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을 놓아버린다는 결심
엄마가 교회에서 늦은 한 날, 예외는 없다. 아버지의 통과의례는 가차 없이 시작이다.
항상 엄마는 아버지께 잘못했다고 빌었지만, 오늘 밤만은 절대로 빌지 않는다.
단지 엄마는 멍하니 기도하듯 웅얼거리다 우리를 바라보더니 잘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새벽녘에 언니는 화장실 문이 잠겨 있고 그 안에서 엄마가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열네 살 여름날의 끝자락에서, 마침내 엄마는 화장실 문을 걸어 잠그고 수십 알의 약을 삼켜 넣었다.
우리는 눈물과 콧물이 섞인 손으로 문을 두드리고, 발로 걷어차고 매달리다가, 비명을 지르며 손톱으로 문을 박박 긁어 댄다. 언니는 급기야 두 발로 벽을 타고 문에 매달린 채 전신이 비틀린 짐승처럼 울부짖는다.
아버지가 쇠망치로 문을 부수고 내다 버린 허수아비처럼 늘어진 엄마를 질질 꺼낸다.
엄마는 무엇이 그리도 급했던 것일까.
욕조에 받아 놓은 찬물과 함께 약을 삼킨 모양으로, 그 곁에는 목욕 바가지가 나뒹굴고 있다.
엄마의 입 언저리에 달라붙은 하얗고 메마른 침들이 선명하고 매서운 독처럼 내 전신 곳곳에 녹아들고, 나조차 엄마와 함께 묶여 현실의 생에서 떠나갈 것만 같다.
집에 있으라는 아버지를 처음으로 쏘아보며 아버지 차에 함께 올라타 구급차를 따라간다.
열대야의 뜨거운 공기가 누르는 정적의 밤에 희고 좁은 병원의 복도에서 엄마를 기다린다.
처절한 공포 속에서도 아직 어린 나의 전신에 감겨오는 뜨거운 피로감 속에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나 자신을 원망한다.
길고 긴 호스가 엄마의 입에 물리고, 간호사는 엄마의 곳곳에 들어 있는 멍 자국과 상처들을 가만가만 살피다, 옷에 누더기처럼 엮인 핏자국을 말없이 바라본다.
"어이 이봐! 애 엄마는 좀 어때! 나아졌어?"
간호사를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얼핏 든 선잠에서 깨어난 나는 부스스 고개를 든다.
그 찰나에 나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간호사의 눈을 보았고, 그녀의 눈은 깊은 지옥의 끝으로 나를 끌어내린다. 내가 미처 피할 새도 없이, 그 눈에 담긴 멸시의 빛들이 나를 찍어 내린다. 심장이 파일 듯한 수치스러움으로 나의 몸은 둘 곳 없이 흔들린다. 그 눈은 직접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왜 이 지경이 되도록 엄마를 지키지 못했느냐’는 힐난처럼 내 몸 전체를 휘감는다.
일순간에 일어난 극도의 공포, 이후의 후유증은 처참했다.
그 후 얼마간 나는 내리 울며 하루하루를 삼켜 냈다.
제일 좋아했던 합창부의 연습 시간에 노래 대신 매일 울음을 내던 기억, 연습이 끝난 뒤 이를 의아하게 여긴 음악 선생님이 텅 빈 음악실에 나를 조용히 남겨두었을 때조차,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나의 울음은 텅 빈 음악실 안에서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날 선생님의 무거운 기다림은 묵은 사진처럼 일말의 위안으로 남아 있다.
수업 시간에도 별안간 몰려드는 처절한 공포와 불안감에 안절부절못하다, 종이 울리면 뛰쳐나가 공중전화로 집에 전화를 걸어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살아 있는지 확인했다. 집에 돌아와 문을 여는 일에도 끔찍한 공포가 더해진 일상에서, 나는 엄마가 거기 그대로 있는지를 살피고, 동공의 움직임과 뒤척임을 엿보고, 또다시 그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두려움으로 기도했다.
그런 날 중 하루, 오도카니 앉아 있는 엄마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엄마, 엄마는 왜 이혼 안 해?”
“… 너희 셋을 데리고 먹고살아야 하니까 그렇지.”
자식들의 먹거리를 걱정하는 엄마가 정작 우리를 두고 떠나려 했다는 것을 열넷의 내가 이해할 수 있었을까.엄마의 그 말은 그날 간호사의 눈동자에서 보았던 환멸처럼, 엄마가 겪는 고통의 원죄는 바로 우리에게 있다는 보충 설명이자, 앞으로 생기는 모든 문제도 다 우리 탓이라는 확언 같았다.
생을 끝내려는 결심 이후, 남겨진 엄마의 삶은 불안과 집착으로 이어졌다.
아버지는 손찌검을 멈췄지만, 대신 집안일에 무관심해졌다. 언니는 눈에 띄게 말이 없어졌고, 동생은 자꾸만 삐뚤어져 갔다. 엄마는 무너진 언니를 세우고 동생을 잡아내느라 온갖 힘을 다 써야 했기에, 그나마 온전한 내가 '평범한 모범생'으로 자라 주기를 바랐다. 내가 원하는 것, 나의 의견은 엄마의 원고지에 빠져나온 글씨처럼 지워지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 나는, 우리 집에서 아버지의 폭력을 벗어난 유일한 사람이었다. 언니도 남동생도 아버지의 폭력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나는 아버지의 무서움을 피하고자 뜻을 거스르지 않았고 아버지는 대놓고 나와 형제들을 차별했다. 나는 나름의 생존 방식으로 버텨왔지만 나는 단지, 그 모든 전쟁에서 살아남은, 전혀 피해받지 않고 안락하게 사는 유일한 존재였을 뿐이었다. 엄마는 내가 다른 형제와의 부당한 처우를 따질 때마다, ‘너에게는 아버지의 사랑이 있지만, 언니와 동생은 그런 것을 받지 못했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나는 당신이 목숨을 걸어 지켜낸 삶에 대해 보상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지만, 나의 모자람은 끝없는 죄책감과 수치심이 되고, 지독한 자기혐오로 이어졌다. 나의 그 어떤 것도 엄마를 만족시키지 못했고 완벽하게 행복한 삶으로 데려다 놓지 못했다.
나는 이후의 생에서 창자 힘줄마저 끌어내 버티는 순간에서조차, 정작 내 자신에게는 늘 모자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