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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호 Mar 11. 2023

내 손엔 사과가 들려있다

그냥 일기

내 손엔 사과가 들려있다. 사과는 붉은빛을 띤다. 그 빛을 따라가다 보면 덜 붉은 부분이 나온다. 초록 부분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사과를 흐르는 물에 씻어도 변함없다. 붉든 초록이든 사과는 사과다.


나의 사과는 불그스름하기보다는 초록에 가까웠다. 능금이란 말보단 아오지, 어차피 이런 말 해도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초록 사과는 미숙해 보인다.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한 붉은색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울예대에서 실기 주제는 36.5였다. 사과가 빨갛게 된 것을 정상 체온인 36.5도로 비유한 학생이 있었다. 난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같은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그 친구는 서울예대에 현역으로 들어갔다.


친구라고 적지 않는 이유는 친구가 아니어서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 친구의 몸엔 늑대가 그려져 있었다. 뭐, 이런 얘길 적으면 저격밖에 안 될 것 같다. 사실 저격할 것도 없고 그냥 내 기억에 의존해 묘사하는 거지만 너무 뚜렷한 특징이다. 어쨌든 친구도 아닌 그 친구에게 질투와 자격지심을 느꼈다. 난 사실 서울예대에 수시 원서도 넣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땐 동국대가 가고 싶었다. 수시 발표 전, 엄마는 무당을 만나고 왔다. 서울에 대학 원서가 하나 붙는다고 했다. 여섯 개의 원서 중 하나라, 무당이 난 용하지 않다고 믿었다.


그 말은 사실이 됐다. 엄마는 자꾸 내게 붉은색을 강요했다. 이것도 무당한테 들은 걸까. 무당이라고 적으면 화내려나. 무슨 보살님인가. 신내림이란 게 어떤 건지 잘 모르지만 어쨌든 맞춘 것에 대해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동국대가 아니었다. S대 면접 보러 갈 때도 동국대 실기 보러 갈 때도 엄마는 내게 붉은색 팬티를 강요했다. 상의도 붉은색으로 입히고 싶어 했다.

 

붉은색이 뭐라고. 사과가 붉어야 한다는 건 편견인데 빨간 사과가 맛있어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선생님은 내가 써온 시를 쭉 보더니 한 줄만 빼고 다 지웠다. 남은 한 줄을 보았다. 안녕, 빨강아. 선생님은 빨강의 세계를 써오라고 했다. 2018년에 주어진 숙제는 2023년까지 해결하지 못했다. 안녕, 빨강아라는 제목의 시는 몇 년의 수정에도 퇴고가 완성되질 못했다. 아마 빨강의 세계를 그릴 때면 나도 등단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공주는 나한테 글을 포기하지 말라고 한다. 나에겐 입버릇처럼 사과가 달려있어 공주에게 자꾸만 사과를 주었다. 미안이라는 말은 누군가를 지치게 만들기 좋았다.


나의 미숙한 사과는 꼭 초록색이었다. 덜 익은 사과는 상대가 맛보기에도 맛이 없었다. 보기에도 좋지 않았고.

 

내가 사과가 헤펐나. 사과가 헤프다니, 이런 비문이 존재할까. 캡스톤 시간 졸업작품 제목을 생각했다. 넌 언제나 파랗지만. 나쁘지 않은 듯했다. 예전 수험생 시절 한 친구는 나의 첫 시집 제목을 지어줬다. 두 글자였는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두 번째 시집 제목도 정해줬던 것 같은데 그것도 기억나질 않는다. 그건 몇 글자였더라. 그 친구는 몇 년 끝에 서울예대에 들어갔다. 사실 그동안 포기 안 한 걸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면으로 하지 못할 사과를 글로라도 정하고 싶다. 어쩌면 내 안의 부정적인 감정의 최대화였을지 모른다.

 

문창과 실기나 수상뿐만이 아니다. 최근 진용진의 없는영화를 보다 주연 배우의 낯이 익은 사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단편영화를 같이 찍었던 배우였다. 그때의 난 조단역이라는 이름 하에 엑스트라에 불과했다. 그때의 그 배우는 조연이었다. 이 기분을 뭐라고 형용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긍정적인 감정은 아니었다. 장편독립영화를 찍었을 때 한 여배우가 있었다. 같은 촬영 날이 아니라 얼굴은 본 적 없었지만 그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이었다. 그는 진용진의 없는영화 어떤 편에서 주연이었다. 나만 정체하고 있는 기분을 느꼈다. 그때 독립영화에서 나는 이미지단역이었으니까.


최근에 운이 좋아 광고 영상을 찍었다. 세브란스 안과 병원이었고 주연은 유명한 배우였다. 헬창인 친한 친구가 내게 물었다. 그거 세브란스 진짜 맞아? 산하나 그런 거 아니야? 기분이 나빴다. 그 말이 며칠 동안 방 안을 머물고 있다. 머물고 있던 말을 붙잡아 노트북에, 한글 문서에, 글로 묶어뒀다. 너무 친한 친구이기에 그 말이 아팠다. 매일 얼굴 보니까 내가 만만해 보이냐. 상상의 끝은 항상 엉망이었다. 뱉을 수 없는 말들을 글로 쓰면서 그 친구에게 사과를 바란다. 절대 진심은 아닌데, 가까운 친구니까 내 노력을 더 인정해줬으면 했다. 아니, 더 알아줬으면 한다. 광고 진행 2주, 3주 전부터 난 극도의 긴장 상태였으니까. 힙찔이 역할을 위해 유튜브에서 힙찔이를 부캐로 키우는 뷰티풀너드의 멘스티어도 정주행했다. 걸음걸이도 연습했다. 어떻게 걸어야 힙합과몰입러로 보일까. 리듬은 어떻게 타야 할까.


촬영은 언제나 올곧지 않았다. 사과를 이리저리 둘러보면 꼭 보이는 흠처럼. 온전하지 않은 빨강과 미세한 초록, 노랑 따위의 흔적들처럼. 피디는 나보고 말했다. 일본 드라마 여주인공처럼 눈 떠주세요.

혹시 하이틴 말씀하시는 걸까요?

맞아요.

혹시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맑은 눈의 광인처럼 눈 크게 뜨지 말까요?

한번 떠보시겠어요?

(눈을 크게 뜬다)

네. 그렇게 말고 어, 사랑하는 사람을 본다고 생각해주세요.

넵. 알겠습니다.

나는 최대한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했다. 눈앞에 유명한 배우 말고. 카메라 말고. 이건 공주다. 사랑스러운 강아지다. 댕댕이다. 역부족이었다. 영상 가편집을 보았는데 내가 봐도 너무 못 살렸다. 현장에서 바뀐 컨셉은 내가 보았을 때 내 부족한 점을 극대화시켰다. 영상 속 나는 어떤 컨셉인지 분명하질 않았다. 작은형은 말했다. 어떤 컨셉인지 모르겠지만 제일 처음 나오는 환자라 임팩트는 확실하네.


부족한 점이 자꾸만 보이자 다시 연기를 배워야 함을 느꼈다. 저번 학기 종강 전에 상계에 있는 연기학원을 청강했다. 청강은 무료니까. 근데 1시간도 안 되었던 것 같다. 이걸로 무엇을 보고 판단하라는 걸까. 가격은 착했다. 고민하기로 했다. 그렇게 3월이 왔다. 사실 잊어버렸다. 방학 동안 나름 유의미하고 바빴으니까.

 

사과가 글의 주제지만 오늘도 일기를 썼다. 나의 일기는 항상 사과를 요 할지 모른다. 오늘도 누군가는 내 글을 보면서 기분이 나쁠지도 모른다. 이런 걱정투성이에 사과를 빈번하게 하는 소심이 같은 나에게 공주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다. 나의 부족한 점을 커버해준다. 공주한테만큼은 사과가 아닌 행복만을 주고 싶다. 받은 게 과분한 2월이 지나갔다. 봄이 시작되는 오늘인 3월도 함께 즐거웠으면 좋겠다.



그냥 귀여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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