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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르크와 벨

똑똑한 척하기(1)

by 수호


클레르크는 몰라도 벨은 들어봤을 것이다. 전화기를 만들었다는 그 사람이다. 사실 벨의 의도는 순수하지 않았다. 불순했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청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격차를 벌리기 위함이었다고 하니까.


전화는 청각장애인에게 치명적이다. 수화를 쓰는 이에게 혹은 입 모양을 봐야하는 그들에겐 목소리만 들린다는 건 의사소통의 불가능을 야기했으니까. 클레르크와 벨은 다른 삶을 살아왔고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클레르크와 벨은 그들의 생애를 바쳤던 중심적인 대의명분에서, 역사적인 역할에서뿐만 아니라, 사실상 다른 모든 방식에서 부딪쳤다. 클레르크가 인간의 다양성에서 힘을 찾았던 반면, 벨은 약함과 위험을 찾았다. 클레르크가 차이를 보았던 반면, 벨은 일탈을 보았다. 클레르크는 예외적인 사람들에 관한 사회적 모델을 가졌고, 벨은 의료적 모델을 가졌다. 무엇보다도 클레르크에게 못 듣는 것은 사회적 장애이고, 청각장애인의 큰 문제는 그들이 소수자로 있는 들을 수 있는 세계였다. 그는 호의를 지닌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청각장애인의 문화와 언어를 받아들임으로써 그 장애를 제거하는 날을 희망했다. 벨에게 못 듣는 것은 신체적 장애였다. 만약 이것이 치료될 수 없다면, 이것의 상흔을 덮음으로써 완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호의를 지닌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청각장애인들의 특별한 언어와 문화를 부정하고, 들을 수 있는 세계에서 들을 수 있는 사람들처럼 ‘여기며’ 청각장애인들을 도왔을 것이다. 언어 교사들의 회의에서 연설하면서, 벨은 청각장애 아이들에 대해 ‘우리는 그들이 청각장애인이라는 것을 잊도록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청각장애인이라는 것을 잊도록 그들을 가르쳐야 한다’라고 말했다.

클레르크에게 교육의 초우선 목적은 개인적 성취인 반면에, 벨에게 그것은 들을 수 있는 다수자와의 통합이었다. (5-6쪽.)


둘의 어느 쪽을 입장하고 지지하는 건 자유다.


저번에 얘기한 마서즈 비니어드 섬을 기억하는가. 그 섬의 연장선이 이 이야기일지 모른다. 마서즈 비니어드 섬은 굉장히 특별한 공간이었다. 장애를 구별하지 않는 조화로운 공간이자 이상적인 사회로 말이다. 우영우로 발화된 장애인에 대한 관점은 뜨겁다. 최근 우영우 드라마를 둘러싼 pc주의, 페미니즘 얘기가 많이 나오는 거로 보인다. 사실 우영우 최근 화를 보지 않아서 어떤 연유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논쟁이 되는 것을 언급하는 건 위험한 일이니, 뼈대 있는 얘기는 하지 않겠다.



그럼에도 실제 우리 주변의 장애를 가진 이들을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남의 일이라고 여기는 것도 자유지만,



올바른 버스를 타기 위해 다시 묻는 번거로움을 피하려고 마을로 걸어간다 ...
내가 읽을 수 없고, 쓸 수 없고, 내 주위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말할 수조차 없는 상황에 바져 있다는 것에 대해 허공에 대고 푸념한다. 내 집으로 돌아간다. ...
집 안으로 들어가면, 다시 안전하다. 거울 속에 있는 내 자신을 힐끗 본다. 나를 아는 누군가를 보는 것은 좋다. 내가 꽤 평범하다는 것을 누가 알랴. (5-6쪽)



이러한 글을 읽을 때면 마음 아프다. 공감해줄 필요는 없지만 안 해줄 이유도 없지 않은가.


사실 pc주의는 내가 아는 선에선 좋은 사상이다. 그런데 에브리타임에서 논쟁되는 글을 보면 내가 아는 pc주의가 아닌 거 같다.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 싶기도 하고 그래서 더 할 말이 없다. 아직 내가 본 우영우는 드라마 속 이준호와 키스씬을 가진 장면이다.



아래 책에서 하나 주목했던 부분이다. 사실 일반인들의 도움과 배려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우영우에선 권모술수에게 대변한 일반인의 입장을 이야기 하는데, 장애인 스스로도 책임지고 노력할 부분이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한 아이가 마을에서 버스 정거장으로 전화했다. 그는 타고 갈 버스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답은 너무 복잡했고, 그는 외쳤다. “아니, 당신은 천천히 말해야 해요. 나는 정신지쳉예요. 당신도 알잖아요.” (35쪽)



굉장히 멋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위 사례는 지금처럼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대중교통을 일목연하게 정리되는 시대가 아니었을 거다. 그렇기에 위와 같이 자신의 장애를 인정하고 밝힘으로 도움을 청하는 건 멋지다고 생각한다.



장애를 가진 이가 일반 사회에 녹아들긴 힘들다. 토론 때 어떤 사람이 그랬다. 장애를 가진 이에게 정당한 노동의 자리를 마련하는 비용은 일반 사람의 두 배가 든다고. 그 사람은 이어서 말했다. 자본주의 논리상 자신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선진국인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것도 하나의 국력이라고 했다. 개도국의 장애인과 우리나라의 장애인이 다른 노동 환경을 가진 건 한 나라의 국력을 증명하는 사례가 된다고 말이다.


들으면서 놀랐다. 저런 관점으로 접근할 수 있구나.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확실한 건 일반 사회에 장애인이 녹아들어 노동을 하는 건 그만큼 어렵다는 거다.



많은 수의 마을 사람들은 마을을 벗어나면 심각하고 분명한 불편을 겪을 것이다. 그들은 다르고, 아마 읽거나 말하거나 또는 돈 버는 것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마을 생활의 대안은 흔히 몇몇 종류의 장애를 위한 시설 또는 특별히 격리된 삶이었을 것이다. 일생 동안. (45쪽)



그렇다고 시설 속에 가둘 수는 없는 거다. 마서즈 비니어드 섬을 우리나라에선 찾을 수도 없다.


어떤 거든 항상 선이 있다. 그 선을 적당하게 유지하는 건 언제나 어렵다.




12485461.jpg?type=m3&udate=20171111 외로움과 시설을 넘어서저자닐스 크리스티출판울력발매2017.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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