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운 Mar 06. 2022

예민한 자의 인생 복기 5.

아직은 다 말하기 힘듭니다.

아버지.


세 글자를 쓰고 나니 나의 아버지에 대해 쓰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일 줄 몰랐다.

내가 정의하기 힘든 사람. 판단하기 어려운 사람. 내가 사랑과 증오 양가의 감정을 가진 사람.

결국 내가 나이 마흔에 ‘경도의 양극성 장애라는 판정을 받게 한 근원이자 원가정의 가해자.

나의 아버지다.


그는 아직 생존해 있기에 나는 그에 대해 온전히 다 쓰지 못한다.

내가 여기 쓰지 못하는 치명적인 나의 기억들에 대해서는 어쩌면 그가 현생에서 떠나기 전까지, 혹은 그 후에도 쭉 쓰지 못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또한 미워한다.

내게는 한없이 다정하고 모든 사랑을 주었던 사람. (적어도 내 무의식 속 기억이 떠오르기 전까지는.)

그러나 내 엄마와 언니에게는 끔찍한 짓을 저지른 사람.

나는 그를 미워해야 하지만 미워하지 않기에 또한 죄책감이 든다. 수치스럽고 끊임없이 외롭다.


지금 그는 누가 봐도 온순하고 귀여운 할아버지다.

매처럼 크고 부리부리하던 눈은 소처럼 쳐지고 그 크던 목청은 느릿느릿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대신한다.

나의 아들은 내 아버지의 집에 가면 그의 커다란 배를 두드리며 티브이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는 나의 아들에게 내 엄마가 하는 것처럼 공부에 대한 잔소리를 하지도 않는다.

또한 그녀가 특유의 억지스러운 표정을 하면서 내 아들에게 얼굴을 바짝 대고 잘 생겼다고 과장스런 몸짓과 과한 칭찬을 하는 것처럼 부담을 주지도 않는다.

그저 밥을 먹자마자 소파에 반쯤 드러누운 나의 아들에게 좋아하는 메로나를 까주고, 한껏 게으름을 피우는 중2 소년의 옆에 앉아 미소를 띠다가 이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지금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예전에 우리 가족에게 했던 일들을 저지른 사람과는 전혀 거리가 먼 인물로 보인다. 지나간 그 모든 일들은 사실이 아닌 것일까? 내 기억 속에서 무언가 왜곡되고 과장된 부분이 있는지 슬그머니 스스로에게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가 그를 온전히 이해해야 할까? 넓은 마음으로 사랑해야 할까? 사랑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에서 내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를 볼 때마다 여전히 내 양 갈래의 마음은 서로 손을 들고 나를 흔든다.


내가 경도의 양극성 장애 진단을 받은 1년 반뒤, 상담 선생님은 내가 양가의 감정을 갖게 된 원인을 이런 그에게서 찾았다.

그로 인해 내게 맞고 잘해주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다정하지만,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척을 져버리는 성격을 갖게 된 나. 그것이 나의 최대 단점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영화 ‘국제 시장’에 나오는 주인공의 모델이었을지도 모를 똑 닮은 인생을 살았다.

44년생인 그는 6.25 피난길에 어머니의 등에 업혀 월남을 한 뒤, 나이 차가 많고 엄하며 무서운 두 형에게 두들겨 맞고 자라면서 갖은 고생을 한다. (중간에 두 누이는 일찍 돌아가셨다고 한다.)

대학 등록금을 낼 수 없는 형편의 건장한 막내아들은, 먹고살기 위해 쌀가마니를 이는 시험을 통과하여 마침내 파독 광부가 되어 한국을 떠난다.

그는 고된 광부 일을 그만 두기 위해 독일어 사전을 밤새 통째로 외우고, 통역관으로 착출 당하며 드디어 힘들었던 노동에서 해방된다. 이후 독일 대학교에서 공부도 하고 아시안게임에서 통역을 맡기도 한다. 외교부에서 통역 직원으로 잠시 근무를 하게 되면서, 독일 간호사들과 어깨동무를 한 채 예거 밤을 마시며 행복하고 찬란한 유학 시절을 보낸다.


컴퓨터가 우리나라에 막 도입되었을 때, 그는 귀국하여 독일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컴퓨터 학원을 차리고, 승승장구하며 돈을 번다. 나는 그의 낡은 사진첩 속에 그 당시 신문기사에 마치 대한민국의 안철수라도 된 것처럼 소개되어 있는 스크랩을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젊고 잘 생겼으며 패기 넘치고 힘 있고 능력 있는 대한민국의 유망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는 늘 외로웠다. 그가 어릴 때 그의 아버지는 그의 어머니를 매일 같이 때렸다고 한다. 식칼로 혹은 도끼로, 혹은 망치로... 도구도 참 다양했다. 그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무서운 두 형님들에게는 어떤 인정도, 의지도 받지 못하였다.

그는 36살이 되도록 한국에서 돈을 벌고 정착하느라 바빠 결혼을 하지 못했다. 서울 근교의 한 상업 여자 고등학교의 교사로 취업을 하고 나서야, 작지만 예쁘장하며 큰 선풍기 회사에 경리로 일하는 한 서울 여자와 결혼이란 걸 하게 된다.


외로웠던 그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어 했다. 그렇지만 마음대로 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는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는 선생님들이나 학생들을 매주 집으로 끌고 왔다.

젊고 잘생긴 내 아버지는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정말 좋았다. 그녀들은 우리 집에서 밥을 먹을 때면, 항상  앞다투어 아버지의 옆자리에 앉으려고 치열하게 서로의 엉덩이를 밀어내곤 했다. 아버지는 스승의 날이면 트렁크가 미어터질 정도로 선물을 받아왔다. 가끔씩 양말 세트 안에서 지폐 뭉치 따위가 나왔던 것 같기도 하지만, 어머니는 급하게 그것을 빼서 감추었다.


그러나 그의 동료와 상사들은 그렇지 않았다. 아버지는 오기 싫고 귀찮다는 표정을 한 교장과 동료들을 팔짱을 낀 채 우리 집으로 기어이 질질 끌고 들어왔고 엄마는 늘 그런 그들 앞에 상다리가 부러지게 음식을 차려냈다. 그들은 퉁명스럽고 부어 터진 얼굴을 하고 앉아 엄마가 만든 음식들을 게걸스레 먹고, 줄담배를 피고 술을 마셨으며, 우리에게 함부로 상스러운 말을 툭툭 던지며 오백 원 혹은 천 원을 던 지 듯 쥐어주고는 했다.


아버지는 손님이 오지 않는 주말이면 우리 형제들과 잘 놀아 주었다.

우리는 늘 마당에서 무언가를 하고 같이 실외 스케이트장이며 롤러장을 같이 갔다.

주말이면 그는 돈가스와 함박 스테이크가 맛있는 레스토랑이나 돼지 갈빗집에도 종종 데리고 갔다. 방학이면 우리 셋을 작은 포니에 태우고 한 달여간 전국 여행을 했다. 우리는 살이 익어 발갛게 허물이 벗겨지도록 바다나 산, 강에서 놀았다. 방학 내내 종일 수영을 하고, 냇가에서 가재를 잡고, 모래사장에서 달리기 시합을 하고, 갯벌에서 꽃게를 잡아 탕을 끓여 먹었다.


그렇게 그는 우리들을 사랑했지만 제대로 사랑해주는 방법을 몰랐다.


그는 촉망받는 컴퓨터 교사였지만 컴퓨터는 나날이 발전하고 그는 늙어갔다. 빠르게 변화하는 컴퓨터 기술에 능숙하지 못했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게 점점 힘들어졌다. 승진 시험에 번번이 낙방하고 그의 스트레스는 점차 극에 달하기 시작한다. 그 모든 우리 가족의 불행의 역사가 시작된 것도 아마 이때 즈음이었을 것이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닥치는 급작스런 공포의 순간들이 반복되자, 결국 그로 인해 우리 가족들은 불안의 소용돌이에 갇히고 말았다.




회복력.. 그 정도와 속도는 고통의 크기와 비례하지만 마음의 크기와도 비례한다. 또한 마음의 강함은 육체의 강건함과도 맞닿아있다.


아버지와 비슷한 체력과 성격을 가진 언니와 남동생은 아버지에게 끊임없이 저항하고 맞고 맞서고 싸웠다.

반면 작고 여린 성격의 엄마와 나는 폭력 속에서 입을 다물고 눈치를 보아야만 했으며 그와 타협하기 위해 갖은 아양을 떨며 생존을 위해 필사적이어야만 했다.



지금,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어떨까.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직접적인 타격을 크게 받았던 나의 엄마는 여전히 강박과 강도 높은 불안 속에 에워싸여 있다.

그녀는 온순한 푸우가 된 팔순의 그에게 매일같이 소리를 지르고 히스테리를 부리며 화를 낸다. 원망하고 미워하고 답답해하고 짜증을 낸다. 여성호르몬이 많아진 남자는 말대꾸도 못하고 조용히 한숨을 쉰다. 때때로 그는 하나뿐인 아들이 결혼을 하지 않아 대가 끊겼다는 것에 인생의 패배감을 느끼고, 술을 마신 뒤 훌쩍거리며 내게 전화를 걸어 푸념을 늘어놓기도 한다.


나의 엄마는 집을 나서기 전 가스 밸브가 떨어져 나가도록 몇십 번이고 쥐고 흔든다. 제일 높은 층수에 살고 있는데도 행여 도둑이 들까 창문 잠금장치를 수 없이 잡아 재낀다.

외출을 하거나 여행을 가면 이동하는 매 시간, 매 장소에서 전후로 화장실을 다녀와야만 한다. 그녀에게는 항상 옅은 지린내가 난다.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매번 화장실을 가는 그녀에게 짜증을 냈는데, 몇 년 전 그 냄새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

엄마와 언니가 살고 있는 미국에 간 적이 있다. 미국의 한 공중화장실에서 그녀는 문을 채 걸어 잠그지 않고 볼 일을 보았다. 나는 미국인들의 흘끔 걸리는 시선 속에 약간의 신경질을 내며 문을 잠그러 다가갔다.

그녀는 변기가 더러워서 거의 일어선 채 볼 일을 보는 중이었다. 용무를 마치자마자 그녀는 휴지에 침을 뱉은 뒤, 그 휴지로 자신의 뒤를 닦았다. 그녀는 항상 자신의 몸에 물이 마른다는 표현을 했다. 30대의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 장면을 보고 엄마에게 온갖 잔소리를 늘어 댔다. 근 십여 년간 엄마를 곁에서 돌보지 못한 언니는 엄마가 치매 증상으로 이어지고 있으니 한국에서 검사를 꼭 해보라고 말했다.


내가 2년 전 마지막으로 정신과를 찾았을 때, 의사는 내게 제일 먼저 엄마를 모시고 오라고 했지만 엄마는 자신이 무엇이 문제인지 전혀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현재 그녀를 매주 지켜보는 중인데 그녀는 조금씩 더 못 알아듣고, 더 잊어버리고, 더 희미해지고 있다. 나는 재작년부터 그녀를 위한 치매보험을 들었다. 아마 올해 안에는 몇 가지 검사를 받아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나의 언니. 그녀는 몇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타국에 살고 있지만, 이제 팔순이 된 아버지와 한 공간에 있는 것을 생각만 해도 여전히 숨 쉬는 것조차 힘들다고 한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평생 용서가 되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다.

언니는 아직도 아버지를 떠올리는 것조차 공포이며 엄마에 대한 마음은 무뎌져서 기억조차 하기 싫다고 말한다.


나와 언니에게 서로를 향한 최대치의 폭언은, 우습게도 각기 엄마와 아빠를 닮았다는 것이다.

언니와 내가 만약 서로에게 이 말을 내뱉는다면 그것은 아마 서로 평생 연을 끊을 작정으로 경멸의 말을 퍼부어 대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부모를 닮은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쓴다.


작년에 알게 된 아이러니한 사실은 우리 삼 형제 모두는 정신과 치료 혹은 상담의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나의 언니는 미국에서 여전히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으며, 나보다 두 살 어린 나의 남동생도 몇 년 전 공황장애를 겪고 상담을 통해 나아졌다고 했다. 언니는 꽤 부유하고 안정적인 남편을 만나 시민권을 땄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결혼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며 두 돌 된 딸아이가 행복하지 못할까 봐 여전히 불안해한다.

그리고 아버지를 닮아 욱하는 성격을 고치지 못하는 갓 마흔이 된 남동생은 올해 초 결국 비혼을 선언했다.


그중에서 어찌 보면 제일 약하고 예민한 마음을 지닌 나는 이미 중학교 3학년 무렵부터 잠을 자지 못하였다.

그러한 나는 2015년부터 정신과 약을 먹지 않으면 버텨 내기 힘든 상황이 되어버린다.

급기야 15년에 공황장애, 19년에 우울증, 20년에는 양극성 장애로 쓰러지고 회사를 무단결근하기에 이른다.

이 모든 일이 급작스럽게 닥쳤던 것 같지만 사실은 예견되었던 일이라고 나는 언젠가 내 글에 쓴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고통을 이겨내는 법 또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진화한다는 사실 또한 안다.

엄마 아버지보다 더 배운 우리들은 더 나은 현명한 방법으로 이 상황을 극복하려 애쓴다.


우리들은 최소한 알고 있다. 이러한 일이 내 생의 시대에서 끝나야 한다는 것을.

우리의 후대, 우리의 자녀들에게만큼은 반복되지 않는 역사이기를.

그렇기에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우리에게 묶인 이 빨간 끈을 끊어버려야 한다는 것을.


우리들은 더 이상 비겁하기도, 비참하고 싶지도 않다.

우리들은 과거의 삶을 운명으로 치부하며 주저앉고 싶지 않다.

그렇게 우리들은 나름대로 각자의 현생에서 ‘존버’ 중이다.


나는 오늘도 이러한 글을 쓰고 반복해서 고치며,

어리고 슬펐던 우리들에게 두툼한 위로와 따뜻한 안녕을 구한다.


이전 04화 예민한 자의 인생 복기 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