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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39, 1부 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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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다흔넷 Oct 02. 2022

운명의 토마토 스튜

Y said

   이번에도 역시 탈이 났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 프라하에 도착하자마자 탈이 났다. 나는 어느 시기, 어느 누구와 어느 여행지를 가든 초반엔 꼭 배앓이를 한다. 대략 며칠 인고의 시간을 보내면,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한결 몸이 가벼워지고 여행에 최적화된 상태가 되곤 했다. 이상하게도 항상 그랬다. 왜 자꾸 반복되는 것일까. 어쩌면 무심결에 스쳐 보냈던 시간들 속에 내가 알아채지 못한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던 것은 아닐까. 스스로 해묵은 삶의 껍질을 깨기 위한 여정의 기로에서 늘 만나게 되는 이 배앓이는 내게 어떤 어떤 의미를 주고 싶었던 걸까. 어쩌면 우주는 배앓이란 시련을 통해서 더 큰 세상을 품기에 모자람이 없는 나로 거듭나길 바랐던 건 아닐까. 그러니까, 마치 영웅 신화에서 성공적으로 고난과 시련을 극복한 자만이 마침내 위대한 영웅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이 이쯤에 미치자, 내가 더 미친 건지 난 자꾸만 반복되는 배앓이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작가이자 신화학자인 조지프 캠벨은 말했었다. 전 세계의 영웅신화는 출발-입문-귀환’이라는 공통 경로를 가진다고. 그리고 그 영웅신화에서 개개인은 일종의 ‘통과의례’를 거치면서 진정한 영웅으로 성장하게 된다고. 그러니 나의 인생의 테에 켜켜이 쌓여온 그 ‘배앓이’의 시간들은 미지의 세상으로 도약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의식적인 통과의례와 같았던 것이다. 어쩌면 영웅 신화 속 주인공이 우연히 만나게 되는 고난과 시련이 결국은 한 영혼의 성장을 위해 필연적으로 준비된 우주의 은총이었던 것처럼. “이런 멍청이! 그걸 이제야 깨달은 거니?”라고 우주가 내게 질책하는 것만 같았다.


   그나저나 이러고만 있을 때가 아니다. 신화 속 영웅이고 뭐고, 극복이고 뭐고 당장 이 고장 난 육체의 허약함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아무리 대단한  영웅이라도 뭐라도 먹긴 먹었을 거 아닌가. 고난과 시련 속 영웅의 정신과 육체를 보듬어 줄 만한 가장 적합한 음식은 무엇이었을까. 문득 토마토가 떠오른다. 토마토의 이름은 토마토, 거꾸로 해도 토마토이다. 모든 영웅신화에서 주인공이 시련을 극복하고 영웅이 된 후 회귀하는, ‘결국 시작과 마지막은 같다.’는 그것의  맥락과 궤를 같이 하는 토마토. 풋토마토에서 새빨간 토마토로의  성숙한 변화가 영웅신화 속 풋내기로 시작했던 주인공이 빨갛게 농익은 영웅으로 귀결되는 그의 여정과 어쩜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나. 그러니 영웅에게는 단연코 토마토가 제격이다. 환난의 시기에 마침 운명의 ‘토마토’가 떠오른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잴 필요도 없이 내게도 토마토가 딱이다. 역시 모든 것이 완벽해.


   그렇다면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다. 토마토를 향해 진격하자. 그래, 내 영혼의 '토마토 스튜'! 너로 정했다!! 9의 속박과 굴레를 떨쳐내기 위해, 내게 마련된 이 시련을 멋지게 극복하기 위해, 그리하여 내 인생의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나기 위해!!! 운명의 토마토를 향한 강렬한 욕구가 나를 휘감고 있었다.




   시차에 적응을 못한 탓인지, 살아야겠다는 본능이 의식을 애써 깨웠는지, 새벽 5시에 일어나자마자 나는 미친 듯이 검색 신공을 발휘하였고 얼마 안 되는 거리에 대형마트인  Tesco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은 9는 길치인 나를 혼자 보내는 것이 못내 걱정이 되었는지, 아니면 혹시 내가 사라져 남은 여행을 홀로 헤쳐나가야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귀찮아졌는지, 어쨌든 고맙게도 동행해 주었다.


  영웅신화 속에서 모든 영웅들은 귀인을 만나게 된다. 그 귀인들은 어쩌면 그렇게 하나같이  적재적소에 나타나고, 어쩌면 그렇게도 절묘하게 영웅이 어려운 퀘스트들을 헤쳐나갈 때마다 꼭 필요한 도움을 주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지금 이 순간 9는 내게 귀인일지도 모른다. 마침내 이 9 프로젝트로 명명된 여정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존재.


   하지만 지금 9는 말이 없다. 그저 그녀가 세운 가장 합리적인 경로에서 내가 이탈할 때면 내가 바로 갈 수 있도록 묵묵히 끌어주고, 이따금씩 좋은 배경이 있으면 멈춰 세워 찰칵찰칵 사진에 나를 박제할 뿐. 내겐 한없이 앙다문 무뚝뚝한 귀인. 그래도 넌 나만의 구 ㅣㅇㅣㄴ. 생경한 거리, 익숙지 않은 사람들의 옷차림에 눈을 빼앗길 새도 없이 발걸음을 재촉한다. 지금 이 순간 나의 관심은 오로지 하나. 시급히 영양을 보충하여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통과의례의 시간들을 당당히 이겨내는 것.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퀭한 얼굴의 9는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어 버렸다. 이제부터는 나만의 숭고한 시간. 재료들을 재빠르게 스캔하면서 머릿속으로 요리의 순서를 그려본다. 감자는 제일 무겁고 존재감이 큰 녀석이라 부드럽고 포실포실하게 익으려면 그만큼 시간이 오래 걸린다. 껍질을 사악 사악 벗기니 뽀얀 속살이 그대로 드러난다. 드문드문 음푹 패어있는 보조개들이 은근슬쩍 나를 유혹하지만 과감히 도려낸다. 깍둑깍둑 썰어서 냄비로 풍덩. 다음은 오렌지색 당근을 살살 다듬어 매끈하게 만들고 난 후 다시 숭덩숭덩 썰어서 냄비에 풍덩. 양파의 껍질을 한 꺼풀 벗기니 하얗디 하얀 나머지 눈이 부실 정도이다. 그 찬란함을 찬탄하며 넋 놓고 있기에는 슬슬 눈이 매워지기 시작하므로, 과감히 숭덩숭덩 썰어서 냄비로 풍덩. 냄비 안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재료들이 귀엽기만 하다.


   이제부터 진정한 쇼타임! 불을 올리고 냄비 바닥에 올리브유 회오리를 능숙하게 그리며 둘러주었다. 냄비가 달궈지고 재료들이 부서질세라 살살 볶아준다. 앗차! 순간 냉장고에 넣어둔 소고기 생각이 떠오른다. 핏빛 소고기는 자신의 존재감을 잃어버려 다소 화가 난 듯 보였다. 붉으락붉으락. 괜찮다. 큰 실수는 아니니까. 살살 달래 가며 부드럽게 소고기를 숭덩숭덩 잘라서 다시 냄비로 풍덩. 경쾌한 치익치익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들린다. 그 녀석의 화를 좀 가라앉혀 주고 다른 채소들이 더 잘 익도록 도와줄 겸 냄비에 물을 좀 부어준다. 물이 끓어오를 때쯤, 토마토소스를 부어준다. 진짜 토마토를 좀 넣어주면 더 좋았을 테지만, 괜찮다. 더 풍성한 향미를 위해서 허브들도 넣어주면 더 좋았을 테지만, 괜찮다. 통후추도 좀 넣어주면 더 좋았을 테지만, 괜찮다. 진짜 괜찮다. 모든 재료들을 정성스럽게 뒤섞어 가면서 보글보글 끓여낸다.


   시큼한 향에 몽롱해짐을 느낀다. 잇달아 마음이 조급해진다. 폭발적인 에너지를 품었던 용암이 부글부글 기포를 토해내며 포효하듯, 토마토의 붉은 기포들은 그들의 에너지를 과시라도 하듯 광란의 춤을 춘다. 시간이 꾸물꾸물 기어가는 듯하다. 몽롱해진 의식 사이로 ‘이 세상은 철저히 씨실과 날실처럼 모든 것들이 우주의 완벽한 계획에 의해 이루어진다. 인생은 모든 시작과 끝의 교집합, 나는 지금 어디쯤 있는 것일까...’와 같은 질문들이 스멀스멀 밀려 오지만, 그것들을 헤아리기엔 내게 감당할 수 없는 극도의 허기가 쓰나미처럼 밀려온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시간은 더 이상 시작을 미루면 안 되는 시간이다. 가스레인지의 불을 끄고 내 마음의 불을 지핀다. 식사를 시작할 시간이다. 아니 그전에 아주 중요한 순서가 남았다. 완성된 토마토 스튜 위에 살포시 모차렐라 치즈를 듬뿍듬뿍 올려준다. 시간이 멈춘 듯 눈을 감고 머릿속에 완성된 황금빛 토마토 스튜를 그려본다. 그리고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눈을 떠 보니 머릿속에 그렸던 그 토마토 스튜가 내 두 눈앞에 있다. 행복하다. 식탁 위에 놓여 있는 토마토 스튜를 본다. 그 옆에 곁들여진 빵은 또 얼마나 은혜로운지. 드디어 프라하에서의 첫 끼니를 만난다. 녹아내리는 황금빛 치즈와 생명력 가득한 붉은 토마토 스튜가 뒤엉킨 한 스푼을 떠넘겨본다. 온몸의 세포가 반응하며 내게 기운을 북돋워 준다. 그 순간 나의 말문은 열리고 그제야 비로소 난 생각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 생각한다. '내가 프라하에 왔구나!'

운명의 토마토 스튜와 친구들


  


   완벽히 기운을 차린 나는 어떤 상황에도 방실방실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고, 프라하의 남은 일정을 일사천리로 소화할 수 있을 만한 넘치는 활력을 장착할 수 있었다. 비록 예상치 못한 칼바람에, 동경해 마지않던 ‘프라하의 봄’은 온데간데없었지만, 프라하에서의 따스한 기억들은 프라하의 블타바 강이 그랬듯 여전히 내 안에 잔잔하게 흐르고 있다.


       고풍스럽고 우아한 카페 루브르에서 익살스럽게 아인슈타인과 카프카 코스프레를 하며 마시던 그 아침의 라테, 

       우연히 발견한 사랑스러운 발드슈테윤스카 정원의 따사로운 햇살과 싱그러운 바람이 주던 그 오전의 여유, 

       그 유명한 카를교 위를 걸으며  살짝 상기된 표정 속에 숨길 수 없었던 설렘, 

       파랗고 쨍한 하늘 위로 피식피식 새어 날아가던 웃음, 

       프라하성으로 힘겹게 걸어 오르던 우리를 달콤하게 응원해 주던 귀여운 진저맨 쿠키,

       캄파섬 '존 레넌의 벽'과의 조우에 두 눈이 촉촉해지던 비틀스 덕후 9와 ‘존 레넌 펍’에서 존 레넌의 음악을 들으며 마음까지 촉촉해지던 그 한낮의 말랑말랑한 감성,

       하릴없이 멍때리던 시간들 사이로 순간순간 저며들던 해맑은 농담,

       너구리를 잡을 듯 매캐한 연기가 자욱한 식당에서 주문한 ‘로스트 덕’의 맛을 '한여름에 농구하고 들어온 남자애 겨드랑이 핥아먹은 느낌의 암내가 났다.'라고 표현했던 9 때문에 배꼽이 떨어질 듯 깔깔거리며 웃었던 그날의 저녁,

       프라하의 마지막을 아쉬워하며 그날도 2만보를 꾸역꾸역 넘게 걷다 만난 아름다운 일몰의 잔상,

       차갑고 상쾌한 맥주로 몸과 맘을 헹구고 잠들기 직전까지 오늘의 보람찬 감상과 내일의 벅찬 기대에 대한 수다로 꽃을 피웠던 프라하의 그 깊은 밤들,


그 모든 소중한 시간들이 내게 오롯이 남아 흐르고 있다.




   언제 또 프라하에 올 수 있을까. 다시 또 돌아올 아홉수에 이곳을 방문하게 되면, 그때의 나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일까. 그리고 그때의 나는 진정한 ‘프라하의 봄’을 맞을 수 있을까. 무수히 많은 질문들을 뒤로한 채, 나는 프라하에서 자유롭게 먹고 마시고 그리고 더 자유로운 나를 만나게 해달라고 열렬히 기도했다.  9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9의 굴레를 떨치기 위해 호기롭게 떠났던 여행의 첫 도시, 남은 여정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를 내게 부여한 도시, 고난과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아낌없이 양분과 생명력을 채워준 도시, 나는 프라하를 그렇게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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