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 said
네덜란드에선 4박 5일을 묵는다. 암스테르담 근교에 독채를 하나 빌려 진짜 예술가처럼 살아보기로 했다. 암스테르담의 예술가로 지내보기.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생각만으로도 나를 설레게 했던 로망이었다. 내겐 와플과 초콜릿으로 점철된 달콤 쌉싸름한 브뤼셀을 떠난 버스가 드디어 암스테르담에 진입했다.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다. 또 다른 버스 22번으로 갈아타고 내리자마자 어떤 한국 여자분이 우리를 맞는다. 우리가 올 경로를 이미 알고 계셔서 내내 기다리셨단다. 큰 키에 여리여리한 몸매를 가지고 계셨다. 이따금씩 불어오는 미풍에 긴 생머리가 흩날리기도 했다. 다소 연륜은 있어 보였고, 괴짜 스타일의 소박하지만 유럽 감성이 묻어나는 옷차림을 한 여자분이셨다. 집으로 가는 길에 굳이 내 캐리어를 가져다가 끌고 가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쉴 새 없이 쏟아내셨다. 처음 만났는데도 참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이 맘에 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숙소에 도착했다. 두근반 세근반 하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그동안 수많은 숙소의 사진빨에 속아서 사실 기대를 많이 안 했는데 문을 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완전 맘에 들었다! 그 언니는 이곳이 영상 관련 작업을 할 때 사용하는 공간이며, 월세를 벌기 위해 가끔 이렇게 민박도 한다고 하셨다. 복층 구조의 집이라 천장이 매우 높아 썰렁한 느낌이 들 뻔했지만, 입구와 구석구석에 허리까지 오는 초록색 화분들이 집 안 분위기를 싱그럽고 생동감 있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리고 집안 곳곳에 꽂혀있는 다양한 주제의 책들에서 주인의 지성과 감성이 묻어났다. 주인 언니의 인성은 방값을 6유로나 깎아주신대서 더없이 묻어났다. 오히려 우리가 오래 묵는데 와인 한 병도 준비 못 했다고 미안해하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주인 언니는 한국에서도 왕성하게 활동 중인 예술가였다. 심지어 꽤 유명한 예술가였다. 에르메스 상이란 것도 타시고, 지금도 그 독특한 개성을 녹여낸 재미있는 작업들을 많이 하고 계신 분이었다. 테이블에 놓인 전시 북클릿에서 주인 언니의 작품들을 간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었다. 그 집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치 내가 예술가인듯한 착각이 들었다. 정말로 맘에 드는 숙소였다. 잠들기가 싫을 정도로. 시간이 가는 게 아까울 정도로. 사람은 환경에 얼마나 영향을 많이 받는 동물이던가. 그래서 내가 숨 쉬고 생활하는 집이 이렇게나 중요한 거다. 암스테르담의 이 숙소는 정말이지, 예술이다.
덜 깬 상태에서 부드럽게 얼굴을 간질이는 햇빛을 느껴본다. 햇빛은 때론 뱀파이어를 송두리째 태워버릴 정도로 강렬하지만, 때론 마치 굿모닝 키스를 해주듯 따스하고 사랑스러운 온기를 전해준다. 창문을 투과해 들어온 그 빛은 맞은편 벽에 창문틀을 마음대로 변형해 기하학적인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길쭉길쭉한 초록색 잎사귀를 가진 키가 큰 식물은 스포트라이트처럼 정면으로 빛을 받아 그 집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 한껏 고양되어 보였다. 반면 어두컴컴한 구석에 놓여있던 동글동글한 잎을 가진 아담한 크기의 또 다른 식물은 애써 질투와 시샘의 기운을 감추고 담담한 듯 보였는데, 시간이 갈수록 저 창을 뚫고 들어오는 빛줄기가 자신에게 점점 가까이 향하고 있음을 알았는지, 자신이 주인공이 될 그때를 기다리는 듯했다. 문득 어제 오래 알던 한 친구가 여행은 잘하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카톡과 함께 연락이 왔다. 여전히 자아 성찰에 대해 다방면으로 깊은 탐구 중인 그 친구는 이번에는 '신지학'이라는 학문에 심취해 있었다. 우리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꽤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그 친구는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내게 많은 용기를 주는 친구이다. 어제도 나의 방황과 고민을 듣고 나서 이렇게 말해주었다. 나를 처음 봤을 때, 내가 굉장히 강렬한 빛이었다고 했다. 그 빛을 앞으로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쓰게 될지 궁금하지만, 그 방향이 운명처럼 자연스럽게 다가올 때가 있을 거라고 했다. 나는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는 미궁 속에 있었지만,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보는 듯했다. 늘 존재하지만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면 그 존재들의 존재는 퇴색되는 것들이 있다. 오늘의 빛은 내게 존재한다. 내게 닿은 이 암스테르담의 빛은 이제 날 깨어있게 한다. 정말 예술이다.
난 어쩌면 전생에 바람의 정령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괴롭고 힘이 들 때마다 바람은 어디선가 나타나 나를 어루만진다. 때론 부드럽게, 때론 시원하게. 물론 가끔은 정신 차리라는 듯 깜짝 놀랄 정도로 내 뺨을 찰싹 때리고 도망가기도 했지만. 언젠가 유난히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힘겹게 걸어오는데, 갑자기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마냥 슬펐고 마냥 울고 싶었다. 바로 그때, 잠잠하던 공기는 적막을 깨고 작은 바람소리를 만들어 냈다. 이윽고 생명력을 부여받은 공기가 흘러 바람이 되었고, 나를 휘감았다. 바람은 사뿐사뿐 다가와 움직임을 만들었다가 잠시 내 주위에 머물면서 함께 있어 주었다. 있는 듯 없는 듯, 닿은 듯 닿지 않은 듯, 바람은 내 옆에서 그렇게 한참을 머물렀던 것 같다. 어느샌가 흐르던 눈물은 마르고, 마음은 촉촉해졌다. 그렇게 나는 바람의 위로를 받았다. 다음 생에는 바람으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오늘은 그때와는 다르지만 여전히 내겐 친구 같은 바람이 불어온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은 어디선가 나타난 바람이 시원하게 식혀준다. 그리곤 늘 그랬듯 인사도 없이 사라진다. 가끔은 더 강한 바람이 되어 힘내라며 우리의 뒤를 밀어주기도 한다. 숙소가 시내와는 다소 떨어진 곳에 있다 보니, 신나게 암스테르담 시내를 쏘다니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힘이 든다. 센트럴 역이 보인다. 그렇다면 이제 집까지 절반 정도 남았다는 뜻이다. 오늘은 약 2만보를 걸었다. 그 정도를 걸으면 발바닥과 골반에 뻐근한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버스를 타면 참 쉬울 일인데, 9나 나나 이상한 고집이 있다. 헤어 나올 수 없는 뚜벅이 여행의 묘미를 안다고나 할까. 하지만 모든 길 위에 모든 발걸음이 마냥 경쾌하고 가벼울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오늘같이 무겁고 힘겨운 발걸음을 애써 떼며 걸어야 할 때, 어디선가 나타나는 고마운 바람은 얼마나 든든한 지원군인지. 암스테르담스러운 오늘의 이 바람, 정말 예술이다.
드높은 하늘에 뭉게뭉게 구름이 피어오른다. 이곳에도 한낮의 열기 속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실루엣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9가 예전에 암스테르담을 홀로 여행했을 때, 정말 충격적일 정도로 맛있었다고 했던 음식이 있었다. 바로 감자튀김! 9는 내가 꼭 먹어봤으면 좋겠다면서 친절히 나를 끌고 여기 감튀 맛집으로 데려왔다. 가게 앞에는 예상대로 엄청 긴 줄이 있었고, 광장에 몰려드는 사람들과 비둘기 떼를 관찰하며 우리는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먼저 주문을 하고 전리품을 획득한 사람들의 의기양앙한 뒷모습을 본다. 드디어 우리 차례다. 우리는 중간 사이즈 감튀 둘에 마요네즈 소스와 vlaamse 마요 소스를 주문했다. 오! 양이 정말 대단하다. 감튀를 받아 들고, 여전히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담담한 여유를 풍기며 으스댐을 감추었다.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고 있다. 맥주 두 캔을 사서 담광장으로 향했다. 중앙 조형물이 그것의 계단에 아주 좁은 면적의 그늘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나는 그 좁디좁은 그늘에 간신히 엉덩이를 들이밀면서 계단에 앉았다. 다행히 직사광선의 강렬함을 좋아하는 9는 굳이 그늘이 필요 없었기에 내 옆에 편하게 자리를 잡았다. 광장엔 많은 사람들이 감튀를 손에 들고 맥주를 마시며 웃고 떠들면서 저마다의 한낮을 즐기고 있었다. 쓸데없이 분주해 보이는 비둘기들은 여전히 오늘의 대박을 기대하며 사람들의 동태를 주시하며 이리저리 기웃거린다. 나를 뚫어질 듯 쏘아보는 한 비둘기의 눈깔이 심히 거슬린다. 내 감튀는 넘보지 말아라. 비둘기들에게 강력한 텔레파시를 보낸다. 9는 이번에도 암스테르담은 역시 감튀라며 찬탄의 말들을 쏟아낸다. 찬란한 감튀들은 고깔 모양의 포장지 속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고, 나의 왼손은 감튀 고깔을 꽉 쥐고 있었고, 나의 오른손은 감튀를 소스에 찍어 입으로 나르고, 중간중간 맥주캔을 잡아 다시 입으로 나르고 있었다. 애써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묵묵히 내게 생명을 전달하고 있는 심장은 부드러운 리듬을 만들어내며 뛰고 있다. 다들 빌어먹게도 각자의 역할을 잘하고 있는 중이었다. 암스테르담스러운 감튀와 맥주의 맛을 한껏 느끼기 위해 몸의 모든 부분이 완벽히 기능하는 이 순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완벽한 조화 속에 피어난 절대 몰입의 순간. 정말 예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