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괴롭힘 2) '종속'
한 주말에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가족들과 tv를 보며 밥을 먹고 있었다.
갑자기 눈앞에 시야가 흐려지며 내온 몸이 오징어처럼 꼬부라들며 말려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모든 소리가 삽시간에 멀어지며 그 속에서 내가 웅웅 떠다니고 양 옆의 새하얀 벽이 나를 향해 다가와 옴짝달싹하게 만들고 있었으며, 온몸의 피가 손목 끝에서부터 거꾸로 콸콸거리고 역류하는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나는 마치 뒤주 속에 갇힌 사도 세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뒤 한 두 차례 출근길 만원 지하철 안에서 앞이 하얘지거나 숨을 못 쉬고 피가 거꾸로 솟으며 식은땀이 나는 일이 있었지만, 나는 단순히 과로와 평소에 있는 저혈압 탓일 것이라 생각하며 가벼이 넘겼다. 물론 그런 일은 점차 매우 빈번하게 일어났다. 고속버스도, KTX도, 비행기를 포함하여 차가 막히는 러시 아워 시간에 고속도로에 갇히면 식은땀으로 녹초가 되었다.
기획팀에 발령받고 석 달 이후부터는 매월 사업 보고가 있는 20일경 전에는 보름 전부터 잠을 자지도, 먹지도 못하였다. 그럴 때면 졸피뎀과 같은 강력한 수면 유도제와 신경 안정제를 가끔 복용하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밤이 되어 불을 끄고 천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수많은 막대그래프와 이익을 표현하는 수치들이 끊임없이 테트리스처럼 나에게로 쏟아져 내렸다. 이튿날 사업 보고를 위해 회의실에 들어가면 갑자기 원인 모를 심한 복통으로 쓰러질 것만 같았고, 급히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서면 J는 몹시 당황 해 하며 3분밖에 안 남았으니 조금만 참으라며 옆직원을 시켜 문을 닫아 버리기도 했다.
이러나저러나 매일같이 혼나는 보고라도 일단 끝이 나면 그만이었다. J의 협박, 폭언 그 어떤 방식으로 회의를 마치든 간에 J의 기분이 좋아져서 그는 우리에게 같이 회식을 종용하고 그 후련함과 회포를 나누었다. 회식 자리에서 그는 다시 더없이 호방하고 유쾌한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랍스터와 같은 비싼 회 정식이며 소고기를 사 주며 이미 10년 가까이 매일 같이 야근하고 또 하나의 가족처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서로 간의 사생활을 재미있게 이야기했다. 그러면 나는 그럴 때마다 다시 ‘그래, 따지고 보면 J부장 말이 다 맞지. 내가 일을 잘 못해서 아까 설명을 잘 못해서 그런 거야. 내가 좀 더 침착하게 준비하고 실력을 키우면 될 거야.’라며 내 탓을 했다. 그는 여전히 내가 존경해야만 하는 사수이자 회사에서 촉망받는 기획 부서장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그것이 지금에서야 뉴스에서 언급되는 가스라이팅이라는 사실 조도 인식하지 못한 채, 그저 그에게 완전히 ‘종속’되어 있었다.
이후 팀 개편이 되면서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나를 딸처럼 귀히 여겨주고 나의 능력에 칭찬과 독려를 아끼지 않았던 직속 전무님이 회사 내 일련의 상황으로 인해 갑자기 사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평소 J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지부장이 우리 사업부 총괄 부장으로 오게 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J는 특유의 새벽 끝까지 거나하게 마시는 술버릇 덕에 다음 날 아침까지도 종종 술이 깨지 않은 상태로 출근하곤 했는데, 그의 숙취가 심했던 어느 날 아침, 지부장이 긴급으로 소집한 전체 회의에서 불만을 품은 J가 지부장에게 모두의 앞에서 술이 깨지 않은 채 날 선 공격을 했고, 그 일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두고두고 약간의 부끄러운 논란거리가 되었다. 지부장은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약간은 소심하고 냉철하며 매우 예리한 사람으로, 속내를 잘 알 수 없었다. 그때 지부장의 감정이 어땠는지 잘 알 수는 없지만, J부장 측에서는 그가 자기와 동급 혹은 그 이하로 취급했던 회계 부장과 그런 논란을 겪은 뒤, 자신의 바로 윗 선임 총괄 자격으로 온 것에 대해 큰 부담을 가지는 것이 매우 자명해 보였다.
J는 지부장에게 어떤 사소한 것 하나조차도 보고하는 것에 몸서리를 칠 만큼 격하게 노이로제를 보였는데, 지부장에게 일전에 잘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서인지 조금의 빈틈도 내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 듯 방어적인 자세를 보였다. 가령 회사 제품의 생산 일정에 차질이 생길 만한 중대한 뉴스가 생겨 내가 J에게 보고하여도, 그는 이런 걸로 문제를 삼고 일을 크게 벌이지 말라며 극대노를 하고 제발 내게 나서지 좀 말라고 했다. 어차피 글로벌 본부가 다 알고 있는 사실 일지라 나만 가만있으면 되는데 굳이 지부장에게 말을 할 해 들쑤실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평소 문제가 있으면 먼저 공유하자는 주의로 걱정이 많은 나는 어찌 됐던 다른 경로를 통해서라도 결국 상부에 보고를 해 버렸는데, J는 어쩌면 그것으로 인하여 내가 자신을 더욱 무시하고 있다고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추가적인 개편으로 우리 팀의 보강을 위해 2팀으로 나뉘고, 나와 판촉 팀장 B가 함께 팀을 맡아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오히려 J에게는 무언가를 물어뜯을 구실이 2배로 늘어난 것에 불과했다. 나는 같이 일하게 된 B팀장과 그야말로 죽이 너무 잘 맞아서 늘 재미있게 일하고 야근을 하고 약주도 자주 했는데, J는 항상 그것을 매우 거슬려했고 우리가 웃는 것에 무슨 불만이 있는지 우리가 의논만 하면 둘을 장기판 위의 말처럼 두고 돌아가며 정신없이 연일 깨부수고 다양한 학대 언어를 남발했다.
덩치가 크고 매사 느긋하며 성격이 서글서글한 B도 몇 달 뒤부터는 결국 한숨을 푹푹 쉬며 연 이은 줄담배를 피우는 일이 늘어났지만, 그는 J에게 내가 느끼는 극한 공포심과는 다소 다른 감정을 가진 것 같았다. J를 불쌍하게 봐얐다할지, 자기보다 작고 보통의 같은 남자로서 그리 대수롭다고 느끼지 않았던 건지. 여하튼 나는 이제 J와의 매월 정기 회의실에 갇혀 있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그의 눈빛을 마주치거나 그가 내 뒤에서 그냥 스쳐 지나쳐 가기만 해도 부리나케 놀라며 극도로 위축되고 얼어붙어 버리는 수준에 이르렀다.
해마다 4월이면 우리 회사는 제일 바빴다. 향후 10년 간의 사업 중장기 계획을 세우기 위해 밤낮으로 일하였다. 늘 11시 이후 택시를 타고 울면서 여의도의 벚꽃을 보며 귀가를 했다.
(그래서 나는 그날 이후로 봄의 벚꽃이 싫어졌고, 다시 그것들을 예뻐해 주기까지 한 참이 걸렸다.)
나는 택시 안에서 새벽에 울며 엄마에게 전화를 가끔 했는데, 엄마는 다들 그렇게 일하며 참고 견뎌내는 것이라고 했다. ‘네가 원체 약해빠지고 느슨하고 유약해서 그렇다. 원래 일은 힘든 거다. 엄마도 회사 다닐 때 그렇게 했다. 능력을 갖추고 더 열심히 하면 된다. 커리어우먼으로서 자랑스럽게 성장해야 한다. 이렇게 버니까 집도 사고 애도 번듯하게 키우는 것 아니냐…’
내가 야근을 하며 삼각 김밥에 라면을 먹고 있을 때, 우리 아이를 봐주는 시댁식구들과 남편은 저녁에 소고기 외식을 하러 갔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갑자기 내가 택시가 아닌 지구 안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다시 과호흡이 오며 차창 밖으로 뛰어들어 달려드는 차에 치이고 싶을 만큼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나의 이상을 감지하고 병원에 갔고 ‘너무나도 명백하게 교과서적인 공황장애’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약을 먹으면 보고 할 때 발음에 지장이 있거나 대답이 느려져 약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버티는 날이 더 많았다. 선생님은 그때 나를 두고 지금 공황장애가 심해서 드러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호전이 생기면 감춰져 있는 우울증이 드러나 더 힘들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회의 시즌 2~3주 간만 버티면 되었던 공포의 순간들은 일련의 주기로 짧아져 점차 일상으로 굳혀져 갔다. 매주 월요일이면 지부장에게 한 주간의 각 팀의 주간 보고를 우리 팀에서 모두 취합해서 보고해야 했는데, J에게는 이것이 지부장에게 보고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극도로 예민한 일이었다. 나와 B팀장은 각자 각자 주말을 그럭저럭 보내고도 일요일 저녁만 되면 급사리 불안해져서 주간 업무에 대해 주말에 전화를 하고 내용 작성에 대해 논의를 하였다.
월요일 아침에 출근을 하려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10월도 채 되지 않은 선선하지도 않은 새벽이었다. 발바닥이 안방 바닥에 내려앉는데 얼음송곳이 가득한 빙판에 내 발을 얹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화장실로 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내 발바닥이 얼음 파편처럼 조각조각 잘게 잘게 부서지는 것은 아닌가 합리적인 의심이 들 정도였다.
흑단같이 검고 두꺼운 머리털과 같은 긴 거미줄이 내 벌거벗은 온몸을 후려 감고 있었다. 거칠고 차가운 밧줄은 내 살을 파고 썩어 들어가며 뻣뻣하게 일자로 선 내 목을 집게처럼 집어 올렸다. 나는 영원히 멈추지 않고 춤추는 잔혹 동화 속의 빨간 구두를 신은 소녀처럼 철근 같은 발걸음을 내딛으며 회사에 기어 나가고 있었다.
어깨에서부터 발 끝까지 날 선 창 하나가 나를 꿰차고 회사에 둘러메고 가는 것만 같았다. 우리 회사 출근 시간은 9시 반이었는데 보통 나는 8시쯤 회사에서 2~3번째로 가장 이른 출근을 했다. 그런데도 그 시간에 가면 J부장은 어김없이 출근해서 앉아있었다. 그는 아침마다 늘 매우 기분이 좋지 않은 채, 우리의 인사도 제대로 받지 않고 책상을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역시 우리가 주말에 밤 10시가 넘도록 서로 논의하며 취합해 만든 주간 업무 보고서였다.
인사를 하고 가방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1분의 정적이 흐르면 그는 나지막이 나와 B부장의 이름을 불렀다. 우리는 석고대죄를 지은 사람 마냥 그의 앞에 일렬로 앉아 월요일 아침부터 그가 따져 묻는 한 글자 한 대목마다 몇 십 번도 더 곱씹었던 Q&A를 되새기며 바늘과 같은 무시와 멸시의 폭언을 감당해야 했다.
“아니 배 탐장, 화물을 실은 선박이 25일에 온다더니 이 보고서에는 왜 26일로 되어있죠?”
“네, 아니 그게 선박회사에서 날씨 문제로 하루 연기될 것 같다고..”
“그 말을 들은 게 언제야?”
“지난주 금요일 오후였습니다. (오늘은 월요일인데..)
“참나, 그걸 이제 말한단 말이야? 날씨는 무슨 날씨? 배가 지금 어디 떠 있는데!! 아니, 화물을 관리하는 사람이 그 정도도 몰라? 해상 날씨가 어떤 지 배가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 아는 게 책임이야! 선사 이 것들이 사람을 무시하는 거야 뭐야! 당장 전화해서 상황을 묻고 우리 회사로 들어오라고 해!”
항만을 아는 사람이라면 으레 그러하듯이 배의 일정은 날씨에 따라 수시로 변경되기가 일쑤인데, 나는 거래처를 통해 해외 항만 사이트를 겨우 뒤져 현재 배의 선박 경로를 알아내고, 배가 떠 있는 바다의 위 적도를 포함하여 태평양의 기후 날씨까지 체크하여 그에게 보고해야만 했다. 이런 일련의 업무가 참 어이없다고 스스로 생각을 하면서도 선사에게 어렵게 회사로 들어오라고 전화를 하자, 당연히 우리 회사보다 몇 배나 큰 선박 기업은 정말 어이가 없다는 듯이 혀를 차며 나를 또다시 무시하는 발언을 했다. 나는 J부장이 시켜서 어쩔 수가 없어 정말 죄송하다며 연신 고개를 읊조려야만 했다.
그리고 선사에서 두고 보자는 듯이 기세 당당하게 회사에 들어서니, J부장은 특유의 해맑고 건강한 웃음을 지으며 ‘아니, 어떻게 여기까지 다 오셨습니까? 별일도 없는데요. 여기까지 배팀장이 오시라하고 참 죄송합니다. 식사나 하고 가시지요.’ 하면서 대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본인도 이전에 대기업에서 화물 담당을 한 내력과 벌크 운송을 했던 해상 운송의 경험들을 나누며 즐거운 식사를 하고는 끝이었다. 나는 그냥 거기 서서 그대로 일도 제대로 못하는 머저리가 되어 버렸다.
연말에는 사업 콘퍼런스를 해외에서 크게 했다. 나와 B팀장은 콘퍼런스 기획을 하며 또 야근을 지속했다. J부장이 자리를 비운 사이 대리점 사장님들과의 해외에서의 마지막 만찬을 무엇으로 하면 좋을까를 의논했다. 나는 당연히 어르신들이니 자리를 자꾸 옮기는 뷔페보다는 고급 코스 요리로 가면 어떨까를 제안했고 여행사에서도 그게 좋다고 하여 별 의심 없이 B부장과 코스 요리 자료를 만들고 있었다. 그게 밤 10시였다.
술을 하고 온 건지 다시 그때 돌아온 J부장은 웃으며 뭘 준비하냐고 해서 우리는 자랑스럽게 사장님이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마지막 디너 만찬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갑자기 J부장의 얼굴이 피가 터져나갈 듯 벌게지며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뭐? 뭐야!! 너네가 뭔데 나도 없이 그런 거를 마음대로 결정해! 누가 그러라 그랬어! B 너야? 야 너 당장 따라 나와! 진짜 죽고 싶나. 나를 뭘로 보고! 오늘 잘 걸렸다. 두고 봐!”
코스 요리를 처음에 제안한 건 나였는데 B는 그대로 사무실 어디론가 J에게 끌려나갔고 B의 담배 피우는 횟수는 하루 한 갑에서 한 갑 반으로 늘었다. 나는 정말이지 이제 더 이상 J를 감당해 낼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술을 마시면 상사들이 있는 식탁에 머리를 정면으로 탕탕 내려박으며 연신 죄송하다고 고함을 지르기도 했고, 타지방으로 출장을 가면 술이 거나하게 취해 거동을 못 거누다가 B와 나와 같이 탄 KTX 열차 사이에서 실례를 범하려고 하는 것을 B팀장이 간신히 추스리기도 했다.
술을 마시고 있으면 항상 J의 아내에게서 전화가 걸려 와 그를 집에 보내 달라고 했고, 전화를 받은 나는 정말 나도 그러고 싶다며 함께 전화기를 붙들고 울었다. 그의 눈에 벌건 핏대가 가득 차 올라 술이 깨지 않고 출근하는 날은 더 많아졌고, 특유의 차근차근한 논리적 언어로 차근차근 설명을 하다가, 갑자기 흡사 경기라도 일으키는 듯 소리를 높이며 격앙해서 흥분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로부터 나는 무려 3번 동안 사표를 내며 회사에 읍소를 했다. ‘정말 이렇게는 일을 못한다. 사람이 살 수가 없다.’ 인사과 동기를 비롯해 오래된 인사 부장과도 회의를 하고, 타 팀 동료들과 상사들에게도 모두 털어놓고, 지부장과도 상의를 했으며 마침내는 사장님까지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부서를 이동해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금 내가 매우 주요한 보직에 있고 대신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 조금만 더 참고 버텨보라는 조언이었다.
어찌 보면 그때 여느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수도 할 법한 것이, 회사에서 그에게 그런 식으로 한 두 번쯤 호되게 당했던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사과를 비롯한 타 팀의 사람들은 내가 다른 사람보다 좀 더 감정에 유별나고 예민해서 그런 거라고 했으며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 다를 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몇 명 어린 직원들은 그가 경기에 가까운 발악을 하거나 위태로운 음주 습관을 보면서도 그냥 넋 놓고 마치 쇼를 보는 것처럼 바라 보기기도 했는데, 결국 그들도 J와 일하면서 석 달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거나 다른 부서로 이동해 버려 그와 일을 지속할 일이 별로 없었다. 모두가 그의 곁에서 짧게는 3개월, 길어야 3년을 버티지 못하고 이동했기에 나는 우리 팀의 신입 사원이 들어오면 그들을 지켜내야겠다는 모종의 어리석고 무리한 책임감 같은 걸 느꼈다. 나는 나 스스로를 ‘액받이 무녀’ 또는 ‘논개’로 자청하며 신입들의 어려움을 대신하려 노력했고 무려 6년 간 그와 함께 일하였다.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나의 고통은 극한에 달하였다. 무려 6년 동안 매월 3번의 보고를 하면서도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다. 그러 던 어느 날 주말에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그 길로 응급실에 실려가는 바람에 다음 날 처음으로 보고에 빠졌다. 스트레스로 인하여 뇌 속이 부어서 뇌신경염 판정을 받았고 머리에 주사를 맞았다. 뇌혈관 질환으로 관련 보험을 5년 간 들을 수 없었다. 나는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계속해서 만인에게 내 고통을 호소했다. 제발 살려달라고 그만두겠다고 빌었다.
그러자 2019년, 마침내 사장님이 ‘그깟 개 XX 때문에 이렇게 오래 잘 다닌 회사 그만두고 그런 짓 일랑 하지 말아.’라며 그를 다른 부서로 발령 내어 주었다.
다시 평화가 시작되는 듯 보였다. 일은 물론 계속해서 많이 힘들었지만 나는 J부장이 없는 기획팀에서 다시 B부장과 1여 년 간 신나게 일했다. 업무에 적응도 되었고 보고도 한결 수월해지고 루틴 한 업무 절차가 생겼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흘러 퇴사 후에 과거 우리 회사와 관계가 전혀 없는 몇몇 지인들에게 이러한 에피소드 몇 개를 남의 이야기처럼 들려주자, 그들은 한결 같이 내게 말했다.
“아, 그런데 그건 괴롭혔다는 사람 입장도 들어봐야 되는 거지. 이 건 말하는 사람 한쪽 편의 이야기잖아.”
“맞아요. 그리고 사람이 그렇게 되는 건 그 환경 자체가 너무 스트레스가 쌓이는 구조여서 그렇기도 해요. 다 환경 탓이고 사람이 다 거기서 거기지 누구라고 그러고 싶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