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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호 Apr 06. 2023

말하는 감자는 오늘도 걷고

끄적끄적

같이 무언가를 한다는 건 어려웠다. 같이 하는 것 중에서도 같이 걷는다는 건 그나마 만만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걷는 게 만만하진 않았다. 그렇지만 걷기가 만만한 이름인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만만한 이름은 굳이 동물로 따지면 개구리나 쥐 같아서 쉽게 실험에 사용되고 해부된다. 어떠한 목적이나 이유에 의해 필요를 강제되는 인생은 우리가 함부로 동정으로 추파를 던지기도 애매하다. 결국엔 그 목적은 발전이고 그런 세상을 우리는 풍요라고 이야기하니까.


과학의 발전은 과한 풍요를 불렀다. 동행이 어려울 만큼 말이다. 이과와 문과가 나뉜 걸 생각해본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자연과학을 모른다는 건 자연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인문사회를 간과하는 일 아닐까.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은 플러스와 마이너스처럼 결코 반대되는 개념이 아닌 함께 더불어 짊어지고 같이 발전하고 세상을 행복하게 만드는 요소인데. 


동행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에게 행군은 지금도 신기한 경험으로 남았다. 누군가와 함께 걷는다는 건 초인적인 힘을 만들었다. 혼자였다면 포기했을 법한 긴 거리 동안 무거운 짐을 지고 완수했다는 건 단순히 군인이라는 신분적 능력으로 포장할 수 없었다.


그런 동행은 세상을 행복하게 만드는 힘이라고 믿었다. 함께라면 가능하다, 함께라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 꼭 보스를 무찌르기 위해 모인 파티처럼 말이다. 세상이라는 보스를 향해 전사, 마법사, 궁수, 치유사가 모인 파티. 그런 파티는 꼭 세계의 축소판 같았고 (연극) 무대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무대, 단상 위에 배우와 스태프가 하나의 작품으로 융화된 완성품. 하나의 그림을 위해 모두가 똑같은 속도로 달려가기. 잘 만든 연극 하나는 어느 배우 하나 작품에서 튀지 않고 작품의 주제를 향해 일관되게 달려 나간다. 그 모습은 나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줬고 관객이었던 나는 그 기분에 매료됐다.


매료된 난 학교 동아리에서 연극을 했다. 모두가 무대 상영을 위해 연습했다. 일주일에 5일씩 연습하곤 했던 것 같다. 30분 안 되는 공연이지만 많은 대사가 있었고 많은 동선이 있었다. 기계적으로 연습하던 중 찰리 채플린이 떠오르기도 했다. 평일 저녁은 빈 강의실에서의 연습이 일과였다.

 

당시 대학교 4학년이었기에 항상 의문과 죄책감이 뒤따랐다. 사실 3학년 2학기인 게 등록 학기 기준이지만 어쩌다 4학년이 먼저 온 탓에 취업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확 다가왔다. 불안을 누르기엔 역부족이었다. 동아리엔 아무도 나처럼 고학번도 고학년도 없었다. 스무 살과 함께하는 회식에선 눈치가 보였고 동아리 내에선 연기 연습 말곤 그 어떤 친화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동행에 실패했다. 무대에 극을 올려도 어떠한 행복도 없을 것 같았다. 동아리 내에서 난 혼자였고 극을 올려도 마찬가지인 결과가 상상됐다. 하나의 작품을 위해 똑같이 노를 젓는 배에서 난 탈선하고 말았다. 깊은 파도가 기다리는 바닷속엔 어떤 빛도 없이 끊임없이 나를 잠식하게 만들었고 공연 한 달 전 동아리를 탈퇴했다.

 

요즘도 그때를 생각하면 잠이 뒤숭숭할 때가 있다. 닫아놓은 창문으로 갑자기 파도가 들이닥칠 것 같기도 했다. 파도에는 세이렌처럼 어떤 음성이 담겨있을 것만 같아

     

(연기가) 불쾌해요

     

지울 수 없는 말들이 이불 속에 습기처럼 남았다. 2개월 동안의 연습이 한여름 밤의 꿈 같았다. 어디선가 꽂 즙을 잘못 뿌린 요정처럼 나의 운명도 장난질 당한 것 같았다. 내가 없어도 출항한 배는 무사히 무대에 도착했다. 사실 연극 무대를 보질 않았기에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는 모른다. 그리고 내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도 없었을 것 같았다. 결국 동행에 실패한 패배자는 말이 많았다. 그러곤 변명했다. 정극은 저랑 안 맞아요.

 

돌아보면 나는 동행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같이 걷기 위해선 준비가 필요했다. 손을 잡는 일에도 용기가 필요하듯이. 시간이 약이라고 하지만 그것보단 경험이 처방전이다. 함께하기 위해선 상대방의 발을 맞춰서 걸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 날씨에 맞는 옷을 입어야 덥지도 춥지도 않고 오래 걸을 수 있다는 것. 목표까지 한발씩 내딛는 것만큼이나 상대방과 담소도 중요하다는 것. 고양이처럼 혼자서 도도하게 걸어 나가는 건 일행과 멀어지기 쉽다는 것.


단순한 진리를 20대 중반이 되어서 알았다. 사실 아직도 실천이 어렵다. 상대방을 배려한다고 천천히 딛는 걸음이 오히려 상대에게 독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빠른 것보단 천천히 나아가기로 했다. 불쾌한 연기가 아닌 모두에게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연기를 할 때까지. 장마가 끝나면 습기를 머금은 방이 눅눅해지질 않듯 나 또한 그렇게 될 거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동행할 마음가짐이 이제야 된 것 같다. 꽃이 활짝 핀 봄이 왔고 난 다시 실수를 반복할지 모른다. 이 글은 윤동주처럼 참회록이 되진 못할 거다. 그렇지만 이젠 천천히 걷는 연습부터 할 거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고개를 똑바로 치켜들고. 한 걸음씩 또박또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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