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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운 Feb 19. 2022

예민한 자의 인생 복기 4.

언니의 두 다리


나의 초경이 막 시작되었던 그 해 여름은 스산한 바람이 유난히 빨리 찾아왔다.


한 날의 여름밤, 

시계가 밤 12시를 넘기자 나의 아버지는 팔뚝의 소매를 걷어 올리고 당신이 몸 담은 학교에서 사용하는 각목을 부여잡았다.

『여고 학생부 주임 경력 15년』, 그에게 주어진 자랑스러운 완장 같은 그것은 여느 때처럼 그의 꽉 진 주먹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끼역 끼역... 대문이 열리는 쇳소리는 마치 집 안으로 들어서는 이의 발목에 거는 쇠사슬 소리 같다.

철대문 소리를 뒤로 하고 언니가 들어서자, 나는 엄마가 억지로 닫은 방문 뒤에서 동생의 손과 머리를 꼭 끌어안고 남은 한 손으로 가까스로 문틈을 열려 애써본다.


철썩! 이내 바위 같은 손이 언니의 안경을 날린다. 스프레이로 한껏 말아 올린 언니의 노랗고 긴 염색 머리카락이 아버지의 손아귀에 잡힌다. 돌아선 얼굴을 바로 하며 언니의 눈은 불같이 아버지를 쏘아본다.


철썩! 이가 튀어나오고 귀가 터진다. 

다시 철썩! 본격적으로 언니의 몸이 아버지의 손에 감긴다.

피가 분수처럼 흘러 양 촛물처럼 너울거리고, 흐느적흐느적 거리는 언니를 적시며, 

언니의 그 매섭던 눈매가 흐려지기 시작하고 동공이 보이지 않는다.


언니의 다리는 이내 힘없이 주저앉는다. 

나는 사람의 몸이 그런 각도로 부서지며 내려앉는 걸 처음으로 보았다. 

숨도 잘 쉬지 못하는 언니가 시체처럼 나뒹굴지만, 아버지는 다시 쓰러진 언니를 걷잡을 수 없이 발로 찬다.


“그만해요 애 죽어요 죽어!!” 

엄마의 찢어지는 오열.


“그년들 싹 다 잡아와! 안 데려오면 내 이년 오늘 죽인다.” 

아버지의 서늘한 협박.


그 새벽에 신발도 제대로 못 신고 뛰쳐나간 엄마가 언니의 친구들을 데려올 때까지도 언니의 기절한 몸에 매질은 계속되었다.

언니의 몸이 사정없이 나뒹굴고 있지만 나는 문에 코를 박은 채 후들후들 온몸을 떨어 댈 뿐. 

또다시 목석같이 딱딱하게, 껌처럼 눌어붙어 있을 뿐. 

한 번 깜빡이는 짓조 차 하지 못하는 나의 동공만이 가까스로 언니를 지켜보고 있을 뿐.


엄마를 따라 들어온 언니의 친구들은, 언니를 보자마자 현관문 앞에서 무릎으로 기면서 들어온다.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 땅에 코를 박고 싹싹 빈다. 


“아버님,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같이 놀지 않을 게요. 제발 살려만 주세요 아버님...”

언니 친구들의 눈물과 콧물이 피의 마루에 떨어진다.


다음 날 아침, 언니가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자 아버지는 언니를 안아 내리려고 한다.


“싫어... 진짜 싫어...”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언니는 사지가 뒤틀려 버린 사람처럼 온몸을 미친 듯이 비틀어 짜낸다. 

처절한 저항의 몸짓이 아버지를 매섭게 밀어내고, 아버지 또한 주춤주춤 물러나 도망치 듯 나간다.




시퍼렇다 못해 썩은 검은색이 된 언니의 두 다리가 제 색을 찾은 뒤, 

그녀의 노란 긴 머리는 검은 똑 단발로, 짧은 스커트는 복숭아뼈에 딱 맞는 면바지로 변했고, 

그 큰 웃음소리와 즐거운 수다의 자리는 무거운 침묵과 때때로 내뱉는 깊은 한숨이 대신하였다.


말없이 책상 위에 하염없이 앉아 있던 언니. 

그 뒷모습 속에서 때때로 토해내던 짙은 한숨들은, 그녀가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엄마는 언니가 미국에서 대학교와 대학원을 마칠 때까지, 남의 집 가사 도우미를 자처하고 집을 팔면서까지 뒷바라지를 하였다. 


반면 나는 대학교에 들어갈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라고 엄마로부터 끊임없이 잔소리를 들었고, 결국 4학년 졸업반 가을 학기에 엄마의 강요에 못 이겨 이른 취업을 했다. (회사 면접까지 따라왔던 엄마였다.)


내 부모는 그 아사리 판에서 쓰러질 듯 흔들리던 언니가 도망치듯 선택한 미국행, 그리고 내 남동생의 호주 워킹 홀레 데이를 위한 비행기 값을 집의 차를 팔면서까지 마련해야 했기에, 내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나 또한 언니와 같이 유학을 꿈꿨음에도, 그 꿈은 어학연수로, 대학원 입학으로, 원룸에 독립하는 것으로 점차 현실과 타협하려 줄여 나가려 애썼지만, 결국 그마저도 요원한 일이 되어 버렸다.


내가 취업 후 1년 반 동안 월급 88만 원을 벌면서 악착같이 모았던 1800만 원은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엄마와 아버지 손에서 한 푼도 남김없이 쓰였다. 


20대지만 아직 어렸던 나는 내 부모를 미친 듯이 원망했다.

스물다섯의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는 그때 만나던 남자 친구(지금의 내 남편)와 도망치듯 이른 결혼을 하는 것뿐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내가 엄마에게 도대체 왜 그랬냐고 물었을 때, 

엄마는 언니의 한숨짓는 뒷모습만 보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만 같던 그 다리가 생각나서 무서웠다고 했다. 

그래서 집이든 무엇이든 다 팔아서라도 언니가 두 다리로 서길 바랬다고 했다.


처음에 1년만 어학연수를 하고 오겠다던 언니는 결국 미국에 안착하고 행복을 찾았다. 

언니는 한국에서 그리운 것은 엄마가 끓여 주던 뭇국 밖에 없다고 했다. 

언니에게 큰일이 일어났던 그날 밤, 그다음 날에도 엄마는 언니에게 쇠고기 뭇국을 끓여 내였던 것 같다.


한국을 떠나 멀고 먼 그곳에서 한껏 두툼해진 언니의 웃음소리를 듣기까지, 

엄마는 그녀의 등 뒤에 대고 얼마나 많은 말을 참았나요.


언니의 그 무겁던 한숨 소리에, 부서질까 감히 만져 보지도 못하는 그녀의 등 뒤에 대고, 

엄마는 얼마나 많은 안부를 물었나요.


그리고, 언니의 그 부서진 손가락 하나 잡아주지 못한 채 오글오글 떨기만 했던 죄로 고개 숙였던 나야. 

지금 너는 잘 지내고 있니. 

몇 번이고 내게 다시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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