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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호 Dec 20. 2023

안녕한 길을 따라 걷다

5. 숙명적으로 발이 맞지 않는 절름발이인 것이다**

가만히 구름을 바라볼 때가 있다. 구름은 담장을 질주하는 장미 같다. 쉼 없이 흘러가는 구름은 어쩐지 속절없는 세월에 대한 한탄 같다.


찬찬히 바라보면 보이지 않던 게 보인다. 구름이 움직인다는 걸 어릴 때는 몰랐다. 박완서의 「나목」은 그런 소설이었다. 교과서에서 읽었던 익숙한 소설이지만 찬찬히 다시 읽었을 때 놓쳤던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주인공 이경의 서사는 잔잔하다. 금기된 사랑을 욕망했지만 원초적인 자극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의 불우했던 가정에서 생긴 결핍이 옥희도에게 투영됐다. 이경이 원한 건 진정한 사랑일까. 옥희도는 가난했지만 가정이 있는 화가였다. 옥희도 자신도 환쟁이보단 화가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아내가 그를 믿었다. 그에 반해 이경은 어머니의 눈에 반가운 존재가 아니었다. 두 오빠를 잃은 어머니에게 이경은 ‘여자애’에 불과했으니까. 이경의 결핍된 감정의 본능을 옥희도가 촉발시켰다. 이경은 그것을 사랑으로 착각한 건 아닐까.


나는 이제 옥희도 씨를 사랑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런 생각은 때론 아프고, 때론 감미롭고 어쩌면 두렵고 하여 어떤 뚜렷한 감정을 추려낼 수는 없어도, 그 생각에서 조금도 헤어나지를 못했다. (67쪽)     


물론 착각이 아닐 수 있다. 동정과 연민은 사랑에 가장 가까운 감정이니까. 그렇지만 착각하기 쉽다고 모두가 착각하는 건 아니다. 그 갈팡질팡을 잘 보여주는 건 태수의 존재였다. 옥희도의 대체라고 하기엔 슬프다. 하지만 태수는 옥희도에 비해 이끌림이 부족했다. 누구와 결혼할까를 줄곧 달려가던 서사에 긴장감이라곤 없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정해진 결말이었을 테니까. 옥희도와 이루어진다는 건 금기된 사랑의 실현이자 불륜이니까.


옥희도가 그렸던 고목을 이경은 나목임을 알게 된다. 그동안 이경이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나목으로 보게 된 안목이 생겼다. 학생 때 읽던 책을 성인이 되어 읽었을 때 다르듯. 옥희도의 아내가 낮은 밤 찾아온 이경을 따뜻하게 안아준 장면, 이경은 어머니의 죽음을 자신에게 연민하도록 거짓말로 포장과 전쟁에 참혹성에 대한 묘사는 「나목」을 지금까지 읽게 만드는 특별한 힘이 있는 듯하다. 이경이라는 인물은 꼭 살아있는 인물처럼 다가온다. 그의 시선으로 쓰인 전쟁의 참상 묘사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방바닥에 쌓인 흙덩이와 아스러진 기왓장 위에 어머니가 길게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고 나는 휑하니 뚫어진 지붕의 커다란 구멍으로 마구 쏟아져 들어오는 달빛으로 처참환 광경을 또렷이 보았다.

검붉게 물든 홑청, 군데군데 고여 있는 검붉은 선혈, 여기저기 흩어진 고깃덩이들. 어떤 부분은 아직도 삶에 집착하는지 꿈틀꿈틀 단말마의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296쪽)    



*이 시리즈는 연작입니다.

**이상, 「날개」 61쪽에서 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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