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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호 Jan 09. 2024

날적이

그냥 일기

우리 과엔 전통 아닌 전통이 있었다. 그건 바로 '날적이'다. 날마다 적는 이야기를 줄여서 썼던 거로 기억한다. 년도도 다양했다. 선배부터 내려오던 거였으니 근 10년 정도의 연도가 담긴 날적이가 과방 한쪽 책상에 자리했으니까.


모든 날적이의 공통점은 1학기에만 활발하게 적혔다는 거다. 매해마다 2학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날적이에 적힌 날짜는 대부분 1학기였고 봄이였고 여름이었다. 가을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겨울의 숫자는 압도적으로 적었다. 겨울엔 다들 과방에 오질 않았던 걸까.


18학번이었던 나는 2018년의 날적이를 적었고 바라봤다. 우리의 날적이도 겨울이 되자 거의 쓰여지지 않았던 거로 기억한다. 정확히는 관심 밖이 되었다. 겨울에 쓰였는지를 확인할 생각조차 안 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날적이 이야기를 꺼내는 건


그냥 추억 팔이다. 브런치엔 제목을 적어야 한다. 일기를 쓰던 나에게 제목은 항상 불편했다. 뭐랄까,, 너무 공개 일기라는 게 보여서 그런 걸까. 내 하루 쓰는 거에 제목이 들어간다는 게 나한텐 사치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그리고 진짜 일기에 적힐 내용은 브런치에 적을 수도 없고.


1학년 강의 때 이런 과제가 있었다. 유서 써오기. 교수는 우리들의 유서를 보고 총평 아닌 총평과 피드백 아닌 피드백을 남겼다. 써온 유서엔 진짜 유서에 쓸 내용이 담기지 않았을 거라고. 소설을 바라보는(?) 지표랑 연결시켰던 거 같은데 솔직히 기억은 나질 않는다. 대충 내가 기억하는 건 이런 내용이었다. 공개되는 유서엔 우리가 진짜 쓸 수 있는 이야기를 못 담았을 거라는 말만 기억한다. 아마 일기에도 투영되는 말일 거 같다.


사실 이 얘기를 꺼내는 건 누가 내 오래된 과제(유서)에 좋아요를 눌렀기 때문이다. 브런치에 들어오면 의례적으로 알림을 먼저 확인한다. 뭐 솔직히 나도 왜 보는진 모르겠는데 그냥 본다. 라이킷이 몇 개가 달렸구나, 10개가 넘으면 표시가 뜨니까. 내 유서(과제)에 좋아요를 남긴 4번 째 손님(?) 덕에 이런 글을 쓰게 됐다.


요즘은 바쁜(?) 하루를 보낼 때가 종종 있다. 들어가는 작품이 세 개나 있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살다가 해외를 가게 될 줄은 몰랐는데 미국에 가는 건 기정 사실이 됐다. 출국까지 한 달도 남지 않았고 일하러 내가 해외를 갈 줄은 몰랐으니까. 해외 촬영 말고 다른 두 작품은 국내다. 당연한 거지 이게. 하나는 근데 포항이다. 지방 촬영은 언제나 익숙하질 않다 ㅎㅎ


다른 하나는 먼저 캐스팅이 왔다. 그게 난 신기하다. 필메에서 날 봤다고 했다. 먼저 연락이 왔다는 게 묘한 뿌듯함이 있다. 키드밀리가 어떤 노래의 가사에 이런 걸 썼다. 심사 받다가 이제 심사하는


약간 내가 지원하다가 이렇게 연락이 오니까 뭔가 성공(?)한 느낌이 든다. 이 정도로 만족하는 거 봐선 난 큰 인물이 되긴 틀린 거 같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데 적잖은 시간이 걸린 건 사실이니까. 어디가서 솔직히 자랑도 하고 싶은데 하질 못 한다. 연기하는 동료들에게 얘기해봤자 자랑이 되고 괜한 박탈감을 심어주고 싶진 않으니까. 그럼에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마냥 소리치고 싶기에 브런치에 조심히 쓴다. 


난 솔직히 자격지심이 심한 편인 거 같다. 남들의 기준을 모르니 심하다고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되는 거지만 사실 나보다 잘 나가는 동료들에 대한 감정은 묘하다. 그 감정엔 분명 축하하는 마음이 100이 아님을 알고 있기에 나도 어딜가서 얘기하질 않는다. 누군가는 나를 시샘할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이게 언제까지 지속되는 건 아니니까. 3월이 되면 난 다시 백수가 될 거다. 애타게 작품과 촬영을 찾겠지만 3월 한 달은 아마 거즘 백수로 지내지 않을까.


참 아이러니하다. 작품 때문에 바쁜 요즘도 난 필메를 빠지지 않고 매일 들어간다. 그리고 거의 매일 메일을 쓴다. 그렇게 해야 공백이 생기지 않으니까. 이쯤되면 햄스터 챗바퀴 아닐까 싶다. 뫼비우스의 띠마냥 뺑뺑 도는 거 같기도 하고. 


월요일에 김포에서 촬영이 끝나고 택시를 탔다. 기사 아저씨는 이것저것을 물어봤고 나도 대화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나보고 술을 마셨냐고 물었다. 그때 시간이 아마 새벽 1시였을 거다. 난 아니라고 대답했고 기사는 이어서 물었다.


그럼 뭐 했냐고, 그런 식이었는데.. 뭐라고 말할까 하다 단편영화라고 말했다. 아저씨는 못 알아들은 듯했다. 아니 정확히는 영화만 알아들은 거 같다. 그렇게 난 배우까진 아니고,, 학생이다를 어필하고 오늘 찍은 것도 (상업) 영화가 아닌 학생의 단편영화이다라고도 설명했다. 다음부턴 그냥 거짓말을 하는 게 편할까 싶기도 했다.


어쨌든 김포에서 노원까지 가는 길 한창을 떠들었다. 그러고 집에 도착했을 때 아저씨는 나를 뚫어져라 봤다. 난 


?


하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뭐지,, 내가 뭘 잘못했나.. 그랬는데 아저씨가

앞으로 유명해질 텐데 얼굴 기억해야죠, 이런 식으로 말했다. 영하 10도를 웃도는 날씨였는데 얼굴이 화끈해졌다. 연예인은 이런 기분이겠구나.. 난 유명해지고 싶지 않았다.


집에 도착했을 땐 7만원이 나온 택시비 영수증만이 남았다. 56000원 정도가 나올 거라고 뜬 카카오택시였는데 생각보다 더 나왔다. 뭐,, 택시비는 청구할 거니까 상관 없긴 했는데 괜스레 연출한테 미안해졌다. 그분도 학생이던데..


이불에 누워서 하루를 돌이켰다. 사실 택시기사와의 일을 돌이켰다고 봐야 한다. 아저씨가 나한테 드라마에 나오냐고 물었고 나는 그날 왜인지 사실대로 전부 말했다. 올해 하반기에 숨은그림찾기 하듯이 찾아보면 저를 볼 수 있을 거라고.. 그런데 우리 부모님도 말 안 하면 찾기 어려울 정도에요.. 나는 갈수록 목소리가 작아졌다.


내년부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하고 마무리 멘트를 날렸다. 어색한 웃음도 함께. 후아.. 올해 어떻게든 하나만 따는 게 목표다. 그럼 내후년엔 영상이 나올 테고 그때부턴 뭐,, 밀고 붙일 수 있지 않을까. 모르겠다. 운이 좋으면 데뷔하는 거고 운이 나쁘면 오래 걸리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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