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기대를 안 하면 됩니다.
그해 겨울은 옷장에서 패딩 한 번 꺼내 입지 않았을 만큼 그다지 춥지 않았다. 사실 내가 기본적으로 추위를 타지 않는 사람이어서 그렇긴 했지만... 어쨌거나 그 겨울의 가운데서 만났던 - 편의점 찜통에서 방금 꺼낸 호빵처럼 따끈따끈한 그 새로운 관계 앞에 서서 나는 분명히 말했다.
"나는 너를 조금도 믿지 않아. 네가 나쁜 새끼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또 좋은 사람이라는 확신도 없어. 네가 뭘 하든 상관없고 네가 하는 모든 말이 다 거짓말이라도 아무 상관도 없어."
"아, 나도 그렇게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해명할 생각은 없어. 시간이 지나고 보면 알겠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건 내가 부탁한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고 네가 직접 판단할 문제니까."
반듯하게 쓴 모범답안 같은 말에 나는 코웃음을 쳤다.
"내가 그만큼의 시간을 너랑 보낼 것 같아?"
"아, 그건 그렇네."
"그래, 뭐 그거야 어떻게든 되겠지. 알게 뭐야. 아, 그래. 됐고, 그냥 나는 누군가에게 기대하는 게 싫어. 누군가가 괜찮은 사람일 것이다. 나에게 이렇게 저렇게 잘해줄 것이다. 이런 생각들 말이야."
상대는 상당히 조심스러운 사람이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실망하니까. 기대를 안 하면 실망하지 않아도 돼. 나는 누군가에게 내 기분을 맡기고 싶지 않거든. 조금도."
"... 그래, 맞는 말이네."
큰 일을 한 번 겪고 한껏 날카로워진 사람과 그것을 받아줄 수 있을 만큼 둥글고 긍정적인 - 하지만 그 역시 과거에 어떠한 고난을 겪었던! 그런 사람의 조합. 뭐랄까, 상처를 받은 주인공이 마음만 열면 이제 모든 것이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전형적인 로맨스영화 클리셰에 가까운 시작이었다. 그래 어쨌거나. 그렇게 따끈따끈했던 관계는 당연히 조금 식었지만 또 그럭저럭 미지근하게 이어졌다. 그리고 아무런 기대도 없었던 나에게 그 관계의 온도는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괜찮았고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딱 좋았던 것 같다. 하지만 슬프게도 해가 지나고 조금씩, 조금씩 그러다 완전히 식어버렸다. 아니, 짜게 식기만 했으면 다행이다. 그 관계는 지독하게 현실적이었다. 그러니까, 식어버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냥 썩어서 문드러져버렸다.
기세 좋게 너에게 아무 기대도 없다, 나는 너에게 절대 내 기분을 맡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했던 사람은 마지막에 엉엉 울고 말았다. 그것도 흉측하게 썩어서 곰팡이도 피고 냄새도 나는 그 유통기한 다 지난 호빵을 한 입만이라도 먹어보겠다면서 아주 더럽게 울었다. 진짜 정말 추하게 숨 넘어가도록 다 내려놓고 울었다.
기대를 조금도 하지 않는다고 해놓고 왜 그렇게까지 울어야 했냐고? 아, 물론 완전 실망해서 그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