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 said
암스테르담 시내의 길을 꿰뚫고 있는 9는 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골목골목을 잘도 유연하게 빠져나간다. 몇 년 전에 혼자서 암스테르담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고 해도, 9는 나로서는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길 찾기 능력을 가졌다. 신은 모든 인간에게 최소한 하나씩은 남들보다 잘할 수 있는 무언가를 주신다고 한다. 9는 길 찾기 능력을 장착한 채 태어났음이 분명하다. 상대적으로 나의 공간배치 파악 능력(상대적으로 빈약한 나의 길 찾기 능력치에 이름이라도 멋들어지게 달아보고 싶었다, 훗.)은 약간의 주관적인 안쓰러움을 가미해 평가한다고 해도 평균 이하다. 반대로 엄밀한 자기 객관화를 동반해보자면, 나는 심각한 길치인 데다가 심지어 버스를 잘못 타거나 길을 잘못 찾았을 때에도 말도 안 되는 음모이론을 들먹이는 음모이론 신봉자다. 그렇지만 이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신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왜 여기 있어야 할 건물이 저기 있고 저기 있어야 할 길이 여기 버젓이 있냐는 말이다. 가끔 내가 호기롭게 앞장서서 길을 나설 때마다 9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뭘 믿고 앞서서 가느냐, 뒤로 물러서거라.” 이런 얘기를 듣고도 반박하지 못하는 나는 억울함에 분통이 터질 때도 있지만, 어찌할 수가 없다. 그래도 완벽한 내비게이션이라 쓰고 9라고 부르는 존재가 나의 여행 동반자임에 한없이 감사하다. 길을 잘못 들까 봐 연신 예민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9는 암스테르담의 골목길이 생선 가시와 같은 모양이라고 했다. 그래, 그렇구나. 하지만 내겐 그저 꼬불꼬불하게 뒤엉켜 있는 길일뿐이야. 오늘도 마치 하늘로 솟구칠 기세인 양어깨를 들썩거리며 콧노래를 부르면서 9는 앞서간다. 나는 암스테르담 시내에 구석구석 배어 있는 마리화나 향기를 폐부의 구석구석에 깊숙이 찔러 넣으며 따라간다. 몽롱해진다. 정말 예술이다.
스릴 넘친다. 확실히. 바닥에 널브러진 옷 무더기들 사이에서 득템 하는 것은, 9와 나는 여행을 시작하며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시간과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받아들여 보자고 했다. 수도승과 같은 자세로 정갈하게 몸과 마음을 닦는다는 의미로, 각종 의복 등에 맘을 뺏기지 말고 수수히 다니기로 했다. 이는 우리 둘 다 패션에 너무 관심이 많아 짐을 쌀 때도 옷 가짓수를 고민하고 여행 때마다 온갖 패션 아이템과 빈티지 옷들 때문에 캐리어의 무게를 걱정해야 했던 일이 빈번했기 때문이다. 암묵적으로 쇼핑 금지에 동의했던 우리였다. 하지만 여행의 중반에 다다르며 우리는 슬슬 매일 똑같은 옷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결국 암스테르담에서 터져버렸다. 암스테르담은 빈티지의 천국이라더니 과연 그랬다. 스스로 봉인을 해제한 이후, 우리는 눈에 띄는 옷가게들은 모두 순례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 대망의 야외 빈티지 마켓(사실, 주인조차도 어디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 수많은 옷더미가 길바닥에 줄지어 방치되어 있었다.)에 닿은 것이다. 사막의 오아시스가 그러하듯, 우리의 패션에 대한 갈증을 해소해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심해의 밑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물고기가 이따금씩 그 큰 입을 벌려 닥치는 대로 바닥을 훑으며 온갖 플랑크톤, 작은 식물과 물고기들을 모조리 빨아들이곤 하듯이, 나도 오늘 여기서 반드시 승리의 포만감을 느끼겠다는 일념으로 옷 무더기들을 샅샅이 뒤지면서 월척을 기다렸다. 힘겹고 지난한 시간이 흘러갔다. ‘그 끝엔 영광 있으리니...’ 내리쬐는 햇볕에 온 몸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 모든 괴로움의 끝엔 환희의 전리품을 마주할 수 있으리니...’ 드. 디. 어! 나는 암스테르담스러운 오버사이즈 체크 쟈켓과 멋진 야상을 꽉 껴안고 주인과의 유쾌한 협상 끝에 그것들을 약 10유로에 건질 수 있었다. 9도 정말 대박이라며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무속에서는 빈티지 옷이 안 좋은 기운을 가져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 남이 썼던 물건에는 귀신이 붙어있다는 둥, 죽은 사람의 옷은 반드시 그 옷의 주인이 찾으러 온다는 둥, 그래서 그 귀신들이 내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둥. 한때 나도 이 이야기에 혹해서 빈티지를 멀리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귀신이라도 외국 귀신이 그 먼 길을 비행기를 타고 올 순 없을 것 같기도 했고, 더 강력한 나의 아홉수의 기운이 다른 잡기운은 허락하지 않을 것 같은 믿음에, 솔직히 다 집어치우고 그냥 너무 싸고 너무 예쁘니까 암스테르담의 빈티지는 포기할 수 없었다. 광명의 빛을 한 아름 받으며 한껏 충만하고 짜릿한 이 순간, 정말 예술이다.
테가 검고 동그랗다. 9의 똘똘이 안경은. 그 너머에 있는 너는 누구냐. 9는 안경을 쓰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한다. 눈이 너무 나빠서 안경의 렌즈는 3번 압축해도 무게와 두께감이 느껴질 정도인 데다가 결정적으로 렌즈 너머 눈이 실제의 반 이상은 작아지는 바람에 조금 과장해서 분명히 몸은 9인데 얼굴은 더 이상 9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다. 9의 말로는 외모가 바뀌는 것은 그렇다 치고(아니 이게 100%인 것 같다.) 무엇보다 자신감이 급격히 떨어지기 때문에 절대 안경을 쓰고 나갈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런 이유로 안경을 쓴 9를 밖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이제 9도 나이를 먹어서 내려놓을 건 내려놓은 건지, 아니면 어차피 암스테르담은 떠나면 그만이니까 모르겠다는 식인 건지. 그것도 아니면 설마 안경을 쓰고 나온 걸 모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뭐 아무렴 어떠랴. 한낮의 뜨거운 기운이 슬슬 가실 무렵, 편한 옷을 입고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다. 한들거리며 걷다가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에 홀려 그곳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건물의 벽마다 그려진 화려한 그라피티를 감상할 수 있었다. 마침내 다다른 막다른 골목의 끝에는 폐공장을 개조한 바가 있었고, 그 앞 공터에는 감각적인 조형물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수로를 따라 대충 놓인 테이블과 의자들이 보였다.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이 암스테르담스러운 자유로움. 야외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여유를 즐겨본다.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9의 몸 위로 똘똘이 안경을 쓴 얼굴이 웃고 있다. 넌 누구냐. 이제 슬슬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 저 멀리 창연한 하늘 아래로 바알간 노을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루브한 음악을 따라 몸을 움직여본다. 맥주에 취하는 건지, 노을에 취하는 건지. 황홀한 힘에 전복당하는 이 순간, 정말 예술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이었다. 2013년 크리스마스 즈음 9가 내게 선물했던 책의 그 인상적이었던 표지가. 하얀 비둘기가 중산모를 쓴 남자의 얼굴 위에 날개를 편 채로 박제되어 있다. 그 당시 비둘기 뒤에 가려진 남자의 얼굴은 내게 알 수 없는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그래서일까. 난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책의 내용이 기억나기보다는 강렬했던 첫인상의 공포와 두려움이 떠오르곤 한다. 르네 마그리트에게 있어 세상은 ‘상식’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전하려는 것은 한 편의 시라고 했다.
“우주에는 달이 한 개뿐이지만,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달을 본다.
이처럼 밤과 낮이 함께 공존하는 풍경으로부터 우리는 경이롭고 매혹적인 힘을 느끼게 된다.
나는 이 힘을 '시'라 부른다.”
- 르네 마그리트 (René Magritte)
누구나 마음의 서랍 안에 기억을 간직하고 살아간다.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통해 그가 의도한 ‘시’의 힘은 내가 애써 꾹꾹 닫아놓았던 마음의 서랍을 열고 나의 힘들고 불편한 기억을 끄집어냈다. ‘결국은 마주해야 해소되는 건가. 굳이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감정의 회오리는 나타났다 사그라지지 않던가. 신산한 세상살이. 겁쟁이처럼 도망치는 게 아니라 단지 마주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라고 하면 안 될까. 무겁고 무겁게 가라앉아 발을 디딜 수 있어야 마침내 도약할 수 있다고? 개소리다. 이 무거움을 참을 수 없어. 아니, 참고 싶지 않아.’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제목과는 달리 내겐 책도 책의 내용도 모두 무거웠다. 무릇 모든 예술작품과의 만남에는 감상자의 현재 상황과 가치관이 투영되곤 하듯 어쩌면 그때는 나의 존재 자체가 너무 무거웠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는 좀 가벼워진 걸까. 암스테르담의 이 작은 서점에서 그 그림과, 아니 내 안에 꽁꽁 감춰둔 그 기억과 다시 마주한다. 우연을 가장해 나타나는 숙명과도 같은 필연. 이제 때 묻은 서랍장을 정리할 때가 된 것 같다. 박제되었던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와 드디어 그것의 새하얀 날개를 펼치고 날아간다. 정말 예술이다.
담백하게 마무리하고 싶다. 이 여행을. 아홉수 따윈 던져버리고. 암스테르담에서는 일상에서 벗어나 정말 예술가처럼 지내보고 싶었다. 대단한 일탈을 꿈꾸며 설레었지만, 의외로 내가 감동받고 행복했던 순간은 무심코 지나치곤 했던 일상의 단편들을 재발견할 때였다. 당연한 듯 숨 쉬며 살아가는 순간순간마다 예술은 살아 있었다. 예술은 멀리 있지 않았다. 담담하게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 마법 같은 삶의 순간들이 펼쳐져 있음을 느낀다. 내가 인식하지 못하면 의미와 가치는 죽어버린다. 깨어있자. 삶의 마지막 그 순간까지. 인생은 정말 예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