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번 아웃
회사에서 야근 도중에 눈앞에 놓인 90장의 PPT 양식을 들여다본다.
회사 생활 18년 중 꼬박 8년을 매 분기 작성해 온 사업계획 보고서,
기계적으로 하는 일이 이제는 어렵지 않다.
그런데도 작성하다 화장실에 들어가 무심코 줄줄 울었다.
2004년에 지금 회사에 입사 이후 6년간, 출산하기 일주일 전까지 죽도록 야근하며 일했는데,
6개월을 쉬고 복기하자 출산으로 인해 쉬었다는 이유로 승진을 못 했다. 나는 7년 차 사원이 되었다.
그리고 그다음 해에는 출산을 앞둔 타 부서 선배 언니를 대신하여 육아휴가 대체자로 부서를 옮겼고,
또 이동한 부서에서 성과가 없다며 그 해에도 승진을 못하여 8년 차 사원으로 머물렀다.
2014년에 대리에서 과장이 되어야 할 시점에는 다시 원래 일하던 기획 부서로 돌아왔다.
그러자 또다시 이제 복귀해서 뭘 알겠느냐며 승진을 못 했다.
결국 2020년에는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해 우울증과 공화장애로 쓰러지고, 2주간 무단결근을 했다.
그리고 기획팀을 떠나 현재의 부서로 이동했다.
올해 초에는 부서를 이동했고 쓰러졌었기 때문에 또 성과가 없어서 승진에서 빠졌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누구보다 확실히 일을 잘했다. 학력도 일 처리도 어학 능력도 뒤지지 않았다.
그런데 사장은 내게 말했다.
“누구나 다 열심히 한다.”
18년... 이번 달에 입사 18주년이 되었다. 18년이 욕으로 나왔다.
참을 때까지 참는 내 성격이 폭발했다. 회사에 대한 열정도 끈도 끊어졌다.
이후 홧김에 50군데가 넘는 곳에 이력서를 냈지만, 줄줄이 낙방했다.
일만 하느라 변변한 자격증도 어학 점수도 따놓지 못한 중년의 아줌마가 갈 곳은 없었다.
그런데 사실은, 이력서도 대충 써서 아무 곳이나 닥치는 대로 냈다.
알고 보면, 그냥 일이 하기 싫은 거였다.
가족도 직장도 친구도 모두 내게 짐 같이 느껴진다. 나는 지금의 내 상태를 이렇게 부른다.
완벽한 번 아웃
이렇게 된 게 따지고 보면, 내가 1년여간 몸담고 있는 철학책 읽기 모임 때문, 아니 덕분이다.
철학책을 읽고 내 삶에 대해 돌이켜 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저 이렇게 기계적으로 일하고 남의 뒤치다꺼리만 하는 인생이 내 숙명인 줄 알고 무의식적으로 살았을 것이다.
엄마는 항상 내게 여전히 부족하다는 말만 하고, 남편은 늘 칭찬보다는 지적을 더 많이 한다.
아픈 시댁 부모님께 전화하고 각종 약을 챙기는 것은 남편의 일이 아닌 내 몫이다.
가까운 친정에 들르고 대소사를 챙기는 것 또한 미국에 사는 언니와 바쁜 미혼 남동생 대신이다.
친구들과 여행을 가거나 생일 파티를 할 때면 친구들은 하나 같이 내게 묻는다.
“배운 아, 그거 어떻게 됐어? 예약했어?”
여행을 갈 때는 내 짐만 한 짐이다. 함께 가서 먹을 먹거리와 식자재 등을 바리바리 챙긴다.
그제도 한 친구는 내게 말했다.
“배운 아, 우리 애들 데리고 여행 좀 다 같이 가게 추진 좀 해봐.”
내 등에는 빨대가 무수히 꽂혀 있는 것만 같다.
회사 일을 내려놓고 책을 읽고 운동을 하기 시작하며 숨통이 트였는데, 다시 삶은 제자리로 돌아가려 한다.
나는 지금 아랫니를 교정 중인데, 의사 선생님은 치아는 교정이 끝나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습성이 있다고 했다.
내 인생도 다시 쳇바퀴처럼 원래 그렇고 그런 삶으로 돌아가는 물레 같았다.
책 읽기 모임에서 함께 읽은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를 완독 한 뒤 첫 페이지의 들어가는 말을 다시 읽어본다.
시급한 것을 중요한 것으로 착각하고, 말이 많은 것을 생각이 깊은 것으로 착각하며, 인기가 많은 것을 좋은 것으로 착각한다. 한 현대 철학자의 말마따나, 우리는 “잘못된 삶”을 살고 있다.
이 책은 내게 너무나 친절하고 감격스럽다. 저자와 함께 철학의 기차를 타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함께 침대에서 나와 소크라테스처럼 호기심을 가지고 루소처럼 걸으며 소로처럼 보고 쇼펜하우어처럼 들으려 노력한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12장의 에픽테토스처럼 역경에 대처하는 법에 다다른다.
사실 이 챕터만 아직 읽지 않았다. 나는 현실감이 결여된 편에다 책이나 남의 이야기에 잘 휩쓸리는 편이다.
만약 내가 이 챕터를 공들여 읽는다면 나는 내일 당장 회사에 사표를 제출할지도 모른다.
세상 모든 사람은 가능해도 내게는 안 되는 일, 내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되는 그 일을 말이다.
확실한 것은 그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철학은 쉽지도 멋지지도 않고, 일시적이지 않다.
철학은 스파보다는 헬스장에 가깝다고 말한다.
내 인생도 그렇다. 나는 항상 링 위에 서 있는 파이터다. 하지만 늘 싸우고 싶지는 않다.
링에서 내려와서 다른 운동도 하고 쉬기도 하면서 마음을 계속해서 단련하고 싶다.
세상을 더 잘 살피고 싶어 눈을 크게 떠본다.
괜스레 코도 벌름거려본다.
이 순간을 잡아보려 해도 이미 지나가 버리고 없다. 더 잘 느끼는 수밖에 없다.
내 안에 깊숙하게 잔향이 스며들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