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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39, 2부 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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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다흔넷 Oct 30. 2022

일상 (2)

9 said

>> 일상 (1)에 이어


다음 날, 밤새 잠을 못 잔 Y의 눈이 퀭하다. 까탈스러움은 물론이거니와 8시간의 수면 시간을 꼬박 채우지 못하면 기력이 쇠약해지는 녀석의 까다로운 성격 탓에 오늘은 그냥 집에서 쉬기로 했다. 침대 속에서 꼼짝을 안 하고 있는 Y를 위해, 그에 비해 최애 나라에 와서 잘 먹고, 잘 자서 텐션이 한창 올라 있는 내가, 나가서 커피를 사오기로 했다. 숙소 주변은 아파트 단지라 마트랑 놀이터, 그나마 셀프 빨래방 외 다른 가게들은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조금 더 멀리 나가 보기로 했다. ‘베니스'와는 또 다른 느낌의 수로들이 계속해서 나왔다. 생선 가시 모양으로 펼쳐진 수로들을 요리조리 구경하며 시내 중심가 쪽으로 조금 더 나가 보았다. 멀리 허름하고 지저분해 보이는 Pub이 하나 보였다. 마침 문 앞에 커피도 판다고 써 있길래 용기를 내어 들어가 보기로 했다. Pub 안에는 민머리에 수염이 덥수룩하고, 온 몸이 문신으로 가득한 덩치 큰 아저씨가 바 건너편에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손님이 들어와도 일어날 생각을 않는다. 


‘헛.. 저.. 여자는 이 시간에 왜 들어왔지. 빠.. 빨리 내 보내야겠어’

‘헛.. 저.. 저런 모습이 하..하이네켄 같은 사람은 아니겠지.’


주인장 아저씨와 난 잠시 대치 상태로 마주 서 있다가 수줍게 서로 필요한 영어만 간단히 주고 받고는 잽싸게 커피 2잔을 받아 들고 나왔다. 워낙에 무너질 듯 허름한 Pub이라 커피의 퀄리티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왠걸 생각보다 꽤 괜찮은 맛에 기분이 좋았다. 점점 더 더워지는 날씨에 뜨거운 커피 2잔을 들고 부지런히 숙소로 돌아와 보니 Y는 여전히 침대 속에서 고개만 빼꼼히 내밀고는 왜 이리 늦게 왔냐고 칭얼거렸다. 난 Y에게 라떼 한 잔을 건네며 그 곁에 앉아 오늘의 바깥 소식을 전해 주었다. 날씨가 점점 더워지는 것 같다, 주변에 가게들은 별로 없는데 근처에 빨래 방이 있으니 나중에 써보면 될 것 같다, 좀 더 멀리 가니까 허름한 Pub이 하나 있는데 주인이 되게 무섭게 생겼는데 친해지면 좀 귀여울 거 같다 등등. 침대 위에서 커피 한 잔씩을 하며 우리는 소소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때 우린 잠시 여행 중이라는 사실을 잊었던 것 같다. 그날 하루 우린 하루 종일 쉬는 날 늘 집에서 하던 그렇고 그런 시시하고도 소소한 일들을 했다.




다음 날도, 다다음 날도 우린 그렇게 비슷한 일상을 보냈다. 가장 편안한 옷을 입고, 화장도 하지 않고 썬그라스만 낀 채 동네 마실 나가 듯 ‘암스테르담' 중심가를 유유히 돌아다녔다. 점심 식사는 세계에서 1등으로 맛있는 후렌치 후라이와 하이네켄으로 해결했다. 이 후렌치 후라이로 말할 것 같으면, 2년 전 아주 우연히 발견한 가게로 그 해 여행을 통 틀어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었다. 그 풍미와 식감은 보통의 감튀와는 전혀 다른 저 세상 맛이다. 하여 이번 여행이 아니었더라도 절대 미각을 가진 Y를 데려 와 꼭 한번 맛보여 주고 싶었던 감튀였다. 드디어 우린 한 손엔 그 후렌치 후라이드를, 다른 한 손엔 하이네켄 캔 하나를 들고 ‘담' 광장에 앉아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 틈에서 그렇게 낮맥을 즐겼다. 여기 저기 걷다가 태양이 뜨거울 땐 길에 보이는 아무 잡화점에나 들러 모자를 하나 사서 대충 쓰고 다니고, 해질 무렵이면 한량들 마냥 강변에 앉아 바쁘게 퇴근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말 그대로 하릴없이 그냥 걷고 그냥 구경을 했다.


‘홍등가'를 지날 때면 우리에겐 뭐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라 그런지 누구의 조언처럼 그다지 무섭지도 위험해 보이지도 않았다. 하물며 언니들과 가볍게 서로 눈 인사도 나누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의 평균 키가 세계에서 가장 크다더니 이 곳 언니들의 덩치도 어마하게 컸다. 그들 틈에 있으니 한 덩치 하는 우리도 쪼꼬미가 된 기분이다. 그렇게 시내를, 거리를 걸어다녔다. 그러다가 카페에 들러 커피 한잔을 마시며 여행과 전혀 상관 없는 얘기들로 두런두런 수다를 떨었다. 네덜란드는 마리화나가 합법적으로 허용된 나라다. 그래서 ‘암스테르담' 시내 한 가운데 가장 큰 거리인 ‘담' 거리를 걸을 땐 사방에서 꼬릿꼬릿한 대마초 냄새가 난다. 이 곳에선 어디서든 대마초를 살 수 있는데, 그 대마초를 파는 곳을 ‘Coffee Shop’ 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자칫 뭣도 모르고 커피를 마시러 ‘Coffee Shop’에 들어 갔다가는 문신으로 뒤덮힌 아저씨로부터 아메리카노 한 잔 대신 마리화나 한 줌을 얻어 들고 나오게 되는 수가 있다. 


‘암스테르담'에서 커피는 ‘Cafe’에서 판다. 특히 우리가 발견한 ‘Filter’라는 카페는 커피 맛과 분위기 등이 우리가 생각하는 딱 그런 ‘암스테르담'을 닮았다. 빈티지 하면서도 모던하고, 무질서한 자유로운 감성이 느껴지면서도 깔끔하고 정돈된 카페였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같은 시간에 그 곳에 들러 커피를 마셨고, 마지막 날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렸더니 주인이 어떻게 알았는지 조용히 좋아요도 눌러주었다. 이처럼 우린 여행자이면서 여행자가 아닌 사람처럼 그냥 그 곳에 있었다. 길을 가다 큰 배낭을 메고 지도를 보는 여행자들 곁을 무심하게 지나치고, 더 이상의 구글 맵도, 여행 팜플렛도 필요 없었다. 우린 여전히 날짜도, 요일도 모른 채 매일을 그렇게 살았다. 


‘암스테르담'에는 예쁘고 유니크한 빈티지 샵들이 많을 뿐더러 신기한 플리마켓도 매일 열리는데, 그 날은 갑자기 뭐에 씌었는지 미친듯이 쇼핑을 하며 온갖 것들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여행 중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계절은 점점 여름으로 가고 있고, 아직 가야할 나라들이 많이 남아 있음에도 싸고 예쁘다는 이유로 겨울용 자켓이며 코트, 가방, 시계, 신발 등을 왕창 사버렸다. 그렇게 양손 가득 쇼핑 백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던 그날 밤, 현타가 왔다. 아, 이제 저 짐을 다 어떻게 하지… 내일이면 떠나는 날이잖아?

 



긴 여행 중에 할 수 있는 일탈이란 특별히 대단한 일들을 한다기보다는 낯선 곳에서 낯익은 일상을 덤덤히 지내보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동안 우린 떠돌이 여행자라는 신분을 잠시 잊고, 집에서 일상적으로 흔히 하던, 그렇고 그런 평범하고 소소한 나날들을 마음껏 느끼며 여행의 일탈을 즐겼다. 여행 중에만 누릴 수 있는 일상이라는 일탈. 문득 내가 여행을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일상이 싫어 여행을 꿈꾸고, 여행을 떠나와서는 싫었던 일상이 일탈처럼 느껴지는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그 답을 이 곳 ‘암스테르담'에 와서야 고흐의 편지 속에서 찾을 수 있었다.


 

치열하게 떠돌아 다니다가도 갑자기 지루해지고, 잘 놀다가도 무의미해지고, 특별한 순간 환호와 희열에 부풀어 올랐다가 낯선 순간 멘붕에 빠지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그래도 계속해서 멈추지 않는다면 이번 여행을 잘 이해할 수 있겠지.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그 속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짐을 싸고, 처음 보는 곳에서 잠을 자며 이 여행을 계속 이어 나가야겠다.


KEEP CALM & CARRY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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