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람에게 정신적으로 지속적인 학대를 당한 경우 그 뇌를 촬영해 보면, 실제로 크게 차량 추돌 사고가 난 사람의 뇌 상태와 거의 비슷한 충격 양상을 보인다는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정말 그러하게 마음이 다친 경우, 진통제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에도 어느 정도 효과를 보인다고 한다.
그렇게 치면 내가 2014년 말부터 2020년 초까지 근 6년 간 받았던 직장 내에서의 충격은, 운이 나쁘게도 5톤 트럭에 삼중 추돌사고로 치인 것쯤 된다고 생각해 볼 수 있을까.
지나간 시간에 대해서 나 자신에 대한 자책으로부터 시작하여 타인과 주변인들을 원망하고 저주도 해 보았지만,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인생을 한 권의 큰 책으로 비유해 볼 때, 내게 일어났던 나쁜 일들은 내 책 속에서 북북 찢어버려야 할 한 챕터쯤으로 생각하고 과감히 책장을 덮어버리고 남은 삶의 앞으로 나아가야만 할 것이리라.
그러나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러한 결단이 좀처럼 서지 않는 것은, 아마 미처 물어보지 못한 질문에 듣고 싶었던 대답에 대한 미련일 것이리라.
‘도대체, 그때 나한테 왜 그랬어요?’
나는 대학교 4학년 가을 학기에 우리 과에서 제일 먼저 취업을 했다. 우리 삼 형제 중에 유독 부모님 말을 크게 거스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마 그때 90년대 당시 다수의 집안에서 으레 그러하듯이, 형제가 많고 유복하지 않은 집안에서 가장 유순한 둘째인 내가 원하는 일들은 항상 제일 후 순위가 되어야 했고, 그럼에도 나는 내가 고집이 없어서 하고 싶은 것을 밀어붙이지 못하는 유약한 성격이라는 엄마의 핀잔을 있는 그대로 수긍하며 강요와 타박과 잔소리에 떠밀려 여러 군데에 입사원서를 빠르게 냈다. 제대로 된 취업을 위한 준비 기간도 갖추지 못한 채 30명 남짓한 직원이 있는 중소 무역 상사에 입사하여 2년 반 동안 일을 하였다.
이후 경력을 바탕으로 한 굴지의 이름 있는 기업에 정말 운 좋게도 취업을 했다. 회사 출근 새벽 시간에 2년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외국어 학원을 다니면서 2년 간 경력을 열심히 쌓은 노력이 없던 바는 아니었으나, 조기 취업을 하느라 제대로 된 스펙을 쌓지 못하고 작은 무역 상사에서 유니폼을 입고 출근하여 매일 같이 찻잔과 영업직원의 책상을 닦고, 해외 거래처 영업 담당자와의 접대 석식에 불려 가서 고객에게 술을 따르던 법부터 배웠던 나는, 기업의 비전과 철학이 있고 경영 윤리가 확고한 글로벌 기업에 취업했다는 사실이 너무 자랑스러웠다.
그때 나의 사수 J를 처음 만났다. 크고 서글서글한 황소만 한눈에 작지만 다부진 체격의 그는, 말솜씨와 서류 작성 능력이 예사롭지 않았다. 메일을 한 자 쓸 때에도 처음을 시작하는 법, 엑셀 표를 만들 때 추가 사항이 생길 것을 대비하여 미리 한 줄을 띄워 놓고 작성하는 법, 사람을 대할 때 웃으며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받아치는 세련된 어법이나 논리적인 문장 구조, 그 모든 것이 나에게는 새롭고 존경할 만한 것들이었다. 과거 작은 기업에서 내 면전에 대고 껌을 와그작와그작 씹으며 나를 한심스러운 싸구려라고 놀리던 윗 상사의 기름진 얼굴과 현재 새로운 사수의 빛이 나고 건강한 얼굴이 대조되어 보었다. 아직 스물다섯이었던 나는 역시 대기업에서 훈련을 받은 사람은 달라도 다르다고 생각하며 그에게서 모든 일을 정말 열심히 배웠다.
J와의 일이 정말 재미있었다. 나 또한 성격 상 완벽한 정리를 좋아하는 스타일이라 업무에 관한 것은 한 자도 빼놓지 않고 모두 외우고 기록했다. 기획력이 풍부한 그가 필요한 자료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즉시 제공했고 그와는 정말 티키타카가 잘 맞았다. 내가 입사할 때 그는 결혼한 지 두 달이 되었었는데, 내가 입사할 줄 알았더라면 결혼을 미뤘을 정도로 내가 이상형이라는 말도 했다. 아무튼 그의 일 능력과 말 주변은 실로 내게는 놀라운 것이었으며, 나는 그와 일하는 몇 년간 단 한 번도 그를 험담하지도 나무라지도 않았다.
그런데 실제로 그는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외부에서의 평판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일은 잘했지만 사람들과 부딪힐 때마다 촌철살인과 같이 찔러대는 독설은 그의 험담으로 돌아왔다. 그는 정말로 말 주변이 뛰어나 아무도 그의 말을 이길 사람은 없었다. 나는 그의 말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일적으로 잘못하는 부분에서만 크게 남을 질책했고 나는 그와의 업무에서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혼이 났던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남들과 다투고 있는 내용을 들으면 그의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었고 그에게 혼나는 사람들은 거의 무능력하고 서툴게 일을 하는 사람들일 뿐이었기에 가끔은 통쾌한 그의 명대답에 시원하기도 했다.
그가 평판이 좋지 않았던 부분은 또 다른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의 음주 습관이었다. 그는 술을 마시면 늘 만취를 하고 길에 걸린 공사장의 쇠파이프줄에 걸려 넘어지거나, 예복 정장과 결혼 예물 반지를 잃어버렸으며, 때로는 같이 마시는 사람을 때리기도 했다. 심지어는 직장 내 상사의 목을 졸라 와이셔츠의 빳빳한 깃에 부장의 목이 빨갛게 쓸려버리거나 남자 상사와 키스를 하는 등 웃지 못할 에피소드들도 남발하게 되었다. 사실 이 부분은 정말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추후에는 나 또한 감당 못할 지경이 되었지만, 내가 스물다섯이던 그 시절에는 직장 술자리 문화에서 웃고 넘어갈 만한 일들이 다 반사였고, 역시 또 그는 내게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굳이 그것을 문제 삼을 필요는 없었다.
아무튼 우리는 그렇게 엄청난 팀플레이로 팀을 견인하며 회사의 실적을 경쟁사 1위 자리에 굳혔고, 나는 출산을 위해 휴직을 한 뒤 복직을 하고 타 부서로 발령받아 일하다 10년 만에 다시 그와 한 팀이 되어 만나게 되었다, 그때는 2014년 말이었고 그 모든 것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입사 후 J와 한 팀에서 5년 동안 정말 멋지게 팀플레이를 하며 열심히 일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출산 후 아이를 돌보는 과정에서 다시 기획팀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출산 후 회계팀에서의 일에 만족하고 있었고, 팀 내에서의 직원들과의 사이도 꽤나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기획팀의 전무님은 내가 다시 전방으로 돌아올 때가 되었다며 회계팀 부서장과 딜을 하게 되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기획팀 현업으로 복귀하여야만 했다.
내가 기획팀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J는 사업부 부서장이 되어 있었고 그가 나의 복귀에 정말 뛸 듯이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돌아가고 자리를 잡은 지 몇 시간 만에 본부에 메일을 한 통 썼을 뿐인데도, 그는 팀원 모두에게 내 메일을 다들 읽어보라고 말하며 이게 바로 진짜 일하는 방식이라고 감탄하며 좋아했었다. 나는 그 간 일선에서 한참 오퍼레이터로 활동하다 기획일을 담당하게 된 것이 많이 부담이었지만, 역시 열심히 해서 해낼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팀으로 복직해서 맡게 된 일은 공교롭게도 해외에 있는 우리 기업의 아시아오세아니아 총괄 본부에 한국 시장 실적을 보고하고 사업 계획을 승인받는 일이었다. 다른 지사는 거의 지사장이나 주재원이 본부 실장에게 보고를 하는 시스템인데, 우리만큼은 유독 내가 역량을 키워야 한다며 일개 대리인 내게 그것을 맡겼다. 회의에 들어가는 경영진 및 J를 비롯한 팀장급들은 모두 외국어가 원어민 수준이었는데, 어학연수 한 번 가보지 못하고 토익공부도 한 번 제대로 못한 채 취업했던 나로서는 외국어로 발표하는 것이 상당한 부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J는 자기가 10여 년 동안 이 보고를 맡아해 왔고 더 이상은 하고 싶지 않으며 내가 해 내야만 하는 역할이라고 했기에 자연스럽게 그 일을 맡게 되었다.
파워포인트 작성조차도 서툴렀던 나는 첫 보고가 있던 날 3주 전부터 꼬박 야근을 하고 외국어로 된 스크립트를 작성했다. 너무 긴장이 된 나머지 보고가 있던 전날부터 삼시 세끼를 내리 굶었고 화장실에 앉아서까지 밤새 스크립트를 달달 외웠다.
내가 첫 보고를 한 날은 글로벌 기업 본부 실장 또한 새로 부임한 흰머리의 코야마라는 사내였다. 떠듬거리긴 했지만 여차저차 첫 데뷔를 무난하게 치르고 별 탈 없이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점차 실력을 쌓으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코야마는 일본 말로 작은 산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는 절대 작고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보고 횟수가 늘어나면서 그의 하대와 무례와 거침없는 몰아치기는 끝이 없었다. 조용히 처음을 시작하던 그는 회의가 끝날 때 즈음엔 항상 ‘이 무슨 바보 멍청한 소리야! 무슨 소리인 지 전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라고 매번 호통을 치면서 서류판으로 책상을 때려 엎고 나가기 일쑤였고, 결국에 나는 그가 실제로 혐한 주의자가 아닐까 라는 의구심을 갖기에 이르렀다. 그는 일본 특유의 할복 문화에 가까운 자세로 우리가 자세를 낮춰 머리를 조아리며 연신 '다이헨 모우시와케 고자이마 센(대단히 송구스럽습니다.).'라는 말로 굽신거리기를 기대했으며 한 달에 한 번으로 그칠 보고는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계속되었다. 마지막에 이르러 정말 저희가 염치가 없고 어리석어 이 정도 수준으로 밖에 보고를 못 드려 죄송하다는 말로 사죄를 하면, 그때서야 끙… 음… 하며 그 새하얀 머리를 세차게 끄덕이고는 제대로 된 코멘트도 없이 다음에! 하고 나가버리는 식의 회의가 계속되었다.
그가 나의 보고 내용을 듣고 그토록 소리를 지르거나 발작에 가까운 경기를 일으켜도, 어차피 그 무례함은 내 개인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도저히 비켜 나갈 수 없었던 것은, 같이 그 사무실에서 혼나고 있는 상사들의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태도였다. 아니, 그것까지도 좋았다. 기획팀 전무님은 같이 혼나는 입장에서 항상 나를 독려했고, 같이 듣던 타 부서의 관리자와 팀장들은 어차피 청중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럴 만도 했다. 문제는 J였다.
전날까지만 해도 나와 의견을 같이 하며 보고 자료를 작성했던 그는, 발표가 시작되면 내 면전에 앉아 비웃음을 피식피식 날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등의 제스처를 취하기 시작했다. 내가 말이 빨라지거나 실수를 하는 것만 같으면, 그는 앞에서 엑셀 브레이크를 밟거나 변주곡을 지휘하는 지휘자의 손짓을 하며 한숨을 쉬고 혀를 차기도 했다. 나는 보고를 하는 한 문장 한 문장마다 그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그리고 마침내 보고를 마치고 코야마의 속사포 같은 맹공격이 퍼부어질 때면, J는 내 편이 아닌 적군의 전방에 앉아 팔짱을 끼고 나를 쳐다보며 어디 한 번 대답을 해 보라는 식으로 응수하며 앉아있었다. 코야마가 대답을 계속 재촉하면, 그는 마지못해 본인이 나선다는 식으로 답변을 하였고, 코야마는 연신 알 수 없는 응응 소리를 내며 회의를 어쭙잖게 마무리하였다.
회의가 끝난 후면 J는 가끔 나를 회의실에 남겨 두고 ‘다시 한번 그런 식으로 하면 널 그냥 둘 수가 없다’라던지, ‘내가 그때 이렇게 말했는데 이런 식으로 보고를 하면 어떻하냐라’던가 등의 말들을 나를 코너에 몰아넣고 위협하듯 경고하였다. 나는 점점 회의실에 들어가는 것이 두렵고 막막하며 답답해지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