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said
9 Project_by 9
민중은 탱크를 몰고 체코 광장에 들이닥친 소련군에 격분했고, 시위는 들불처럼 번져갔다. 토마스와 테레사도 바츌라프 광장의 한 복판에 서 있다. 열심히 소련의 만행에 대한 사진을 찍고 역사를 증거 하던 테레사는 그러나 그녀가 가진 힘이 너무나 미약하다. 사회의식이 점점 더 강해지지만 결국 둘은 견디지 못하고 새 삶의 출발을 위해 스위스 제네바로 망명한다. 망명 생활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가 점점 약해져 감을 느끼던 테레사는 결국 편지 한 장을 남기고 다시 프라하로 돌아간다.
“나에게 삶은 이리도 무거운데, 당신에게는 너무도 가벼워. 이런 가벼움과 방종을 참을 수가 없어.”
테레사의 소중함을 깨달은 토마스는 고민 끝에 체코로 재 입국한다. 다시는 나갈 수 없다. 여권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공산 치하의 구체제가 다시 강화되면서 예전에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 칼럼을 썼던 것에 대한 보복이 들어오고, 전향서를 쓰라는 압박에 굴복하지 않은 토마스는 재능 있던 의사에서 청소부로 전락하고 테레사는 다시 바텐더로 일한다.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가 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 한 내용이다. 소설 제목처럼 지나치게 무거운 사람에게 가벼운 사람은 성에 차지 않는다. 반면 가벼운 사람에게 무거운 사람은 너무도 버겁고 부담스럽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 내가 그랬다. 몇 달씩 체불되어 쌓여가는 밀린 월급 앞에 아무런 대책이 없었던 난 무력하게 반복되는 일상만큼씩 하루하루가 무거웠고, 그 무게는 결국 내 일상을 짓눌러 삶의 동력마저 잃게 만들었다. 그 상실의 속도만큼 생활은 무력해지고, 그 무력감이 더해갈수록 나의 사고는 한없이 가벼워져 가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아무 생각도, 아무 감정도 없이 무력해진 본능에 몸을 맡긴 채 그저 먼지처럼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때 Y의 제안은 (그 속내가 무엇이었든) 나에겐 그 자체로 충분한 명분이었고, 반박할 수 없는 납득이었다. 테레사가 그랬던 것처럼 도무지 가볍기만 한 이곳에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테레사가 그랬던 것처럼 ‘프라하'로 떠났다. 테레사는 ‘프라하'로 돌아갔고, 나는 ‘프라하'로 떠나왔지만 우린 둘 다 이곳에서 가벼워져 버린 존재의 무게를 되찾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2016년 4월 19일 13시 09분, 프라하행 비행기 앞바퀴가 땅 위를 벗어나 하늘로 올랐다. Y의 9 프로젝트의 진짜 속내를 알아버린 그로부터 11시간 후, 나는 체코 프라하 공항에 도착했고, 도착한 그날도 여전히 2016년 4월 19일이었다. 떠나온 날짜는 그대로였지만 떠나온 거리는 무려 8,249km나 떨어진 곳이었다. 4월 중순의 프라하는 봄보다는 겨울에 가까운, 내가 기대한 따뜻한 프라하의 ‘봄'과는 달랐다. 게다가 우리가 도착한 날은 하늘에선 부슬부슬 비가 내렸고, 그 밑으론 검은 구름이 낮게 깔린 채 바람까지 더해져 무척 차갑게 느껴졌다. 이 예상치 못한 날씨를 대비하기엔 우리의 옷차림은 한없이 가벼웠고, 대부분의 현지인들은 모두가 무거운 코트와 점퍼를 입고 있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입국 심사를 마치고 공항 바로 앞 버스 정류장에서 Na Knizeci행 191번 버스를 탔다. 공항에서 시내까지 32CZK, 우리 돈으로 약 1,550원 정도니 유럽 국가 치고는 물가가 매우 싼 편이다. 약 한 시간을 달려 마지막 종착역에 내렸다. 한국에서부터 구글 스트릿 뷰를 통해 주변 거리들을 미리 보고 갔던 터라 숙소 찾기는 수월했지만 울퉁 불퉁한 유럽 돌바닥 위로 23kg이 넘는 캐리어를 끌고 가는 일은 예상치 못한 날씨와 마찬가지로 험난하고 힘들었다. 마침내 예약한 아파트에 도착했고 벨을 누르자 젊은 청년 하나가 내려왔다.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떠밀려 뒷걸음질치고 말았다.
뭐지, 저 잘생김은!
그의 이름은 Ondra. 나이는 20대 초반으로 프라하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학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180cm가 훨씬 넘는 훤칠한 키에 금발의 귀여운 곱슬머리와 하얗고 작은 얼굴로 땀을 뻘뻘 흘리며 23kg짜리 캐리어 2개를 4층까지 들어다 주고도 연신 방긋방긋 웃으며 집 안내와 주변 관광지를 알려주는 Ondra는 말하는 내내 잘 생겼다. 11시간의 비행과 8,249km의 거리, 23kg의 캐리어 무게로 육체적 피곤함은 물론 굳이 한국에서부터 바리바리 싸가지고 온 정신적 무력감까지, 이것 저것으로 잔뜩 무거웠던 나의 몸과 마음이 한순간 아름답고 잘생긴 것 앞에서 한없이 가벼워지고 있었다. 언뜻 돌아본 Y의 얼굴에도, 그리고 내 얼굴에도 드디어 미소가 번진다. 역시, 예쁘고 아름다운 게 세상 최고다.
‘여행은 살아보는 거’라는 Airbnb의 캐치프레이즈에 맞게 Y와 난 여행을 왔다고 유난을 떨지 않기로 했다. 관광지를 쫓아 시간에 쫓겨 돌아다니지 않기, 알람 소리가 아닌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기, 지도 없이 발길 닿는 곳 위주로 걸어 다녀 보기, 맛집보다는 현지 재료로 음식을 해 먹기 등등. 사실 나는 ‘식'에 대한 욕구가 그다지 많지 않은 편이라 음식을 사 먹든 집에서 해 먹든 그다지 중요한 사항은 아니다. 내게 ‘식'이란 그저 생존을 위해 턱관절을 사용해 음식물을 씹는 행위일 뿐이며, 허기짐을 해결하기 위해 하루 세 번 치러야 할 기본적 의식일 뿐이다. 하지만 Y는 달랐다. 그의 우주의 중심엔 ‘음식'이 크게 자리 잡아 있고, 그의 행동과 사유는 오직 ‘음식'을 위해 움직이는 그런 아이다. 그는 먹고 싶은 음식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먹어야 하고, 최악의 조건에서도 음식만큼은 최선으로 맛있어야 하며, 그 어떤 바쁜 일에도 다음 한 끼는 미리미리 생각해 두어야 한다. ‘음식'을 향한 Y의 이런 무거운 경건함이 ‘음식'에 대해 한없이 가벼운 내게는 종종 과하고 부담스럽다. Y의 이런 참을 수 없는 ‘음식'에 대한 열정은 ‘프라하'에 도착한 다음 날 새벽부터 시작되었다. ‘프라하'에 도착한 첫날 밤 Y는 감기 기운에 오들오들 떨며 아파했고, 뭐라도 먹으면 좋으련만 입맛이 없다며 기념비적인 여행 첫날의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혼자 먼저 잠자리에 들어버렸다.
“나 내일 스튜 먹을 거야."
잠자리에 들기 전 Y가 조용히 읆조린다. (갑자기...?) 일단 아픈 아이를 재운 후 긴 비행과 시차로 조금 피곤하긴 했지만 혼자 숙소 밖을 나와 주변 거리를 좀 걸었다. 불과 하루 만에 서울에서 8,249km나 떨어진 이곳에 내가 와 있다는 사실에 늦은 밤 아무것도 없는, 그저 평범하고 한산한 거리의 풍경들이 내겐 모두가 자극이었다. 어머 체코 쓰레기통! 어머 프라하 가로등! 어머 유럽 신호등! 세상 밖을 처음 나온 사람마냥 주변의 흔히디 흔한 사물에도 연신 눈빛이 초롱초롱해진다. 이국적인 감상은 잠시.. 이내 아무도 없는 거리가 조금 무섭기도 해 금방 숙소로 돌아오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여행 첫날밤을 치르는 의식치곤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Y의 말이 가볍게 스치듯 흘려들을 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낯선 잠자리에 시차까지 있어 제대로 못 자고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 무렵 새벽 5시, Y가 맞춰놓은 알람이 울렸다. 아니 여행까지 와서 뭐하는 짓인가 싶어 순간 짜증이 확 올라오는데 Y가 벌떡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뭐야, 왜 일어났어? 몸 괜찮아?”
“나 토마토 스튜 먹을 거야."
“... 어? 지금?”
“어, 나 토마토 스튜 먹을 거야."
어제부터 반복적으로 내뱉던 그 말. 내가 무심히 흘려 들었던 그 말. 프라하에 도착해 지금까지 오직 그 말만 하는 Y는 매우 진지해 보였고, 그 진지함의 무게에 눌려 더 이상 난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알고 보니 어제 일찍 자러 들어간 Y는 숙소 근처 마트의 위치와 오픈 시간을 미리 검색해 둔 것이다. 마트의 오픈 시간은 새벽 5시 반. 도착한 지 24시간도 되지 않은 낯선 이 도시 밖을,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이 시간에 혼자 내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대체 뭔데 저렇게 진지한 거지? 그래, 나가자. 먹고 싶다잖아.
프라하의 새벽 5시는 굉장히 춥고 우중충했다. 숙소 앞 거리는 어젯밤처럼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이 한산했다. 구글 지도를 따라 큰길로 나서니 저 멀리 무채색의 두툼한 점퍼를 입은, 알싸한 새벽 날씨로 깃을 한껏 올리고 웅크려 모여 있는 한 무리의 노동자들이 새벽 첫 차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그들도 이 시간, 이 날씨에 후드티 하나만 입고 돌아다니는 동양인 여자 둘을 보는 건 처음이라 이상하다 싶었는지 지나가는 우리를 빤히 쳐다봤다. 춥기도 추웠지만 덩치 큰 동유럽 사람들 사이를 뚫고 지나가려니 괜히 위축이 되어 우리는 더욱 웅크리며 걸었다. 드디어 길 건너 마트가 보였고, Y의 정보대로 이제 막 문을 연 모습이었다. 어제의 골골대던 모습과 다르게 Y는 신이 난 듯 스튜 재료를 바구니에 열심히 담더니 그 와중에 와인 한 병도 빼놓지 않는다. 술까지 챙기는 거 보니 다 나았나 보다. 그렇게 새벽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쓰러지듯 다시 잠자리에 들었고, 얼마쯤 지났을까 잠에서 깨 일어나 보니 Y는 이미 거하게 스튜 한 사발을 잡수시고는 거실 소파에 앉아 뒤늦게 여행의 감성에 젖어 와인 한잔을 하고 있었다. 막 잠에서 깨 아까 마트에 갔던 것이 어제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꿈이었는지 모를 만큼 비몽사몽 한 나를 식탁 앞에 앉히더니 손수 스튜 한 사발 내어준다. 스튜의 기력과 와인의 취기가 한껏 올라온 Y는 마트에 갔다 온 건 역시 신의 한 수였다는 둥, 자기가 정보 하나는 기가 막히게 찾는다는 둥, 근처 마트가 자기 맘에 쏙 든다는 둥, 자기가 어제부터 그렇게 울부짖던 바로 그 맛이었다는 둥, 영웅에겐 역시 토마토라는 둥 (뭐라는 거야) 입안이 까슬해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내 앞에서 쉼 없이 쫑알거렸다. 그렇게 Y의 유럽 감기는 한 끼에 다 나았고, 덕분에 나의 시차 적응은 망했다.
Y의 열정적인 ‘음식' 사랑 덕분에 대부분의 식사는 직접 해 먹었지만 1끼는 체코 음식으로 사 먹기도 했다. 프라하에서 처음 먹은 체코의 첫 전통 음식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무작정 찾아 들어간 현지 식당에서 Y는 메뉴 고르기에 신중했다. 어김없이 찾아온 Y의 무거워질 시간. 서울에서든 프라하에서든 메뉴를 고르는 Y의 태도는 참 한결 같이 진중하다. 일단 맥주 한 잔을 시키고 Y의 진한 시간을 기다려줬다. 하지만 한없이 기다려 주기엔 내 배가 너무 고팠고, 어차피 처음 먹어보는 거면 다 거기서 거기라며 감히 '음식'에 가벼운 내가 Y를 채근해 ‘체코 전통 요리’라고 쓰여있는 Roasted Duck을 시켜보자고 했다. Roasted란 요리법에 Y는 약간 의심스러워했지만 그 역시 배가 고팠던 터라 내 주문에 별로 토를 달진 않았다. 맥주를 반쯤 마셨을 때쯤 드디어 이름을 알 수 없는 체코 전통 음식 Roasted Duck이 나왔고, 그것이 우리의 식탁 위로 내려앉는 순간 나의 코 끝을 스치는 음식의 향미에서 고등학교 시절 어느 8월의 5교시 교실이 떠올랐다. 남녀공학을 나온 사람들은 알 것이다. 한여름 뙤약볕 밑에서 한바탕 축구를 하고 벌게진 얼굴로 숨을 헐떡대며 교실로 뛰어 들어오는 땀범벅이 된 무리들에게서 나던 그 냄새를.. 그것과 똑같은 냄새를 ‘먹으라고 내 준 음식’에서도 맡아볼 수 있게 될 줄이야. 내 비록 ‘식'에 대한 감정은 없다지만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은 분간할 줄 안다. 내 비록 뭐라도 배만 채우면 되는 하찮은 식성을 가졌지만, 고기를 씹을 때마다 입안 가득 풍기는 청소년기의 남성 호르몬이 육즙처럼 흘러내리며 풍겨오는 겨드랑이 암내는 날 극대노하게 만들었다. 물론 프라하에도 맛 좋은 음식들은 있었다. 캄파 섬 ‘존 레넌의 벽' 앞에 위치한 John Lennon Pub에서 마신 체코 맥주 Urquell은 비록 맥주 전문 펍은 아니었지만 현지에서 마시는 오리지널 맥주라는 자부심과 펍 안 가득 흐르던 비틀스의 음악이 더해져 그 맛과 분위기는 기가 막히게 좋았고, 맥주뿐 아니라 암내 오리의 실패 이후 Y가 열심히 검색해 찾아낸 올드 타운 근처 U Parlamentu에서 먹은 체코식 Koleno와 Goulash는 내게 새로운 음식을 찾아 맛보는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기 충분했다.
우리의 숙소는 시내와 조금 떨어져 있어 매일 블타바 강변을 따라 프라하 시내 구경을 하다 오곤 했는데, 어느 날은 카를교 근처 Tricafe에서 라테 한 잔을 하며 카페 안 사람들을 구경했다. 나는 요일이 없는 여행자이지만 그들에게 오늘은 평범한 수요일이었고 여느 평일처럼 바쁘게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매일 아침 나를 기다리던 출근 기록기가 없다는 사실이, 점심시간이면 우르르 백반집으로 몰려가 통일된 음식을 주문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퇴근 후 번아웃 상태로 저녁 시간을 보내도 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그저 행복했다. 그러다 가끔 프란츠 카프카와 아인슈타인이 자주 찾았다던 Cafe Louvre에 들러 카푸치노를 마시며 그들이 앉았던 자리가 어디였을까 하는 상상을 하며 요일을 넘어 시대를 초월한 일상의 여유를 누려보곤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보던 쓸쓸한 석양과 화려한 야경의 볼타 강,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프라하 성과 명성만큼이나 관광객들로 가득했던 까를교, 21세기에도 여전히 12시면 울리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 시계의 종소리와 ‘존 레넌의 벽' 앞에서 듣는 버스킹 소리 그리고 마치 중세 어디론가 타임 리프 해 데려다준 것만 같은 올드타운 광장과 공산체제에 맞서 ‘프라하의 봄'을 위해 수만 명의 시민들과 함께 테레사와 토마스가 서 있던 바츌라프 광장까지. 내가 본 ‘프라하'는 자신의 존재 의미를 되찾기 위해 돌아간 테레사의 목적지답게, 운명의 부조리와 인간의 불안한 존재를 통찰했던 카프카의 고향답게,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들이 함께 공존하는 영원한 재귀의 도시였다. 1968년 계절의 체감마저 착각하게 할 만큼 뜨거웠던 ‘프라하의 봄'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1987년 ‘벨벳 혁명'이 있기 전까지 프라하 시민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믿거나 바라지 않는 환멸의 삶을 살았을지 모른다. 나 역시 이번 한 번의 여행으로 고단했던 삶의 무게가 깃털처럼 가벼워지고, 죽었던 존재가 다시 되살아나는 기적 같은 반전의 드라마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저 프라하 시민들이 바라던 체코 공화국의 탄생이 결국 10년이 지난 후에야 무혈의 ‘벨벳 혁명’으로 이루어졌던 것처럼, 비록 지금 나의 삶이 조금은 무거울지라도 훗 날 언젠가는 붉은 빛깔의 폭신한 ‘벨벳 카페트'처럼 포근히 가벼워지길 바라 볼뿐.
반면 조금은 무거워져도 좋을만한 또 다른 숙제도 생겼다. ‘음식’을 대하는 Y의 묵직하고 경건한 태도 덕분에 여행 내내 나는 맛있는 음식이 주는 행복을, 새로운 맛을 느껴보는 기쁨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물론 내 가벼운 식성이 어느 날 갑자기 진지하게 바뀌진 않겠지만 적어도 Y와 함께 여행을 하는 동안만큼은 ‘음식'에 대한 나의 태도도 조금은 진지해져야 하지 않을까? 무거운 사람에게 가벼운 사람은 성에 차지 않으니까. 적어도 식사 때마다 이런 소리는 듣지 않아야 하니까.
“나에게 토마토 스튜는 이리도 소중한데, 9 너에게는 너무도 가벼워.
이런 가벼움과 방종을 참을 수가 없어. 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