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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호 Sep 14. 2023

내가 쓸쓸할 때

그냥 일기

시간이 정말 빠르다고 느낀다. 쪄죽을 것 같던 여름도 끝이 보이니까. 밤이 되면 정말 가을의 선선함이 느껴진다. 지하철과 강의실은 너무 춥고 낮은 너무 더운 불협화음까지.


개강한 지도 2주가 지났지만 학교는 학교에 볼일이 없다. 5학점밖에 남지 않은 상태이기도 하고. 그렇다고 내가 뭘 바쁘게 보내는 것도 아니고 하핳.



                                                    내가 쓸쓸할 때,


                                                    남들은 모르거든.




                                                     내가 쓸쓸할 때,


                                                    친구들은 웃거든.




                                                     내가 쓸쓸할 때,


                                                  엄마는 다정하거든.




                                                    내가 쓸쓸할 때,


                                                부처님은 쓸쓸하거든.




                                    가네즈 미스즈, 「고독」, 『억새와 해님』, 소화,



재밌는 시가 있어 인용한다.

사실 마지막 연은 빼고 싶다는 느낌도 든다. 이건 내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다. 하지만 마지막 연이 있기에 앞선 이야기들의 인과가 잘 맞는다는 느낌도 든다. 읽을수록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든다. 내가 쓸쓸할 때,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일본 시인들은 어떻게 이런 문구를 사용할 생각 했을까.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빨리 해산시키려면, 그들에게 시를 읽어주면 된다




박연준, 『고요한 포옹』, 마음산책, 2023년.152쪽.


조지 오웰은 위와 같은 말을 했다. 시에 대해 가장 적합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이걸 본 박연준 시인은 쓸쓸하다고 표현했던 거 같다. 시인의 입장에선 이러한 시의 정의는 쓸쓸함이 아닐 수가 없을 것이다. 시를 재밌다고 생각하는 MZ보단 노잼이라고 생각하는 젊은 층이 많을 테니까. 아니, 별 관심 없을 수도.



일본 드라마 <나기의 휴식> 6화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나쁜 남자로 살다 처음으로 사랑에 빠지게 된 남자에게 이런 말을 하는 할머니.


“가슴이 왜 이렇게 아픈지 모르겠어? 그렇다면 첫사랑이네. 축하해! 그리고 조의를 표할게.”


Ibid. 132쪽.


그러고 할머니는 이어서 말한다.




“뜻대로 되지 않는 사랑과 욕망의 세계로 온 것을 환영”


우린 이 어긋난 세상 속에서 화이팅하는 거겠지.


이러한 세상에서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지옥과 천국을 나눈 사후만큼이나 이승은 단순하지 않을 테니까. 계속되는 괴리감에 어쩔 땐 좌절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좌절과 경험을 반복하면서 성장하는 거겠지.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을 이해하게 될 거고 그러면서 욕망을 조절할 줄도 아는 걸 테고.


범죄로 인해 세상이 흉흉했던 뉴스를 떠올린다. 욕망을 조절할 줄 모른다면 저런 범죄 소식이 더 들려오겠지. 


난 세상을 똑바로 이해하고 있을까. 똑바로 이해한다는 건 무엇일까. 우린 무엇인지 모르는 이 무지함에서 공부를 했던 것 같다. 철학적 논제의 귀결을 데카르트는 정의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생각에 대한 무수한 연역은 결국 생각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결론으로 도달했던 걸 테고.


버트런드 러셀의 <과학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있는 요즘이다. 책의 첫 장에서 밝히는 건 과학과 종교의 대립이었다. 첫 번째 과학과 종교의 전쟁은 지동설이었다고 한다. 지구가 태양을 도는가, 태양이 지구를 도는가.


그리스 시대 때 이미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과 지구가 움직인다는 사실을 밝혀냈다고 한다. 어쩌면 종교는 그 사실을 몇 세기 동안 부정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때의 종교는 힘이기도 했으니까.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책에서 이런 걸 본 적 있다. 가장 신성하다고 여겨진 종교 전쟁에선 가장 많은 강간이 기록되었다고 한다. 


영예를 되찾기 위했던 십자군 전쟁은 전쟁이 계속될수록 유럽연합군의 폐혜를 잘 보여줬다. 성지를 향하던 십자군 연합은 베네치아를 약탈했고.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엔 아이러니함이 잘 드러난다. 고리대금업자인 샤일록(맞나?)은 패소한다. 그렇기에 영국인들에게 <베니스의 상인>은 희극이다. 영국인들의 승리와 유대인의 패배니까. 유대인 샤일록은 패소하기에 결국 지는 거니까. 하지만 샤일록이 이야기했던 부분은 오래 생각하게 만든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질 않는데 이런 얘기였다.

나는 칼에 찔려도 피 한 방울 안 흘립니까?

뉘앙스로 얘기하면 나(유대인)도 결국 (너희와) 같은 사람이다. 


셰익스피어는 어쩌면 알았던 걸지도 모른다. 유대인이라고 차별했던 그 시대를 살아가면서, 이것은 잘못되었다고. 그래서 샤일록의 입을 빌려 얘기했던 걸지도 모른다. 뭐, 어쨌든 <베니스의 상인>은 현대에 들어와서 희비극으로 평가 받는다. 단순히 유대인이 졌다고 희극으로 평가할 수 없는 시대가 왔다는 뜻일 거다. 영화와 희곡에서 샤일록을 다루는 방법도 달라졌다. 영화에선 샤일록에게 침을 뱉는 장면으로 오프닝이 시작한다. 샤일록은 곤돌라(?)를 타고 가는 길에 어떤 사람이 샤일록에게 침을 뱉는다. 고리대금업자이자 유대인인 샤일록에게 질타와 채찍을 가했던 시대라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다.


내가 쓸쓸할 때, 남들은 잘 모른다. 하지만 엄마는 다정하게 나를 보살펴줄 거다. 위로해줄 거고. 그리고 부처님은 공감하는 거다. 나의 쓸쓸함에 연민을 느끼는 걸지도 모른다. 여기서 부처는 신으로 치환해도 문제 없을 거다. 


어쩌면 나도 저런 시를 쓰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학창 시절에 빛났던 시적 감수성을 지금 나에겐 찾기가 어렵다. 연기 탓일 수도 있고 그만큼 시적 예리함이 녹슬었다는 걸지도 모른다. 예체능의 어려운 점은 이건 거 같다. 마땅한 보상이 지속적으로 지급되지 않는다. 게임처럼 바로바로 능력과 승패가 보여지지 않는다. 시험처럼 성적이 시험마다 나오질 않는다. 예술의 보상은 먼 미래에서 불러와야 한다. 힘들게 작품을 올려도 아무 반응이 없을 수도 있으니까. 공모전에 되지 않는 한 지망생들은 눈에 들어오기 힘들고.


그냥 그러한 사실을 알기에 예체능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르네상스 시대가 아니니까. 하지만 누군가가 그 자리를 빛내고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걸어갈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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