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by 배운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어.

일단, 앞으로는 내게 미안하다고 사과하지 마. 오빠 입장에서는 미안하거나 잘못된 게 없을 텐데.

나도 내 입장에서는 내가 사과할 게 없어. 서로가 너무 다른 것뿐이고.

나는 지난 15년간 우리 관계와 가족을 위해 정말 최선의 정성을 쏟았다고 생각하고 그 부분에 후회가 없어.

단지 나는 이제 내가 잡고 있던 끈을 완전히 놓아버린 것 같고, 다시 주워 담거나 이어 붙일 힘도 의욕도 남지 않았어.


오빠가 며칠 전 내게 허영에 남 시선만 의식하는 사람이라고 한 말에, 실제로 사치라는 단어는 쓰지 않았다고 했지만, 오빠가 내게 했던 말투나 행동에서는 사치 부리는 여자 그 이상의 혐오를 보인 거나 마찬가지야.

내가 치아교정을 한 날 저녁도 못 먹은 채 장을 보고 회사 선물을 바리바리 들고 왔던 그 혹한의 크리스마스이브에, 집안 정리에 정신없는 나를 두고 오빠가 TV 앞에서 알짱대지 말고 저리 비키라고 한 것도 내게는 저리 꺼지라며 밀치는 행동과 다를 바가 없었어.

그전에 했던 여러 번의 싸움에서도 오빠가 내게 보인 것은 폭력과 멸시, 무시, 혐오로 점철된 것들이었고 내게는 다 그렇게 다가왔어.


재작년에 연말 시상식 가요무대를 보다가 내가 좋아하는 BTS 무대를 직전에 두고 오빠가 마음대로 티브이를 꺼버린 행동에서도, 오빠는 나를 아이돌이나 좋아하는 한심한 여자라고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준 것 밖에 안되고, 평소 내 친구들에 대해 말할 때도 나와 같은 멍청한 부류들이라고 생각하며 무시하는 걸로 들렸고, 내 친정 집에 가서 잘 웃지도 않고 화난 듯한 얼굴로 자지 말고 빨리 집에 가자며 신경질적으로 말할 때도, 친정 엄마가 싸 주신 음식들을 보며 그걸 무거운데 받냐며 하나도 안 들어주고 씩씩거리며 오빠 혼자 버스 정류장으로 향할 때도, 15년 전 신혼 때 나랑 싸우다 '너네 집안은 우울하다'라고 했던 그 말의 연장선 상이 었다고 밖에 생각이 안돼.


오빠는 물론 아니라고 하겠고, 실제로도 아닐 수 있지만 내게는 그 모든 말과 행동들이 얼음송곳처럼 나를 찔렀고 가시처럼 박혔어. 실제로 그런 단어들을 입에 올렸건 아니었건 나를 바라보는 눈빛과 행동에서는 그 이상의 폭력을 내게 행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느꼈어.

오빠 역시 다른 어떤 부분에서 내게 그런 것을 똑같이 느꼈을지도 몰라. 하지만 처음 얘기했듯 서로의 입장 차이가 너무 크니까 서로를 탓하거나 사과하지 않기로 하자.


지나간 일을 또 들춰낸다고 말하고 싶겠지.

하지만 그 어떤 상황에서 서로가 한 번이라도 진심으로 사과하고 이해하고 용서를 구한 적이 있었다면 이런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 거야.

나는 그 모든 것들을 잊지 못했고 알알이 내 심장에 박혔어.


그럼에도 나는 15년 동안 사랑만을 바라고 살았어. 많은 돈이 필요했다면 오빠랑 결혼하지도 않았을 거야.

시부모님께 우리 신혼 아파트를 내어 드리고 집을 바꿔 살 때도, 시 부모님이랑 나와 아들이 같이 살면서 오빠가 일주일에 한 번 올 때에도, 술 마시면 소리를 지르고 후 욕조를 부시거나, 임신 8개월 때 내 목을 졸랐을 때도, 내가 쓰고 있던 안경을 빼내서 두 동강이를 내고 창문에 집어던졌을 때도, 내가 야근하고 집에 올 때마다 취해서 벌건 눈으로 나를 구박할 때도, 10여 년의 기다림 끝에 오빠는 발전했고 분명히 개선되었지만 그럼에도 환멸의 눈빛과 폭력적인 언행은 변하지 않았어.


19년도에 나한테 애 때문에 사는 거지 사랑 따위를 아직도 바라냐는 듯이 비아냥 거릴 때, 섹스리스는 나만의 문제가 아닌데 나한테 섹스도 못하는 애라며 빈정 거릴 때, 내가 집에서 속옷을 입지 않고 티셔츠만 입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더럽다고 말했을 때, 세탁한 내 속옷을 두 손가락으로 집어 올리며 더럽다고 또 말했을 때, 나는 그때 한쪽 끈을 놓았어.


그리고 2022년을 맞은 나는 이제 나머지 한쪽 끈마저 내려놓은 것 같아.

나는 연말이나 기념일 명절에는 싸우고 싶지 않지만 오빠에게 그런 기념일은 아무 의미가 없는 날이잖아.


어제 울면서 읽은 책에 그런 구절이 있더라.

사랑을 받는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래. 줄 수 있을 때 구원을 받는대. 그런데 정말 구원은 나 자신만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거라더라고.


난 오빠가 날 사랑해줘서 구원받길 바랬고, 그다음에는 내가 참고 사랑을 주면 나아질 줄 알았어. 그런데 이제는 정말 내가 나를 돌봐야겠더라. 난 숨 쉬며 내 삶을 제대로 살아보고 싶어.


오빠가 정말 나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이 있다면 나와 이혼해 주는 거야. 별거부터 시작해도 좋아.

어떤 조건이라도 좋으니까 편한 쪽으로 결정해서 알려줘. 오빠가 더 계산은 잘하니까 현명하게 재산을 나눠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앞으로는 서로의 삶에 일절 터치하지 말고 오로지 아이에 대한 것만 집중하고 의논하도록 하자. 내 마음은 이걸로 다 표현했어. 서로 행복해지자.

그럼 이만.


그러나 그는 이 편지를 나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한 자도 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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