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일기
어쩌다 새해가 밝았다. 어쩌다 일주일이 훌쩍 지나갔다. 새해가 시작되고 10일이라는 시간이 벌써 지나갔다. 이 모든 게 정말 어쩌다가 일어난 일만 같다.
나는 어쩌다 인도를 가게 되었다. 어쩌다 인도 여행을 했고 처음으로 난 여행자가 되었다. 내가 가진 편견과 싸웠다. 내가 생각한 것과 달랐다. 내가 다른 나라를 갔다면 여행자라고 생각했을까 생각하니 아닐 것 같았다. 나는 지금까지 여행객이었다. 손님으로서 타국을 방문했고 관광객이었다.
무슨 차이가 있냐고 한다면, 글쎄. 아마 이 얘길 하려면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사실 귀국한 지도 벌써 일주일이 넘어갔기에 기억이 희석되고 있다. 그렇기에 그냥 조금 끄적이고 싶다. 오랜만에 브런치를 들어왔고 일기를 쓰게 되는것인데
어디서부터 얘길해야 할까. 일단 영화제부터 얘기를 해야할 것 같다. 인도에서 열린 작은 영화제가 있다. 작다라고 표현하면 그 영화제에겐 실례가 될 수도 있는 것이지만 왠지 이걸 붙이지 않으면 내 스스로가 머쓱해지기도 해서다.
연말, 종강, 여러 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영화제가 열리는 날은 12월 29일, 나는 26일에 출국하는 비행기를 예약했다. 그게 19일이었다. 그러고 하나씩 준비를 했다. E-visa를 빠꾸 먹어서 4만원을 날리기도 했다. 시간이 없어서 도착비자를 그냥 하기로 했는데 훨씬 편했던 것 같다.
말라리아 약을 샀고 (5만원이나 하는 건데 부작용 얘길 듣고 복용하진 않았다) 장티푸스 예방 접종도 맞았다. 다른 예방주사는 시간이 맞지도 않아서 맞질 않았다. 배드버그 용액 같은 것도 샀다. 짐은 어떻게 할까 하다가 책가방을 하나 챙겼다. 그 안에 신발주머니 같은 가방을 하나 챙겼다. 내 트로피 챙겨올 가방이었다. 사실 한국에서도 유행은 이미 지나간 신발주머니 같은 가방이었고 인도에서도 역시나 나 이외에는 본 적도 없었다. 나는 트로피 세 개를 신발주머니 같은 가방에 넣고 인도 곳곳을 걸었다.
어쨌든 그렇게 출국했다. 인천공항에서 오후 12시였던 것 같다. 공항에서 간단하게 냉면을 먹었다. 한식을 오래 먹지 못한다는 생각에 먹은 거였는데 기내식이 생각보다 잘 나왔다. 괜히 공항에서 먹었나 싶기도 했고. 그렇게 9시간 비행을 통해 인도에 도착했다.
미세먼지는 400이 넘었던 것 같다. 작년 경북 지역에 큰 산불이 났다. 안동에 살았던 나는 친구들에게 소식을 물었는데 당시 미세먼지 농도가 300-400이 되었던 것 같다. 인도의 뉴델리는 매일 산불이 나는 수준의 미세먼지 속에서 살고 있던 거였다. 이륙하기 전 바라본 뉴델리의 상공은 정말로 뿌옇다 못해 황사 같기도 했다. 이게 맞나 싶기도 했다. 여긴 뭐지?
내가 챙겨온 마스크는 두 개였다. 사실 내 기관지가 못 버틸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관광객이 아니면 마스크를 쓴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어째서 이 사람들은 가래 침을 뱉으며 콜록이면서도 마스크를 쓰지 않는 걸까. 그 이유는 사실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인도는 계급 제도가 남아 있는 곳이었다. 계급이 나뉘었다는 뜻은 단순히 신분의 차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금의 사회에선 돈이 신분을 증명하기도 하는 것처럼 인도도 비슷한 듯했다. 우리나라처럼 서울역에서 보이는 거지나 노숙자가 여기선 곳곳에서 보였다. 길 가다가도 보였다. 사실 거지가 아니라면 죄송하지만 길에서 그냥 잔다. 뉴델리의 빠하르간지에선 들개도 옷을 입고 있는데 들개보다 더 얇은 옷을 입은 사람을 보기도 했다. 곳곳에선 쥐가 돌아다니기도 했다. 길에서 무언가 움직인다 싶으면 그게 쥐였다. 고양이가 생각보다 많은 동네였는데도 쥐가 많은 것도 신기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나의 눈엔 그게 공존으로 보였다.
자연 위에 길을 닦고 길을 만든 게 우리, 인간이었다. 사실 자연 위에선 우리 모두 동물인 건데, 이곳 인도에서는 그 공존이 너무 자연스러운 곳 같았다. 개도 고양이도 쥐도 인간도 그저 길 위에 같이 있는 거였다.
그게 그냥 기억에 남는다. 위생이라는 이름 하에 우린 너무 많은 지적을 한 건 아닐까. 어쩌면 이 사람들에겐 이게 가장 자연스러운 것인 건데 말이다. 물론 현대의 관점에서 위생과는 거리가 멀 수는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도 저랬던 풍경을 가진 적 있지 않았을까. 댕댕이와 함께 길을 걷는 게 오히려 더 자연스럽던 그런 시대 말이다. 목줄을 묶고 소유자와 점유자로 나눈 시대는 사실 오래되지 않았을 지 모른다.
또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아이들이었다. 송전탑 아래에서 발야구(?)를 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내가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너도 할래?"라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
물론 함께하진 않았지만 나는 그 모습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신발도 없이 공놀이를 하는 이 아이들은 사실 너무 행복해 보였다. 우리의 기준에서 이들은 행복하면 안 될 거라고 생각했다. 돈도 없고 신발도 없고 송전탑 아래에서 건강에도 나빠 보였으니까. 그런데 정말 순수하게 행복해 보였고 웃음이 예뻤다. 학원에서 일하고 있는 내겐 학원생보다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아이들이 더 행복해 보였다. 왜일까. 분명 학원생들이 옷도 따뜻하게 입고 먹을 것도 건강도 그 어느 하나 부족하지 않는데
여기 아이들이 어째서 더 행복해 보일까. 한 아이가 공을 치자 공은 도로로 날라갔다. 도로에는 버스가 간혈적으로 운영하는 곳이었다. 외야수(?) 포지션의 아이는 버스를 조심하면서 공을 가지러 갔다. 공을 가진 곳은 송전탑 바로 아래였고 그 아이는 역시나 맨발이었다. 포수를 향해 던지는 그 아이의 팔 시위는 야구선수처럼 쭉 뻗었다. 멋진 폼에 비해 제구력은 아쉬웠다. 포수까지 바로 전달되진 않았지만 타자가 점수를 내지 못하게 진루를 막을 수 있었다.
그 아이들의 옆에는 큰 사슴(?)이 풀을 뜯고 있었다. 정말 엄청 큰 사슴이었다. 뿔도 너무 컸고. 물어보니 엘로크?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이해는 하지 못했다. 키우는 거냐고 하니 그 사람들은 프리라고 대답했다. 서로 어색한 영어를 했지만 의미는 통했던 순간이다. 이 사람들에게 키운다는 개념은 없을 수 있겠구나. 나무 위에는 원숭이들이 있었다. 원숭이 가족들이 아이들처럼 공을 던지진 않았지만 나무 위에서 각자 재밌게 놀고 있었다. 여기의 아이들은 원숭이를 바라보고 사슴과 함께 지내면서 살고 있구나. 우리는 동물원에 가야지 사슴과 원숭이를 만날 수 있는데.
원숭이는 친절하지 않았다. 침을 뱉기도 했다. 침을 맞은 한 인도인(내 눈에는 사실 인도인인지 외국인인지 구별이 안 되지만 아마 인도인일 확률이 높으니까) 남자가 웃었다. 옆에는 커플로 보이는 여자가 있었는데 자신이 침 맞은 걸 웃기다는 듯 그냥 웃었다. 여자도 웃었다. 원숭이는 떠났다. 그 인도인은 화내지 않았다. 그냥 비를 맞는 것처럼 자연의 일부로 여기는 듯했다. 어쩌면 진짜 자연의 순리 아닐까 싶었다.
원숭이는 초등학생 저학년 정도의 덩치를 가졌다. 그리고 내 가방을 뺐으려고 했다. 쇼핑백을 내가 가지고 있었는데 나에게 달려들었다. 다행스럽게도 속도를 내서 도망치니 더는 쫓아오질 않았다. 나는 자연에게 도둑질 당할 뻔했다. 사실 그 안에 든 물건은 지갑이나 여권 같은 자연에게선 쓸모없는 것 투성이인데.
나는 사실 쓸모없는 것들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이곳에선 신발도 어쩌면 사치였다. 나는 손으로 밥을 먹질 못해 항상 스푼을 요구했다. 화장실에서도 나는 화장지(휴지)를 사용했다. 매일 씻어야 했고 옷도 손빨래라도 항상 해야 했다.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을 난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인도인에게 어쩌면 쓸모없는 것들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요구했던 거였다.
돈이 중요하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사짜거나. 그렇지만 돈이 최우선일 필요는 없었다. 누군가에겐 고작 28년 살아온 인생이지만 내가 다시금 내린 결론이었다. 나는 사실 돈만을 우선했다. 돈만을 좇았다. 돈이 제일 중요했다. 그런데 정말 나는 너무 안녕했다. 내 삶이 너무 안녕할 땐 인도에 가보라는 어떤 유튜브의 말이 정확했다. 내가 가진 것에 난 감사할 줄 몰랐으니까.
한국에 귀국하니 1월 2일이었다. 사실 1일부터 물갈이를 하는 바람에 2일까지 계속 고생했다. 화장실을 순수하게 10번 이상은 갔는데 다행스러운 건 비행기 안에서는 괜찮았다는 것이다. 문제는 인천공항 도착하고 나서 다시 시작되었다는 것인데, 그렇게 3, 4일 주말 동안 회복하니 괜찮아졌다. 그러고 일주일은 정말 아무것도 안 했다. 아무것도 안 하긴 그러니까 학교에 갔다. 도서관 가는 느낌인 것이다.
2년 뒤 인도를 다시 가볼 생각이다. 그때가 되면 난 서른이 된다. 그때 난 히말라야를 볼 것이다. 그리고 이번 여행에서 받은 감사함을 베풀고 싶다. 물론 사기도 많고 나의 돈을 노리는 사람들은 너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나에게 가장 많은 가르침을 준 곳이 인도인 것 같다. 진짜, 사실 돌이켜보면 강행군의 연속이었지만 말이다. 호텔 사기에 타지에서 싸움도 해보고(?) 게스트하우스(450루피, 한국돈으로는 1만원이 안 된다)에서 잠을 자보기도 했다. 게스트하우스가 뭐가 특별하냐고 하겠지만 침대가 족히 16개는 되었다. 따뜻한 물이 안 나올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비누나 샴푸 같은 게 당연하지 않은 수 있었다.
인도에 26일부터 1일까지 있으며(1일 20시에 비행기를 탔다) 잠을 매일 평균을 내리면 3시간 잤을 것 같다. 사실 마지막 날을 제외하곤 대부분 제대로 자질 못했다. 마지막 날은 그 사회에선 비싼 곳에 가서 잠을 잤으니까 컨디션이 괜찮았다. 그리고 저녁을 순수하게 못 먹었던 게 3일은 되었다.
그럼에도 그냥 지금도 신기하다. 잊지 못할 장면들이 있다. 그게 그냥 이번 여행에서 얻은 가장 값진 기억일 것 같다. 어쩌면 처음으로 스스로 혼자 떠난 여행이어서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본, 몽골, 미국, 대만을 혼자 갔다면 이런 경험을 얻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여행자라는 느낌을 못 받았을 것 같다.
얘기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어쩌면 유한하기 때문에 모든 것에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아쉬움이 있어야 만남이 지속된다는 말을 난 좋아한다. 연인과 헤어지기 싫은 건 아쉬움이 있기 때문이니. 나는 인도에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