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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39, 1부 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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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다흔넷 Sep 18. 2022

아홉수의 저주

Y said

   내년이면 또 나이가 9로 끝나는 아홉수의 해이다. 한두 번 겪은 시간도 아니건만, 유독 올해는 생각이 많고 자꾸 침잠하려고만 한다. 물리적인 무게가 늘어서일까. 몸무게 뒷자리도 9에서 왔다 갔다 한다. 더 불안하게... 문득 아홉수의 해마다 나를 괴롭혔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간다.


9살,

생애 처음으로 내 살이 찢어져 피가 철철 흐르던 충격적인 광경을 목도했다. 이때 생긴 트라우마로 내 몸에는 피와 연관된 매우 공포스럽고 불편한 느낌이 내장되었다. 피를 볼 때마다 순식간에 오금에서부터 뒷목까지 흐르는 저릿함, 이내 나른한 듯 몸에 힘이 빠지면서 피보다 더 붉은 피가 뜨겁게 녹아내리는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을 느끼게 되었다.


19살,

말 그대로 ‘고3병’에 걸렸다. 이유를 알 수 없이 몸의 여러 부분에서 동시다발적인 통증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도무지 무엇에도 집중하기가 힘든 흐릿하고 멍청한 뇌가 제일 문제였다. 답답해서 찾아 간 병원에서는 예민한 고3이기 때문에 겪을 수 있는 신경병이라고만 했다. 엄마 손에 이끌려 어렵게 수소문해 찾아간 어느 무당은 신병이니까 신내림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29살,

지독한 우울증이 찾아왔다. 사람들 사이에서 가면을 쓰고 애써 노력하여 희미한 웃음을 짓는 것도 지쳐갈 때쯤이었을까. 홀로 시간을 보낼 때마다 고약한 정적이 찾아왔고, 도무지 근원을 알 수 없는 절망감에 몸서리치며 울어야 했다. 심연을 알 수 없는 암흑의 바다 -밤에는 홀린 듯 알코올이 최면을 걸고 낮에는 쏠린 듯 카페인이 각성을 시키는- 에서 그저 표류하며 보내야만 했던 시간들.



   다시금 ‘아홉수’의 시간들이 떠오른다. 또! 그 시간들 속에서 무력하게 난도질당해야 한다는 생각에 몸서리가 쳐진다. 감정은 눅눅해지고 나를 설레게 하던 일상으로부터의 소소한 행복들은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불현듯 찾아오는 감기처럼, 살아있는 나를 느끼는 것도 찰나일 뿐. 그렇게 나의 일상은 무너져 간다.

내달리는 차창에 세차게 내리치는 빗방울처럼 내 생각도 미친 듯이 여기저기로 곤두박질치며 흩어진다. 진정 나는 9의 저주라도 받은 것일까. 왜 나는 여전히 아홉수가 두려운 걸까. 신에게 그냥 내 나이가 9로 끝나는 시간은 사라지게 해 달라고, 왕자 따위는 없어도 좋으니 ‘잠자는 궆속의 공주’로 만들어 달라고 간청해볼까. 9 따위 꺼져 버려라. 1, 2, 3, 4, 5, 6, 7, 8, 그리고 0. 미치도록 아름답구나.

   



   하릴없이 홍대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민트색 인테리어가 유독 눈에 띄는 어느 카페에 들어간다. 아이슬란드를 테마로 여러 정보들을 공유할 수 있는 장소인 아지트 아이슬란드라고 한다. 시그니쳐 메뉴인 빙하 맥주를 시켜본다. 잔을 들고 빙하처럼 동동 떠 다니는 민트색 얼음 덩어리에 내 두 입술을 부빈다. 부드럽고 시원하다. 아이슬란드의 빙하도 이런 색이려나? 쌩눈으로 보고 싶다.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니 이내 청량감이 감돈다. 반짝 상쾌한 기분이 올라온다. 그리고 우연히 눈에 띈 잡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거대한 폭포수와 신비로운 무지개 그리고 한없이 하찮아 보이는 인간들 -그러나 그래서 왠지 더 위대하게 느껴지는- 을  배경으로 ICELAND가 존재감 있게 적힌 잡지를 집어 든다. 대충 넘겨보다가 마치 운명처럼 나를 번쩍 사로잡는 사진을 발견한다. 긴 머리의 한 여자가 벤치에 앉아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옆에 같이 앉아있는 조각상에 무심하게 기댄 채, 그녀는 책 한 권을 펴 들고 앉아 있었다. 조각상은 살아 있는 듯했다. 함께 앉아있는 여자가 펴 든 책을 같이 읽고 있는 듯도 했다. 무심한 듯 하지만 형언할 순 없는 따뜻한 위로가 흘러넘쳤다. 그 사진 한 장은 나를 송두리째 뒤흔들 정도로 강력한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었다.


   '나도 저 여자처럼 저 벤치에 앉아서 저렇게 쉬고 싶다! 꼭 저기서 저렇게 사진을 찍어야겠어!!'

그리고 난 결심한다.

  

   ‘아이슬란드에 가자 가자 가자!’   



   


   피할 수 없다면 맞서야겠다. 이제 맞을 불혹(不惑)은 지난 39년 동안 응어리진 아홉수의 ‘굴레와 속박’이란 혹을 떼 버린 진정한 불(不)혹이길 바란다. 그래서 난 숫자 9가 주는 망상에 사로잡혀 시간을 허비하느니 피하지 않고 양껏 즐겨주기로 했다. 이번에야말로 내 인생에서 아홉수의 저주를 확실히 도려내기로 했다.

2016년의 숫자 네 개를 모두 더하면 9, 역시! 올해 떠나야겠다. 아이슬란드가 있는 유럽으로 9십9일간. 더불어 이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여행의 성을 완성하기 위해 더할 나위 없이 불완전한 마지막 레고 조각인 9를 끼워 맞춰 볼까.

  

  그녀의 닉네임은 9. 9로 시작해 9로 점철되는 인생의 앙다문 주인공. 그녀를 소환해야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마침 그녀도 몹시 위태로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다짜고짜 그녀에게 아이슬란드에 가자고 던져 보았으나 예상대로 별로 탐탁지 않아했다. 역시 그 녀석에게는 언제나 그랬듯 꽤나 그럴듯한 명분이 필요했다.

  

  “9야. 우리 9,999,999원만 가지고, 99일 동안 여행할래?”


  내 제안에 드디어 눈을 반짝이며 반응하는 그녀를 보며 난 생각했다. ‘낚였구나!’ 어쩌면 이 여행과 9의 존재는 처음부터 우주의 완벽한 계획이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이제 떠날 날짜를 정해야겠지. 흠. 그래, 오늘부터 90일 후면 4월 19일, 마침 9의 날짜. 딱이다. 날짜를 정했으니 비행기 티켓을 구해본다. 역시 티켓도 9십 얼마, 역시 비행기 편명도 9백9십 몇 번, 역시 좌석번호도 *9. 9가 넘쳐흐르는구나. 에헤라디야~ 이젠 놀랍지도 않다. 운명이로9나. 마침내 영겁의 아홉을 주파하여 비로소 궁극의 소멸에 다다를 완전한 운명.

맞서자! 쟁취하자! 그리하여 취하자!


드디어 2016년도 9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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