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가 좀 걷히는

그냥 일기

by 수호


지난주보다는 확실히 날씨가 덜 덥다. 이번 주는 비도 온 탓인지 인간적인 여름으로 느껴졌다. 어쩌면 저번주의 날씨에 너무 절실하게 느껴버린 탓일지도 모른다. 지구는 끓는 중이다.


미션 캠프를 통해 이번 달엔 이슬아 작가의 책을 읽고 있다. 이메일을 잘 쓰는 방법인가 하는 책인데 너무 과한 칭찬이 곳곳에 있다. 너무 재밌다, 월간 이슬아 최고작 등. 이게 최고작이라면 좀 실망스럽긴 한데. 물론 내용은 잘 읽히고 재밌다. 무엇보다 목적이 분명한 책이고 어쩌면 실용서인데 문제는 내가 그 목적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그냥 신기하게 보고 있다. 물론 기억해뒀다가 쓰고 싶은 것도 있었다.


전공자인 나도 책에 관심이 없는데 책에 관심 가지는 사람이 되게 많다는 걸 느끼고 있다. 뭔가 아이러니하다. 분명 책 읽는 사람은 적다고 했는데 국제도서전은 사람이 정말 넘칠 정도다. 종이책은 계속 출간되고 서점도 망하지 않고 잘 존재한다. 독립서점 혹은 동네서점은 하나의 관광처럼 이용되기도 하고.


이슬아의 책을 읽다 보니 중쇄가 된 적도 많은 것 같았다. 이처럼 훌륭한 작가를 난 왜 처음 들어본 걸까. 드라마 집필까지 한다고 하는데 내가 너무 속세와 거리를 뒀나.


어젠 영화제 아닌 영화제를 갔다. 서울독립영화제 50주년을 맞은 기념 상영회였다. <폴라로이드 작동법>과 다양한 영화가 있었다. GV도 처음 접해 봤고 신기한 게 많았다. 무엇보다 서독제, 굿즈를 아주 잘 뽑는다. 메달 같은 굿즈였는데 고양이가 그려져 있었고 퀄리티 또한 충실했다.


단편영화는 약 2시간 동안 여러 작품이 계속 틀어졌는데 피로감이 좀 있었다. 아무래도 한 작품 끝나고 다음 작품 바로 보고 하니까 피로했다. 영화제에 나중에 가게 되면 참고해야겠다. 텀을 두고 봐야지. 그렇게 단편을 보고 장편을 봤다. 장편은 <스틸 플라워>.


이 작품은 한 마디로 하자면 불편했다. 영화는 만들어진 시기를 생각해도 불친절한 연출이었다. 카메라 촬영 또한 마찬가지였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한국 버젼 같은 느낌도 들고. 캐릭터는 성격이 보이질 않았다. 개연성에도 물음표가 찍히는 순간이 있었다. 인물들은 폭력적이고 여주는 계속해서 맞기만 했다. 맞는 건 또 진짜로 맞는 장면으로 찍혔다. 그렇게 불친절한 샷과 연출, 이야기가 계속해서 펼쳐졌다. 진심으로 지금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만 보고 싶었는데 끝자리여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여주에게 자꾸만 마음이 쓰였다. 쟤는 왜 저러지, 어눌한 건가? 부족한 건가? 왜 휴대폰도 없고 주소도 없고 부모는 어디 있고 집은 또 왜 없어서 무단침입을 하는 거지? 여주에게 자꾸만 물음표가 던져졌다. 세상은 여주에게 자꾸만 갈취했다. 일은 시키지만 돈을 주지 않았다. 여주는 화가 난 마음에 전어구이 집에서 물고기 하나를 수족관(?)에서 꺼낸다. 그러곤 바다에 풀어준다.


그때부터 여주가 보였다. 캐릭터가 보였다. 세상에게 계속 얻어 맞아도 자기는 똑같이 폭력을 행하지 않았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복수했고 살아가길 선택했다. 겨우 구한 8만원(아마)으로는 탭댄스화(이름을 모른다)를 산다. 그러곤 걸음마를 뗀 망아지처럼 신나라 춤춘다. 탭댄스의 경쾌한 소리와는 다르게 세상은 추워 보였고


전집에서 탭댄스화를 신고 일하는 여주는 계속 또각또각 거렸다. 어울리지 않는 소리였지만 내심 흐뭇했다. 얼마나 좋아하면 저 신발을 신고 일할까. 그러다 또 한번 세상은 여주에게 폭력을 가한다. 전집에서 일하고 싶다고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도와주질 않는다. 그렇게 맞기만 하고 쫓겨난다. 여주는 오프닝 때와 똑같이 파도 앞으로 간다. 이번엔 파도가 더 높다. 파도가 여주를 덮친다. 세상은 파도처럼 여주에게 계속 폭력을 가할 것이다. 여주는 피할 도리 없이 파도에 몸이 젖을 것이고 겨울을 무척 춥게 버텨야 한다. 그렇지만 탭댄스를 춘다. 어떻게 추는지 모르지만 발을 휘적휘적 거리면서 소리를 낸다. 경쾌한 소리는 파도에 묻히지만 계속해서 춤춘다. 그 장면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 마지막 장면 때문에 <스틸 플라워>를 오래 기억할 것 같았다. 앞선 김종관 감독의 <폴라로이드 작동법>이나 이경미 감독의 <잘 돼가? 무엇이든>에 대해서도 할 얘기가 많고 그랬는데 <스틸 플라워>로 인해 다 지워졌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 <F1> 영화를 봤는데 그 여운도 사라졌다.


파도 앞에 한없이 작은 여주와 그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탭댄스를 추는 장면만이 기억에 남는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탭댄스 소리는 계속 들린다. 탭댄스는 점점 전문적으로 경쾌한 소리가 난다.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구두 소리가 끝까지 들렸다.


궁금했다.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은 누구지. 박석영 감독? 필모를 보자 <바람의 언덕>이 있었다. 우연하게 보게 된 영화였고 그때도 마지막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엄마잖아, 맞잖아, 하는 슬픈 목소리. 내용도 이야기도 어떤 것도 기억나질 않는다. 사실 대사도 틀렸을 수 있다. 누가 말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마지막에 되게 슬픈 목소리가 들렸던 기억만 나는 영화다.


요즘의 난 너무나 게으르다. 죽은 하루가 본다면 혀를 찰 정도 아닐까 싶다. 최근엔 부고 소식이 들렸다. 오래 고민했다. 여름에 자꾸 누군가 죽는 건 다른 계절보다 아프게 다가온다. 사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 어디에서는 누군가 죽고 있을 텐데. 그 사실을 절실히 경험한 건 장례식장 때였다.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엔 사람이 가득했다. 모든 방(?)에선 누군가의 죽음을 기리고 있었다. 그 사실이 아팠다. 어디에는 사람이 많았고 어디에는 사람이 적고의 차이지 누군가 죽었다는 사실은 모두 똑같았다. 그리고 그 슬픔을 공유하고 있는 곳이라는 것도. 그런 사실을 뒤로한 채 밖으로 나와 대중교통을 타면 다시 세상은 거짓말처럼 전과 똑같았다. 누군가가 죽었다는 사실은 당연하다는 것처럼 지하철은 움직였고 사람들은 걸어다녔다. 난 그 사이에서 주저 앉고만 싶었다.


세상은 횡단보도 신호 바뀌는 정도의 잠깐의 틈도 주질 않았다. 4일에 하루를 보러 갔다는 것도 먼 옛날 같다. 아직 일주일도 되지 않은 이야기인데 말이다. 컴공 형과 얘길 했다. 저희 몇 년 째죠? 3-4년 정도 된 것 같았는데 연으로 따지자 5년 째였다. 2021년에 죽었구나. 왜 이렇게 오래 됐죠?


5번을 여길 온 건데 기억은 3-4번에 그친다니. 희석된 걸까. 추모공원엔 모두가 같은 사실은 안고 찾아온다. 죽음이라는 사실을 겸허하게든 어떻게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공간이다. 다행스럽게도 그 날은 무척 덥지 않았다. 조문 온 모든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시원했으면 했다.


챗지피티한테 물어봤다. 장례식 예절. 답변이 길게 돌아왔다. 조의금은 필수야? 하고 짧게 묻자 그렇다고 챗지피티가 답했다. 돈이 필수는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선 그계 예절이라고 했다. 돈이 예의인 세상에서 우린 사는구나. 그래서 내가 옛날부터 예의가 없었구나. 아니 예의 바른 척 했었구나.


집에 돌아오면 나비를 찾는다. 나비는 차 밑에 있다가 내가 오는 소릴 들으면 마중 나온다. 그러면 아스팔트 위에 벌러덩 눕는다. 배를 만져주면 야옹, 머릴 만져줘도 야옹, 그만 만지고 집에 가려고 해도 야옹, 한다.


모르는 사람에게도 손을 허락할까 궁금했는데 허락하긴 했다. 고양이를 처음 만져보는 그는 부드럽다고 답했다. 부드러운 고양이 털, 종일 그루밍하는 보람이 있었을까 나비는.


고등어가 죽자 나비는 개냥이가 됐다. 이제는 엄마가 아니어도 되었던 탓일까. 그 사실을 나비를 만질 때마다 상기한다. 고양이에게 오늘은 그냥 오늘일 뿐이라는데. 고등어가 죽은지 5개월이 된 어느 날, 나비라는 이름이 불린 채 정착한지 x년 째인 오늘, 이런 개념이 없다고 한다. 고양이게 하루는 하루, 특별한 날은 없다고 한다. 어쩌면 나비는 고등어를 잊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차라리 그 편이 더 좋을 것도 같지만 그게 가능할까 싶었다.


나비는 차를 피한다. 당연한 얘기이긴 하지만 멀리서 차 소리가 들려도 바로 일어난다. 고등어가 차 바퀴에 밟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탓일까. 아님 본능인 걸까. 내가 너무 감정이입하는 걸 수도.


난 이제 정말 적지 않는 나인데, 여전히 어리고 싶은가 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솔직한 글을 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