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한 자의 마지막 인생 복기
나의 다섯째 계절
시작이란 어렵다. 3학년 때 선생님이 일기 쓰기를 시작할 때 제발 ‘오늘은’이나 ‘나는’으로 시작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고 나니 매일 일기를 쓰는 게 더 어려워졌다.
시작의 말을 쓰려고 하면 뱅뱅 감을 잡기가 어려워서, 또 서가에 있는 책을 뽑아 첫 시작 부분을 다 훑어봤다.
그래서 차라리 시작하지 않는 편을 택하기 시작했고 무엇이든 살아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20대 입사원서의 자기소개서에 늘 나의 좌우명으로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 고 썼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인가 생각을 시작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40대가 왔다. 마흔 살은 이상하다. 사회적인 의미에서는 중년 어른이고 다 컸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정작 나는 내가 다 컸다는 생각이 안 든다. 젊은이들이 알면 철없다고 느낄 것이다. 철없는 행동을 하면 비난받겠지만, 나는 이제야 제대로 어른을 겪고 있는 것만 같다.
이 나이쯤 되면 그 간의 경험이나 타인들에게서 듣거나 본 사례들을 통해서 삶에 대한 태도나 가치관을 나름대로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누군가들은 깊은 사유와 성찰을 통해 신념이라는 것이 생기고,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나누려 할 것이다. 어떤 식이든 신념을 가진다는 건 고집이나 쓸데없는 아집과는 다르다고 생각되므로 그러한 사람들이 존경스럽다.
또한 아직은 부족함을 깨닫고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삶의 자세를 성찰하고 더 나아지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배우려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전자와 후자는 어쩌면 최후에는 같은 모습일지도 모르겠지만, 어느 선까지 다다랐다는 기준으로 굳이 나눠본다면, 나는 후자의 모습이 되기 위해 애쓰는 사람 정도일 것 같다. 아무튼 현재는 그렇다는 말이다.
20대에는 무엇이든 자신이 있고, 누구보다 감정에 솔직하고 생각이 많아서 내가 정한 나의 태도와 생각에 확신이 있었다.
30대에는 사실, 무슨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애써 무시하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겪어보지 못했던 무수한 경험과 싸우고 부딪힐 때마다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없었다. 그냥 흘러가는 시간과의 투쟁이었다. 하지만 내가 싸워왔던 시간은 정작 아무 잘못이 없다.
30대 중반은 그야말로 암흑의 시기였다.
초반에는 아이가 커가는 기쁨과 재미에 홀딱 빠지고 그럭저럭 일자리에서 내 몫을 해 내가고 있다는 생각에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쳇바퀴의 삶에 집중했다. 만족, 불만족 뭐 그런 것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냥 이게 삶이고 사는 대로 생각했다.
중반이 된 후 내 인생을 돌보지 않은 대가는 혹독했다.
나는 몸무게 앞자리에 굉장히 집착했다. 앞자리가 5를 찍으면 인생의 실패자가 된 것만 같았다. 그때부터는 무조건 곡기부터 끊었다. 그럼에도 술은 끊지 않았다. 술자리에서 소주 한잔을 원샷하고 콩나물 한 줄기를 겨우 집어먹던 나를 보고 기가 막혀하던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집 안에 나의 존재는 희미하고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만 같았다. 남편과의 대화는 단절되고 물어뜯는 불편한 사이가 되었다. 답답함을 피해 일을 미친 듯이 했고, 일을 하고 난 뒤의 스트레스를 피해 술을 마셨다. 매일 회사에 일찍 출근을 하고, 제일 늦은 퇴근을 했다. 야근 후에는 동료들과 어울려 매일 소주 1병, 많게는 3병씩 마시고 택시를 타고 집에 가는 일이 반복이었다. 새벽 2시, 3시에 자고 6시에 기상을 할 때면 온몸의 근육 마디마디가 가시로 찔리는 듯한 고통이 침범했다. 아프니까 우울해지고,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없어 외로웠다. 그래서 더더욱 나돌고 사람들을 만나고 술을 또 마셨지만 외로움과 아픔과 고통은 깊어 갔다.
30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정신과를 들락날락하고 있다. 회사에서 미친 듯이 일을 했지만 인정받지 못했고 나의 부족함과 한계를 매일같이 확인했다. 나는 늘 못나고 바보 같은 무능력자임에 자책하고, 무엇을 위해 사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무기력증과 우울함이 내 전신을 지배했다.
지나간 시절은 내게 원망만을 주었고, 그 원망은 고스란히 감옥이 되어 일상에서조차 나를 가두었다. 어제가 오늘인 듯 계속되는 매일, 그것이 내가 그토록 원해왔던 평범한 삶이라고 생각했기에 계속해서 자신을 소비했다. 무슨 일에도 나의 의견은 없었고 늘 자신이 없었다. 소소한 지적조차 내게 겨누는 창 같았고 나는 항상 가혹하게 나 자신을 비난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엄마다. 나만 참으면 된다. 내가 이겨내면 된다. 무너지면 안 된다.’ 다짐하며 빈곤한 영혼으로 사는 것에 익숙해지려 애썼다.
마흔 살이 딱 되니까, 다 쏟아져 내렸다. 내가 막 살아온 것들에 대해 나 자신에게 보상하라는 듯이, 환경은 안정되어 있는데, 오히려 나는 둘 곳 없이 흔들렸다.
2020년 5월의 어느 날, 나는 완전히 무너졌다. 그때의 봄이 어땠는지 지금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더는 약에도 술에도 의존하고 싶지 않았기에 다른 그 무엇이든 잡아보라고 내게 소리쳤다. 의사 선생님은 쉬면서 우선 내가 좋아하던 것을 떠올려보고 그것부터 해보라고 조언했다.
그러던 나는 글쓰기 수업을 발견했고, 그것을 통하여 마침내 중년 이후의 새로운 삶으로 걸어 들어왔다.
처음 수업에서는 당연히 내 마음의 오랜 서랍을 열어 볼 수조차 없었다. ‘나를 쓴다’라는 것은 칭칭 감아 봉합해 둔 상처를 다시 후벼 파내는 일이었다. 사십여 년을 스스로에게도 하지 못한 말들을 쓰는 작업은 나를 자꾸만 어둡고 깊은 마음속으로 침잠하게 했다.
그러던 내가 결국 조심스레 나를 열어 보기로 마음먹을 수 있게 된 것,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첫째는 한 번도 내 삶에 연결고리를 가지지 않았던 사람들과의 조우, 모두 다르지만 저마다의 사연들로 ‘나를 쓰고 싶다’는 공통된 열망을 가진 사람들 때문이었다. 그저 들어주는 그들의 조용한 손길이 나에게 전해주는 느낌은 기적이었다.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생소한 경험이 나를 이끌어 주었다.
그러한 응원의 힘으로 용기를 내어 나에 대한 글쓰기를 시작했지만, 여러 갈래로 분열되는 자아들은 각각의 감정대로 널을 뛰었다.
이토록 좁고 작은 내 그릇은 나 하나조차 오롯이 담기도 얼마나 어려운지, 사라지지도 낫지도 않고 내 몸 안에 문신처럼 새겨진 아픈 나날들은 파고들면 들수록 내 속에 버티고 앉아 고집을 부렸다. 과거의 순간들을 떠올리면 살아있다는 것조차 고통이었다. 찢어지게 아파서 어쩌다 웃게 되는 하루조차 죄책감을 느끼는 여러 날을 겪어냈다.
먹먹한 우울함으로 온몸 전체가 그득그득 차오를 때까지 쓰면, 어느 순간에는 눈앞의 내 글에 두려움을 느꼈다. 울컥울컥 쏟아낸 온갖 감정의 토사물로 더러워진 글이라는 생각에,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리고만 싶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무작정 집 앞으로 나가 내달렸다. 타오르는 고통으로 심장이 짓이겨지려 하는 순간, 뛰면서 숨이 차오르기 시작하면 고통은 살아있는 고동으로 대체되었다. 그것은 버리고 쓰게 해주는 또 다른 힘의 원천이었다. 심연의 우울함에 푹 절어 있었던 때에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서서히 나를 일으켜 움직이자 몸과 마음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
나의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나는 처음으로 나도 피해자의 선상에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엄마가 수시로 끊임없는 불안을 털어놓을 때마다 나도 흔들렸지만, 고통의 최극단에 있었던 엄마를 생각하면 감히 밀어낼 수 없었다. 원망의 마음이 들 때마다 동시에 죄책감이 들었다. 엄마가 맞을 때마다 뒤에 숨어있던 나의 어린 시절이 겹쳐져, 나의 아픔을 정당하게 마주하기보다 늘 자학하는 것으로 해결했었다. 때때로 만나는 사람 중 부모로부터 높은 자존감을 자산으로 물려받은 사람에게는, 출발점이 다르다는 질투심이 슬그머니 들어 그에게서 지적할 점을 계속해서 찾아보곤 했다.
함께 글쓰기를 했던 이들은, '이 모든 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내게 말해 주었다. 내가 내 잘못의 크기를 너무 크게 잰 나머지 다른 모든 문제까지 모조리 떠안고 있었던 것을 알아차렸다. 그들의 커다란 위안이 파도처럼 밀려와 나의 모래 같은 우울감과 쓸쓸한 마음들을 서서히 쓸어갔다.
결국, 나를 처음 정면으로 마주했던 용기와 그것을 조용하게 지지해 준 연대의 힘이 나를 지켜주었다.
그러한 과정을 반복하며 내가 내 안의 진짜 모습을 어루만지자, 나를 비롯한 주변의 모든 것들마저 서서히 온전해졌고, 문득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감사하는 날도 있게 되었다. 맑고 따뜻한 일상의 공기들이 느껴지고, 비로소 내 곁에 함께 있는 사람의 모습과 감정이 보였다.
내 힘듦과 아픔에 대한 원망을 이유도 모른 채 정면으로 맞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은 제일 가까이 있던 남편이었다. 나의 과거로부터 도망치려 선택한 사람이기에 조건 없는 사랑과 비현실적인 행복을 주어야 한다는 과중한 부담을 그에게 떠넘겼고, 나의 이상과 맞지 않을 때 쏟아부었던 원망의 말, 자학적인 행동은 과거 내 부모가 전쟁 같은 싸움에서 보여준 것이었다.
나는 오로지 그렇게 해결하는 것밖에 보지 못했기에, 같은 모습으로 널을 뛰며 끝장을 보려 했다. 돌이켜보면 지난 8년 간은 남편에게도 버티기 힘든 시간이었을 터. 그런데도 가장 가까이에서 우울함이 가득 흘러넘치는 나를 감당해야 하지 않았던가. 내가 술과 약에 절어 아슬아슬 휘청거릴 때, 어떻게 잡아줘야 할지 몰랐던 그는 어디에서 울음을 내었을까.
내 정신을 차리느라 뒷전에 두었던 그의 아픔을 알아차리고 미안함과 이해로 그를 인정하기 시작하자, 그는 얼어붙은 호수가 녹듯 서서히 본래의 온화함을 되찾았다. 나는 비폭력 대화에 관한 책을 읽었고 그와 대화하는 것을 다시 연습하고 있다. 아직 서로 간의 표현은 어렵고 약간 서먹하지만, 오해와 싸움으로 멀어졌던 거리를 조금씩 메꿔 나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DMZ였던 아들, 다행히 아이만큼은 청정지역에서의 온전한 삶을 살도록 온몸으로 지켜냈다. 나는 과거로 인한 내 티끌만 한 상처도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고, 남편 또한 내가 흔들리는 시간 동안 견고하게 아이를 지켰다. 나를 대신하여 아들을 돌봐 준 시부모님은 내가 받지 못했던 무한 신뢰와 평온하고 조용한 사랑의 언어를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지금처럼 행복한 사람이 꿈이라는 아들의 말은 귀한 보상과도 같았다. 아들이 세상을 보는 긍정의 눈은 역으로 내게 새로운 가르침을 주었다.
회사는 그만두는 대신 기획팀장의 자리를 그만두고 다른 보직의 팀원으로 발령받는 것으로 타협했다. 정시 퇴근 후 내 시간이 생겼다는 것은 아주 큰 변화였다. 나는 그 시간에 좋아하는 책을 읽고 필사하고, 독서 노트와 일기를 쓰거나 운동을 한다. 무엇보다도 기쁜 것은 학원에서 돌아오는 아이를 맞이하고 저녁을 차려주는 일상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2022년 9월, 나는 드디어 18년 3개월을 다녔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회사를 떠나면 패배자가 된 기분일 것만 같았지만 지금은 무엇이라도 해낼 수 있다.
창자를 끊어낼 듯한 고통으로 출퇴근을 해왔지만 지금은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무엇보다 나는 엄마와 나의 관계에 대해 '먼 시선으로 바라보기'를 연습하고 있다.
멀리 타국에 사는 언니와 자유로운 비혼주의자 동생을 대신하여, 늘 나는 엄마의 끊임없는 불안과 잔소리를 세 배쯤 홀로 맞았다. 엄마의 외로운 인생은 내가 책임져야만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매일 퇴근길에 한두 시간씩 전화로 엄마의 넋두리를 들었다. 자다가도 엄마만 생각하면 숨쉬기조차 힘들었지만, 잘못은 아버지가 했는데 엄마를 더 원망하고 있는 모자란 나의 업보라고 생각했다. 나는 늘 '엄마는 내 평생의 숙제'라고 했었다.
하지만 엄마와 조금씩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항상 약속이 많은 아버지는 나가서 없고, 홀로 집에 있는 엄마가 걱정이지만 매일의 전화 대신 횟수를 정해 메시지를 보내거나 전화를 한다. 엄마의 남은 생을 대신 살아 줄 수도, 책임질 수도 없다는 것은 내가 낳았다고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자식을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엄마의 끝도 없는 불안을 내가 해결해 줄 수가 없듯이, 엄마도 모든 잘한 일은 엄마와 주님이 한 일이고 일어난 문제는 다 우리 탓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다. 나는 "엄마 때문에 미칠 것 같아."라는 신경질을 그만두고, "엄마 인생을 재미나게 챙기셔."라고 한다.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는 대신, 나는 멀리서 위로하는 친구가 되기로 했다.
긴 연말의 휴일에 아버지 없이 또 혼자인 엄마에게 처음으로 가지 않았다. 며칠 뒤 전화를 하니 엄마는 밝은 목소리로 백화점 식당에서 친구와 수다 중이라고 했다. 나름대로 살길을 찾는다.
나는 이 글의 마지막을 '내 트라우마를 마침내 다 이겨냈다'라는 멋진 글귀로 장식하고 싶었지만, 아직 진행형이다. 아무 일도 없는데 예기치 못한 우울의 감정들이 끝도 없이 나를 추락시키는 상황이 올 때도 있다. 약이 아닌 운동과 글쓰기로 내 우울함을 이겨내겠다는 열망조차도, 때로는 한낮 그 언저리 즈음에서 그치는 날도 있다. 원망과 자기 연민, 아픔과 평온이 시소 타듯 움직인다. 가끔은 까닭 없이 가슴이 오그라들 듯 쪼여져서, 탕탕 치고 깊은숨을 들이쉬고는 한다.
하지만 실체 없는 감정과 현실을 구분해 내려한다. 무조건 극복하려 애쓰기보다는 나의 감정 척도를 재보고 그것이 나를 통과해 지나가도록 시간을 둔다. 지금 나의 우울 지수는 4, 무기력 3, 슬픔 2, 자책 1… 점차 수그러드는 감정을 지켜본다. 그러고 나서 이제는 다 괜찮다고, 과거는 모두 지나갔고, 나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내게 말해준다. 지금은 약을 먹지 않아도 힘들지 않지만, 더 온전히 나를 받아들이기 위해 좋은 상담 센터를 알아보고 있다. 이제는 내 이야기를 모두 풀어놓을 준비가 되어 있다.
모두에게 자기 본연의 모습은 그대로 아름답다. 그러나 본질을 생각해보지 않은 채, 그저 앞만 보고 ‘열심히’라는 단어로 일상을 채우는 데 그치면 삶의 표면만을 그럴듯하게 장식할 뿐, 정작 자신의 색을 덮고 잃어버리게 된다. 다시 본연으로 돌아오는 암흑의 시간은 길고 힘들다. 자아를 해친 상처를 아물게 하는 일은 꽤 고된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는 과거의 기억이 내 본연의 모습을 침범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기로 한다.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형성된 나의 신앙 아래서는 항상 감사하며 살라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감사하려 해도 진심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지지가 않았다. 어쩌면 감사한 일이 천지삐까리로 널렸었을지 몰라도, 그런 마음이 안 생기는 데 자꾸만 감사하라고 하니,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게 무슨 잘못을 한 것만 같고 죄책감은 더 깊어졌다.
이제는 남을 미워하고 헐뜯는 말보다는 우리의 소중한 삶의 재미를 말한다. 이러한 소소한 일상을 지내며 나도 모르게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읊조리게 된다. 이것은 노력으로 이루어진데 아니다.
내 삶이 나에게 소중해지니까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다.
내 인생의 주체가 되어 내가 선택하고 내가 내 생활을 통제하게 되니 감사하다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아들의 얼굴만 봐도 웃음이 나오고 감사한다.
나 자신을 제어한다는 것은 나를 내가 컨트롤할 수 있다는 말이고 그것은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전에는 내가 모든 것을 짊어지고 가는 것 같고 나의 짐에 헐떡거렸다. 아이도 남편도 시댁도 친정도 다 나의 짐이고 감옥 같았다. 나는 돈 버는 기계인 것만 같았고 아무도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남의 이해를 구하지 않는다. 이해해 주지 않아도 된다. 내가 나를 이해하니까. 내가 나를 돌보고 있으니까. 내가 나를 사랑하니까. 더 이상 외롭지 않다.
나는 이것이 나의 마지막 인생 복기이기를 바라고 더 이상 과거의 상처를 들여다보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나는 새로운 다섯 번째 계절을 맞고 있다. 이 계절에는 오롯이 진짜 나를 느끼며 살 것이다. 나를 과감하게 드러내고, 어떠한 죄책감이나 비난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바라봐 줄 것이다.
제대로 느껴보지 못했던 소중한 일상 속에서 진짜 마음의 공간을 열어젖힌다. 명랑하게 웃는 얼굴 속에 숨어 있던 과거의 소심한 나를 발견한다. 그러나 더는 내게 죄를 묻지 않는다. 나는 어린 내게 충분한 속죄를 했고, 미래의 내게는 행복해질 책임만 있을 뿐이다. 이제는 명랑한 글을 쓰고 싶다.
웅크려 있던 어린 나의 손을 잡고 함께 뛰고 있는 상상을 한다.
해를 받지 못한 아이는 슬픔으로 하얗다.
‘그래도 너는 고와.’라고 말해주자 아기처럼 울먹울먹 입을 삐죽인다.
나를 더 사랑할 다섯째 계절이 다가오자 어린 그녀의 시절도 내게서 멀어진다.
지금 나는 진짜 나에게로 조금씩 돌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