몸이 된 채 여전히 그 담 속에 있었다.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그래서 오매불망 고대하던 무언가를 실제로 만나게 되는 그런 인생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축복이다. 뒤티유욀이 발칙한 계략을 세우며 걸었을 법한 골목길을 거닐다가 아담한 크레페 가게를 발견했다. 마침 출출했던 터라 허기도 달랠 겸 들어갔다. 9는 클래식하게 베이컨과 치즈 그리고 계란이 들어간 크레페를 시켰고, 나는 달달하게 아이스크림과 생크림, 초콜릿이 올라간 크레페를 시켰다. 우와~ 맛있다! 9는 파리지앵처럼 크레페를 먹어보고 싶었댔다.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내려오는 길에 힘들어서 우연히 지나가던 몽마르트르 순환버스에 몸을 실었다. 9가 혼자 여행할 때 꾸역꾸역 어렵게 올라오면서 발견하고 엄청 기뻤다던 그 아기자기한 거리들을 버스가 구석구석 다 훑으며 천천히 내려가 주었다. 관람차가 따로 없었다. 최근 며칠 중 가장 들떠보였던 9는 연신 쫑알쫑알거렸고, 나는 창밖 경치에 정신이 팔려 있느라, 이따금씩 고개만 끄덕거리며 맞장구쳐 줄 뿐이었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 9가 저장해 둔 맛난 카페를 찾아 가보기로 했다. 일요일에 안 열 가능성도 있으나 그건 우리 운명이었다. 근처에 다가가니 커피 향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다행히 문은 열었구나. 카페 내부는 생각보다 매우 컸고, 그 넓은 공간에 사람들이 꽉꽉 들어차서 두 자리를 겨우 찾아 앉았다. 그 카페의 커피에서는 불맛이 가미된 고소하고 독특한 맛이 났다. 9는 커피맛에 반해 한잔 더 마셨는데, 나중에 영수증을 보니 커피에 각각 투샷이 들어가서 도합 4샷을 마신 거였다. 한껏 카페인이 오른 9는 거의 하늘을 날고 있었다.


비 오는 날의 습기 찬 서점 냄새가 맡고 싶어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서점으로 향했다. 어제 각자 여행할 때 우연히 마주쳤던 곳에 오늘은 둘이 같이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역시 이 냄새야~~ 오늘은 2층 안쪽에서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할머니와 사람들이 모여 티파티를 하는 광경도 볼 수 있었다. 아마도 문학작품에 대한 낭독을 하고 자신의 생각도 나누는 그런 자리인 듯했다. 인간보다 자연의 생물체들이 더 영적일 수 있다는 것과 그래서 우리 모두는 아무것도 모를 수 있다는 것 등의 심오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연세가 꽤 되어 보이는 할머니였지만, 낭독할 때는 설명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온몸의 세포가 할머니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 하나하나에 반응하여 남김없이 모두 빨아들이는 느낌이었다. 정확히 이해했는지 반신반의했음에도 무언가 내 안에서 깨어나고 있음을 인식할 수 있었다. 나오는 길에 포켓 사이즈의 어린 왕자 책 2권을 샀다. 프랑스에서 영어 책이라니. 어린 왕자 불어 버전이 있으면 사려고 했는데, 여긴 영어 책밖에 없단다. 어린 왕자를 언어별로 다 모으고 싶다. 불어 버전 어린 왕자는 영국에서나 살 수 있으려나…(결국 다음 여행지인 벨기에 브뤼셀 중고서점에서 득템 했다.)


   9와 내가 각자 여행을 하던 그날, 나는 이 서점에서 혼자 조용히 앉아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던 공간을 발견했었다. 벽마다 전 세계 사람들이 다 모인 듯 갖가지 언어로 적힌 메시지와 낙서가 가득했다. 그중에 내 눈을 사로잡은 글이 있었다. ‘If you can't have fun, there is no sense in doing it. So Here I came, Paris, a beautiful and fascinating city.’ 이 글을 적은 사람이 파리에 와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가 원하던 재미를 찾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떠나온 이유가 ‘재미없어서’인 것에는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다만 진짜 파리가 아름답고 매력 넘치는 도시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헤밍웨이는 「파리는 날마다 축제(A Moveable Feast)>」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파리에서 미시간 이야기를 썼듯 어쩌면 나는 파리를 벗어난 후에야 비로소 진짜 파리 이야기를 쓸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은 내가 파리를 충분히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파리를 떠난 후에야 알게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도 파리를 떠난 후에야 비로소 진짜 파리에 대해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파리를 떠나던 날, 파리는 우리에게 안녕이라는 말 대신 한 치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장대비를 선물했다. 철퍽거리는 거리를 덜덜거리며 나아가고 있는 캐리어의 뒤에서  흠뻑 젖은 9는 지난번 혼자 파리에 왔을 때도 그렇게 춥고 외로웠다며 여전히 파리가 맞지 않는다고 마지막으로 중얼거렸다. 들을 때마다 거슬렸던 말이지만, 이번만큼은 나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파리는 내게 3가지의 큰 기쁨을 주었으나, 그 기쁨의 9배는 더 될 상처와 혼돈으로 얼룩진 괴로움의 시간 역시 감당하길 강요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지긋지긋한 아홉수의 여정이 끝나면, 성숙하기 위해 감내해야 할 이 가혹한 훈련이 끝나면, 진정 새로운 내가 되어 이 모든 괴로움을 따뜻한 고마움으로 여기게 되길 바라는 건 부질없는 욕심일까.


세차게 내리는 비 속에서 간간히 올라오는 나의 입김은 새하얗게 피어오르다가 이내 자취를 감춘다. 한 손엔 우산을 들고 한 손엔 캐리어를 힘겹게 끌고 가는 9의 뒷모습이 나의 입김에 사라졌다가 다시 그 존재를 드러낸다. 짧은 순간 미안함과 고마움이 교차한다.


  ‘너는 파리를, 파리에서의 시간을, 그리고 나와의 시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9의 기억은 분명 나와는 그 결이 다를 것이다. 9는 내가 아니고 나도 9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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