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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호 May 04. 2024

대돟시의 사랑법

그냥 일기

오타로 대돟시의 사랑법이라고 적었는데

도가 돟이 되자 글씨체가 달라졌다. 그래서 그냥 뒀다.

오늘은 일기는 아니고

문장을 옮기다 책을 읽었을 때 감회가 다시 떠올라

쓱 올려본다.




그날 우리가 날렸던 풍등은 높이 떠오르지 못했다. 방파제를 넘어선 순간 풍등에 불이 붙었고,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사선으로 나부끼다 곧 먼바다로 추락해버렸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떤 몇몇 사람들이 와하하 웃었다. 빨간 립스틱을 바른 여자는 특유의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풍등 어딘가에 구멍이 난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멀리 날아가는 다른 사람들의 풍등과 검은 바다 어딘가에 잠겨 있을 우리의 풍등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이나. 그러는 사이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규호도 내게서 등을 돌려 멀어졌는데, 나는 좀체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모든 게 사라져버렸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나는 풍등에 쓸 문장을 여러번 고쳐 썼다. 다이어트, 주택청약 당첨, 포르셰 카이엔, 첫 책 대박 나게 해주세요…… 뭔가 다 내 진짜 소원이 아닌 것 같아 빗금을 쳐서 지워버렸다. 아마도 그러는 사이 구멍이 나버린 것이겠지. 

나는 결국 풍등에 두 글자만을 남겼다.

규호.

그게 내 소원이었다.     

        

박상영, 「늦은 우기의 바캉스」, 『대도시의 사랑법』, 창비, 2019. 309쪽. 




굳이 책을 다 읽지 않아도 예상될 거로 생각한다. 문장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규호를 생각하는 '나'에 이입이 된다. 자연스레 눈물이 나는 건 대도시의 사랑법이 그만큼 잘 쓴 소설이란 뜻이겠지. 

박상영의 소설은 재밌다. 재미에 이런 감동이 섞여 있으니 싫어할 수가 없다.




나는 즐겨찾기 속 몇 개의 페이지를 더 읽어보다 창을 닫아버렸다. 그 기사들은 모두 동성애라는 ‘질병’ 혹은 ‘징후’에 대해 갖가지 원인을 들고 있었다. 열어본 페이지 목록을 모두 삭제한 후 모니터를 껐다. 이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지내는 편이 나을 것이다. 항상 아무것도 모르는 편을 택하는 데 익숙한 나니까. 나는 그의 옆에 누웠다. 망친 낙서로 가득한 것 같은 그의 등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나는 손으로 그 자국을 일일이 쓰다듬어보았다. 차갑게만 느껴졌다. 바닥에 처박힌 이불을 들어 우리의 몸에 덮어봐도 으슬으슬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그를 동전 채 몸을 웅크리고 있는데 갑자기 사과를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로부터?

아무 데나 동성애를 갖다 붙이는 등신 같은 자들에게?

이딴 말도 안 되는 쓰레기 같은 구절을 모으며 자신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못난 그에게? 별로인 남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좋아해버리고, 단지 그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의 컴퓨터를 마구 뒤지며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하는 나에게? 어쩌면, 그 모두에게. 아니, 다른 누구도 아닌,

엄마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받고 싶어졌다. 딱 한번이라도, 미안하다는 말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럴 일은 없겠찌. 그럴 일은 아마 영영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잠시라도 사과 받고 싶은 마음을 품은 나 자신이 우스워지면서 얼른 가방을 싸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고, 코를 골며 잠들어 있는 그를 내버려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동이 트기 전에 홀로 그의 집을 나썼다. 미제의 문물, 자본주의의 산물이 된 채로.     148-149쪽.



단 한번이라도 내게 사과를 해줬으면 좋겠어. 그때 내 마음을 짓밟은 것에 대해서. 나를 이런 형태로 낳아놓고, 이런 방식으로 길러놓고, 그런 나를 밀어내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에, 무지의 세계에 놔두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서, 제발 사과를 해줬으면 좋겠어. 그게 엄마의 본심이 아니었다는 것도,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알지만, 나는 엄마를, 당신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아.

-뭘?

-정말 미안한데, 아마도 영영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

-얘가 갑자기 뚱딴지같이 뭔 소리래.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화장실.     


박상영,「우럭 한점 우주의 맛」 ,『대도시의 사랑법』, 창비, 2019. 179쪽.




사실 이 문장을 옮기면 「우럭 한점 우주의 맛」을 다 읽은 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도시의 사랑법』은 곱씹을 수록 감회가 새롭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읽다 보면 정말 사랑스러운 묘사가 보인다. 동성이 동성을 사랑하는 건 사실 문제가 아닌데 그 묘사는 연인과 다르지 않다. 너무나 당연한 연인이니까.


최근 레즈비언 사이에서 임신했다는 기사(?)를 봤다. 반응은 예상한 대로 좋지 않았다. 

이거에 대해서 얘기를 꺼내고 싶다기보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애가 어쨌든 어른이 될 텐데 그때 이성애자라면 부모는 어떻게 할까. 부모가 동성애자라고 아이에게 동성애를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당연히 폭력이다. 이성애자의 부모 사이에서 동성애자의 자식이 태어났다고 이성애를 강요하는 건 폭력이란 거다.

이 당연한 사실을 생각하자, 누군가 내 뒷통수를 한 대 친 기분이었다. 잘못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사랑하고 싶은 사람만이 존재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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