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두 번째 장 ( sincerely )
그렇게 웃지 마라
제발 내 앞에서 그렇게 웃지 좀 말아라.
이건 내가 살고싶어서 하는 부탁이다.
너 때문에 심장이 아프니까 제발 그만 좀.
그만 좀.
잘해주지 마
네가 나를 좋아하는 건 알겠어.
근데 잘해주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내가 자꾸 다른 마음을 먹게 되니까.
나는 너와 이대로 오래 보고 싶다.
퍽(fuck)
너에게로부터 그 말을 들은 나를 걱정했을까.
미안해 했을까. 한번쯤 물어보고싶더라.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그런 건 괜찮다. 다만,
그 말을 들은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궁금해 해줬으면 했다.
네 입에서 나온 그 말이 한동안 나를 쫓아다녔다.
하루의 끝에서 샤워를 할 때도,
삼시세끼를 먹을 때도,
네가 없는 요일에 그 공간에 있을 때도
심지어 그 공간을 떠올리기만해도
네 입에서 나온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 말이 지독하게도 나를 따라다녔다.
이걸 알면 너는 나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할까.
마음접기
오늘부로 끝낸다.
지금 이 순간 이후부터는 끝내는 감정이다.
종이접기를 하듯 별 일 아니라는듯이
아주 손쉽게 마음을 접기로 했다.
여유
마음을 접기로 결정을 내린 후에야
나는 그제야 네 앞에서 뚝딱이지 않는 나를 드러낼 수 있었다.
마침내 본래의 여유를 되찾았다.
네가 불도저처럼 다가오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이런 모습으로 너를 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웃기게도 너는.
그제야 너는.
그 표정 뭐였어?
내 눈에는 네가 설렌 듯한 표정이었다.
내가 제대로 본 것이 맞느냐고
물어보고싶었다.
네가 안절부절 내 팔을 만지작거려서
입 다물고 있었다.
불도저인 너를 겪어봤으니
이번에도 그럴거라 생각했는데
너는 자리를 피해버렸다.
' 다들 더워서 몸이 뜨겁네요. '
그 말을 들은 나는 순진하게도
네가 만지던 내 팔을 만져보았다.
내내 선풍기 앞에 서 있던 내 팔이 뜨거웠을리 없었다.
염색
내가 흑발로 덮자마자
네가 그 다음번에 날 만나는 요일에
흑발이 되어서 왔더라.
너는 금발이었는데 갑작스러웠다.
나 때문에 염색한거냐고
조금 더 솔직하게는
나를 좋아해서 흑발을 한거냐고
물어보고 싶었는데 삼켰다.
혹시 착각일까봐 무서워서.
그래서 나는 칭찬을 선택했다.
흑발이 잘 어울린다고
말해주고싶었는데 못했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이 될까봐.
꿈
꿈이 아닐까 생각한다.
네가 불도저처럼 다가왔던 날들이.
지금은 그런 적 없다는 듯이 행동하는 네가 밉다.
손
너와 내가 초면일 때,
네가 먼저 내 손을 잡아보고 갔다.
그럴 상황이 전혀 아니였는데도.
그때부터 너를 보면 설레기 시작했다.
네가 나에게 흑심이 있음을 알아차린 순간이다.
-
네가 또 내 손을 잡아보고 갔다.
내 뒤를 지나가면서.
내가 화들짝 놀라 바보같은 소리를 내자
너는 내가 귀엽다는듯이 설레게 웃으며 지나갔다.
-
오늘은 내가 먼저 네게 손을 뻗었다.
너는 그 손을 잡아주었고
나는 네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근데 왜 혼란스러울까.
나를 등지고 서버린 네 뒷모습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울고싶다
울고싶었다. 처음으로.
이유는 너 였다.
아니아니, 나 였다.
너를 만나는 요일, 일과를 마치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어김없이 네 생각을 하던 중에
멈춘 어느 버스정류장을 쳐다보았다.
누군가 앉아있었는데 나보다 한참 어른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피곤한 사람인 줄 알았다.
벤치에 똑바르게 앉아서 얼굴을 팔로 가린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몇초간 바라보자 그에게선 피곤함이 아니라
울음이 새어나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무릎에 올려둔 손은 힘없이 폰을 쥐는듯 마는듯 했다.
나같은 누군가가 켜진 액정을 보든말든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울었다.
네 생각을 하던 중에 봐서인지
그 사람에게서 내 모습을 봐서인지
그 날 마지막으로 본 네 뒷모습이 차갑게 느껴져서인지
나는 버스에서 간신히 울음을 참았다.
못하겠다
더는. 더는 못하겠다.
이제는 혼자 하는 사랑이 되어버린 이 감정들을
더는 감당해낼 자신이 없다.
나 이제 못하겠다.
하고싶지 않다.
너를 쏟아내는 것은
끝이 없다.
아무리 쏟아내도 끝이 나질 않는다.
너는 내 안에서 왜 마르지 않는건지
네가 무슨, 그리스신화 속 포도주라도 되는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