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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의 건축가 Feb 09. 2023

빌런 '빌라왕'

영화나 드라마, 소설 속에 등장하는 악당을 빌런(villain)이라 한다.

빌런의 어원은 빌라에서 비롯됐다.

둘의 관계가 생뚱맞아서 좀 설명을 하자면, 고대 로마에는 빌라(villa)라고 불리는 대농장이 있었고 농장주의 대저택을 빌라라 불렀다.

이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빌라누스(villanus)라 했는데, 빌라누스들이 차별과 곤궁에 시달리다 결국 귀족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것에서 빌런이란 말이 유래됐다고 한다.

요즘 현실 세계 최고의 빌런으로 등장한 '빌라왕'이 말의 시작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다.

다만 빌런의 시작이 억압받던 자들의 복수였는데, 빌라왕은 서민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하는 최악의 저질 악당이라는 점에서 빌런이라 하는 것도 아까울 지경이긴 하다.


통칭 '빌라'라고 불리는 주택은 공식 명칭이 아니다. 

도시의 다가구주택, 다세대주택을 한데 묶어 왜 빌라라고 했는지 그 시작은 명확하지 않다.

70년대 지가가 가파르게 상승하고 서울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서민을 대상으로 한 소형 공동주택시장이 발생하였다.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4층 정도 규모의 '맨션'이 도시의 단독주택지에 적용되면서 단층의 단독주택보다 규모가 큰 유럽의 저택 같다고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싶은데 확실하지는 않다.

아파트 재개발이 본격화되며 빌라 공급이 급격히 증가하기도 했다.

아파트 공급이 시작되기 전이나 혹은 공급 사이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잠시 머무를 주택 수요가 급증했던 까닭이다.

어찌 됐건 현재 빌라는 도시에서 거주하는 많은 서민들의 주택 공급의 일정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아파트와 다른 주거 상품으로 받아들여지기보다는 아파트의 하위 주거 상품으로써 시장에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동산 시장에서는 고가의 아파트에 대응하는 저가의 빌라가 상품의 다양성 측면에서 필요했을 것이고 빌라는 질 좋은 거주환경이 아닌 가격이 중요한 경쟁력이 되었다.

60% 에 육박하는 아파트가 중요했고 20%의 빌라는 천덕꾸러기일 뿐이었다.

문제를 해결하지도 않았고 좋게 만들려 하지 않았다.

방치되어 있다 결국 사고가 터지고 만 것이다.


주택 가격의 하락과 금리 인상이 '빌라왕' 사태를 촉발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난 오히려 그 이전의 '빚내서 집사라'라는 저주받은 마법사의 주문이 이 일의 시작이었지 싶다.

천정부지로 뛰어오르는 아파트 가격에 아파트 전세는 감히 오르지 못할 나무가 됐고 결국 가격이 저렴한 빌라의 전세 수요는 급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전세자금의 안정성 여부를 꼼꼼히 살피기 어려운 조건이지만 지금 잡지 않으면 놓친다는 불안감이 컸을 것이고 결국 눈 뜨고 코베이는 참사가 벌어졌다.

빌라왕의 전세 사기가 신축건물에 집중되어 있는 까닭은 시세를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전세보증금 반환보증보험을 시행하는 허그(hug)의 경우, 주택의 가격은 (공시지가 +주택표준가액) x 140% 로 산정한다. 이때 신축의 경우는 주택표준가액이 존재하지 않는다.

신축 빌라의 가격을 예측할 기준이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세 뻥튀기를 해도 검증하기 어렵다. 여기에 일부 부도덕한 감정평가사의 '업감정'이 더해지면 일반인은 그것이 적정 가라 믿을 수밖에 없다.

뻥튀기된 건물가액을 기준으로 매매와 전세를 하니 요즘같이 주택가격이 하락하고 금리가 오르는 상태에서 당연히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빌런 빌라왕 탓에 가뜩이나 좋지 않은 빌라에 대한 인식이 더 안 좋아졌다.

부실한 설계, 시공과 하자에 더해 전세자금의 안정성 문제가 더해졌다.

전세보증금의 안정성을 보완하는 장치로 '전세보증금 반환보증보험'이라는 제도가 있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대로 신축의 경우 '주택표준가액'이 존재하지 않아 취득세 납부를 근거로 주택가격을 산정하게 되는데, 대부분 취득세를 신고할 때 국토교통부에서 고시하는 '표준건축비'로 신고해 취득세를 낮춰 놓기에 산정된 주택가격은 실제 가격보다 낮을 수밖에 없다.

주택 가격이 낮게 계산되면, 보증보험 가입 요건인 '선순위채권금액+임대보증금이 주택가격 이하여야 한다'는 조건을 만족하기 어렵다.

쉽게 얘기하면, 신축의 다가구주택, 다세대주택에서 '전세보증금 반환보증보험'을 든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폭탄을 안고 가야 하는 게 눈앞의 현실이라면, 앞으로 빌라의 전세 시장은 더 얼어붙을 것이다.

전세 안정성을 높이는 것은 단순히 임차인 좋으라고 하는 것을 넘어서 임대 경쟁에 우위를 점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전세 안정성을 높이는 방향이 건축주에게 이익이 된다는 전제 하에 몇 가지 시도해 볼 만한 것을 얘기하자면 첫째는 취득세 신고 시 표준건축비가 아닌 실제 공사에 투입된 비용으로 신고하라는 것이다. 취득세는 당연히 오르겠지만 추후 양도세는 절감할 수 있어 어차피 조삼모사이다. 

두 번째는 선순위채권금액이 주택가액의 60%를 넘지 않도록 관리하라는 것이다.

세 번째(이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싶은데)는 잠시 거쳐가는 집이 아닌 내 집처럼 오래 살고 싶은 '좋은집'을 지으라는 것이다.


임차인과 임대인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좋은 건축물을 만들자는 목표를 가지고 투닷건축사사무소를 시작했었다. 왜곡된 소형공동주택 시장이 제자리를 찾아가는데 작은 보탬이 되고자 했고 아파트의 하위가 아닌 다른 주거 상품으로써의 가치를 만들어 가고자 했다.

그런데, 빌라왕이라는 개나쁜 시키가 나타나 우리의 노력을 허망하게 했다.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나지만 이 독침이 독이 아닌 약이 되길 희망하며, 난 나의 노력을 이어가기로 한다.

  

첨언 하자면, 혹시 빌라를 매입하거나 전세를 얻을 때 등기부등본만 확인하지 마시고 '건축물대장'도 확인해 보시기 바란다.

건축물대장에는 그 집의 설계자와 시공자가 함께 기록되어 있는데, 설계자나 시공자의 실적, 재무상태 등을 인터넷을 통해 검색해 알아보면 그 집이 날림으로 지어졌는지, 제대로 지어진 집인지 판단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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