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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일기

그냥 일기

by 수호


벚꽃 구경을 정말 많이 했다. 엄마의 생일을 맞아 우리 가족은 진주로 여행을 갔고 그곳은 벚꽃이 절정이었다. 공군 훈련소가 있던 진주, 그러니까 약 6년만에 진주를 들렀다. 그때 내 기억이 맞다면 하연옥에서 육전과 냉면을 먹었던 기억이 있다. 훈련병일 때일 텐데 별로 맛있었던 기억이 나질 않았고


그때도 벚꽃이 예뻤던 것 같다. 특기 학교에서 있을 당시 교육사에선 부대 개방 행사를 주말 동안 했었는데 벚꽃이 정말 예뻤다. 많은 사람이 군 부대 안으로 들어와 벚꽃을 구경했을 만큼.

그렇게 벚꽃이 한창일 때 불침번을 섰다. 밖을 보자 커다란 벚나무와 떨어지는 벚꽃잎 그리고 그 아래 사슴 무리가 있었다. 큰 뿔을 가진 사슴은 <모노노케 히메>에서 본 사슴 같았다. 애니메이션에나 봤을 법한 비쥬얼의 사슴. 어두운 밤, 밝은 달빛, 그 아래에 떨어지는 벚꽃잎과 사슴. 그 기억을 오래 가지고 있다. 이제는 실루엣처럼 흐릿해졌지만 그때 그 기억은 정말 애니메이션에서 볼 법한 장면이었으니까.


어쨌든 4일부터 들린 진주는 벚꽃이 정말 예뻤다. 거리 어딜 가든 벚꽃이 있었고 진양호 동물원엔 사람들이 동물 구경보다 벚꽃 구경하러 오는 게 아닐 만큼 사진 찍는 사람도 많았다. 남강을 따라 심어진 벚꽃도 너무 예뻤고.


그렇게 6일 오전엔 진주역에서 서울역으로 가는 열차를 탔다. 오전 08:57분 차였고 서울엔 12:30 정도에 도착했던 것 같다. 그렇게 자취방까지 간 다음 14시까지인 학원 출근을 위해 서둘렀다. 13:55분, 원장쌤에게 전화가 왔다. 문을 열 수가 없다고 했다. 자초지종을 얘기하자면 학원은 빌딩 5층에 위치하고 관리사무소 아저씨가 출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빵집에다가도 열쇠를 맡겨두는데 빵집도 쉬는 날. 고로 학생도 쌤들도 오늘 하루는 쉬어야 한다고 했다.


학원 앞에 도착해서 연락을 받았는데 별로 허탈하진 않았다. 집에 다시 돌아가는 버스를 탔다. 환승 시간 끝나기 전에. 곳곳에 뿔뿔이 흩어진 중학생들이 있었는데 마주치지 않기 위해 버스정류장으로 조용히 숨었다.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나는 아침부터 왜 그렇게 분주했을까. 가족 단톡방에 사진이 올라왔다. 부모님과 형이 어딜 여행하고 남긴 사진 같았다. 부자마을이랬나. 지수에 간다고 했던 것 같다.


난 무얼 위해 서둘렀을까. 사실 할 게 많아서 올라오기도 했어야 했다. 그런데 무슨 탓인지 또 피시방에 가서 게임을 했다. 시간이 떴다는 허탈함을 달래려고 한 걸까. 모르겠다. 사진을 보니 갑자기 애틋함이 들었다. 이젠 진짜 가족을 다 같이 만나는 게 힘들어졌는데.


저녁을 먹고 난 후에 어떤 누나에게 연락이 왔다. 여름에 같이 영화를 찍자고 얘기를 나눴던 분이었다. 전화의 요지는 같이 하기 힘들 거란 얘기였다. 뭐랄까, 사실 예감이 됐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그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말을 하기까지 고민 했을 사람일 텐데, 그런 게 미안했다.


어떤 말을 하기까지 생각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 그 유형에 속한 게 사실 나였다. 사실 나는 말과 생각이 거의 필터링 없을 만큼 말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생각한 걸 말하는 데는 오랜 고민이 필요하다.


자취하는 곳 앞엔 큰 벚나무가 있다. 벚꽃 명소다. 아직 더 필 예정인지 작년에 비해서 벚꽃은 예쁘질 않았다. 진짜 자취방 문 열고 15초 걸으면 나오는 곳이라 뭔가 익숙하기까지 한다. 우리 빌라엔 조현병 환자(로 추정되는)도 있는데 나를 볼 때마다 자꾸 웃는다. 그냥 평범하게 웃으면 좋겠는데 조커처럼 웃는다. 거리가 가득 메워질 만큼 큰 소리로.


한 동안 관심 없더니만 요즘엔 나를 알아보는지 그런다.

여전히 어렵다.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차별도 선입견도 항상 조심하자고 다짐하지만 막상 체감되는 건 또 다르다. 특히 나 혼자일 땐 괜찮지만 누군가가 옆에 있을 땐 치부를 들킨 것마냥 부끄럽기까지 한다. 누군가와 같이 있을 땐 안 웃어줬으면 좋겠다. 그만 쳐다보고. 다가오지도 말아주고.


솔직히 처음엔 무서웠다. 뭐 지금은 무섭다기보다는 뭐랄까 정확히는 껄끄럽다. 이게 너무 아이러니하다. 길고양이를 보면서 그런 생각 든 적은 없는데 왜 사람은 껄끄럽게 느끼는 걸까. 사람이라서 그런 걸까.


불교박람회가 끝났다. 사실 가보진 않았고 뉴스로만 접했다. 이제 여름이 되면 국제도서전을 할 거고. 작년엔 얼리버드로 예매했지만 가질 못했다. 시간이 없어서라고 변명하지만 어느 정도 사실이기는 했다. 연극은 정말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했으니까.


시간이 참 빠르다. 책을 읽어야 하고 할 게 너무 많지만 하질 않게 된다. 이런 내 게으름 탓인지 구렛나루 아랫 부분에 인파선염이 생겼다. 멍울이 처음에 잡혔을 땐 살짝 통증도 있었지만 이틀 정도 지나자 그렇진 않다. 그래도 오늘 병원에 가야지. 전에 목에 생긴 인파선염을 간과하다가 아직도 멍울의 형태가 남이 있기도 하니까.


+(내용 추가)

진주역에서 서울역으로 가는 열차 안이었다. 비상대피도우미 석을 한 탓에 맨 끝(혹은 앞) 열차의 첫 번째 좌석이었다. 통로 측에서 나는 꿀잠을 자며 올라오는 중이었고 창원역에서였나 어떤 승객이 나를 깨웠다. 창가 측 앉으려는 사람인가 보다 싶었다. 그는 내게 무슨 말을 걸었고


난 귀에 낀 에어팟을 뺐다. 요지는 옆 자리 친구와 좌석을 바꿔줄 수 있냐는 거였다. 나는 잠에 덜 깬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옆 창가(내 자리는 1-C / 옮긴 곳은 1-A)로 갔다. 그는 동대구에서 내린다고 했고 나보고 그때 깨어주겠다고 했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인 다음 바로 잠에 빠져 들었다.


동대구역이었다. 그가 깨워주기 전에 난 눈이 떴다. 목이 타서 물을 마셨다. 그는 내게 고맙다고 다이제 과자를 하나 주고 갔다. 난 다시 제자리로 갔고. 더 잠들기엔 밀린 과제가 생각나서 다시 프로스트의 책을 폈다. 사실 별로 집중이 되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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