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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혜 May 31. 2021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야

어떤 말로도 위로가 안될 땐그냥 안아주면 돼

   아기들을 예뻐하는 것과 카우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언니나 오빠가 있어서 조카들을 돌본다든지 하면 좀 수월 했으려나. 달랑 남동생 하나뿐인 난 주변에서 아기 키우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아기가 더 이뻤는지 모른다. 형제도 너무 단출해서 많은 사람들이 부러웠다. 결혼하면 애도 많이 낳고 싶었다, 

    육아를 글로만 배우는 건 첫 발자국을 떼는 아이의 걸음마 수준과 맞먹는다. 왜 우는 건지 말도 안 통하고 그때는 인터넷이니 sns니 그런 거 없어서 물어볼 데도 없고 아기가 자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초보 엄마는 첫아들을 그렇게 무식하게 키웠나 보다. 애를 많이 나으려던 생각도 사라지고 살림과 육아 단조로운 일상에 힘이 들 때쯤 옆 집에 세 딸을 둔 아줌마와 친해졌다. 자기 애들도 복작거리는데 날 불러서 점심을 같이 먹여줬다. 그 밥때 문이었을까? "애는 낳을 때 같이 낳아 후딱 키우는 게 나아"라며 날 부추겼고 덜컥 둘째가 생겼다. 입덧 한번 없던 난 밥을 하기도 싫고 먹기도 싫어서 분식집에 가 사 먹었다. 남편은 해외 출장이 잦아서 옆에 있어주지 못했고 복숭아가 먹고 싶던 난 황도 통조림 캔을 사서 혼자 다 먹어 치웠다. 딸아이는 자기가 아픈 게 그런 거 먹어서라고 한다.

  '어린이에게 새 생명을'이라는 캐치 아래 소아암 환자나 불치병 모금을 하는 걸 보면서 그 아이가 내 아이가 될 거라곤 아무도 생각을 안 할 거다. 나 역시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으니까. 사람의 생명은 누구에게 달렸나... 난 떠났던 신앙을 의지 할 수밖에 없었고 하나님께 매달렸다. 절박하면 어쩔 수 없나 보다. 눈물 마를 날이 없다 했나 그게 나였지 싶다. 난 책과 영화 좋아해 감성이 발달하다 보니 드라마 보다가도 눈물 흘렸다. 그런데 그 어떤 걸 봐도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딸과 관계된 거나 기도할 때 하염없이  눈물 콧물이 쏟아졌다. 

    딸은 모유를 먹었는데 그때 난 참 행복했다. 내 가슴이 처진다한들 아이의 그 사랑스러운 눈빛과 유대감은 바꾸고 싶지 않았다. 더 낳을 생각이 없어서 딸이 천천히 크기를 바랐으니까. 사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젖병의 젖꼭지를 안 빨고 밀어냈으니. 첫 돌이 지날 때쯤 간호사 시누이가 딸의 기저귀를 갈아주다 몸에 이상을 발견하고 그 후로 긴 여정의 투병이 시작됐다. 그땐 소아암 환우가 많지 않아 대형병원인데도 항암주사 맞는데 침상도 안 주고 휴게실 의자에서 맞아야 했다. 걷지도 못하는 아기라 업고 기저귀 가방과 링거 스탠드 끌고 주사를 맞히고 약을 타러 다니고 차도 없어서 버스를 타고 먼 길을 오고 가고 했다. 입원과 퇴원은 밥 먹듯 일상이 되었고 위 오빠는 고모네 큰엄마 댁을 전전했다. 오빠조차 천식 환자라 일 년에 최소 두 번은 기본으로 입원했으니 둘 다 함께 입원한 적도 았었다. 

       긴 질병의 자녀를 둔 엄마는 마치 죄인과 같다. 마음에 늘 무거운 돌덩이를 안고 살았고 모든 중심과 신경이 달에게 집중됐다. 암수술은 잘 되었으나 화학요법 방사선 치료받았고 그 치료를 마치니 선천성 심장병도 있다는 걸 알게 됐으나 다행인지 수술할 정도까진 아니었다. 그 후로 단백뇨로 인해 이십몇 년 버티다 투석과 신장이식까지 하게 되고 내 신장을 주게 되었다. 내 신장을 줘서 고칠 수 있음에 너무 감사했다. 딸 역시 먹지 못했던 음식을 먹게 되고 새 생명을 얻어 감사하다 했다. 더 많이 아픈 아이에 비하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하지만 딸은 애기 때부터 아파 그로 인한 마음의 상처와 피해의식이 컸다. 딸에게 난 엄마면서 친구면서 자매 같기도 한 우리는 서로가 특별한 존재였다. 

      아파 본 사람이 아픈 사람의 마음을 알듯이 겪어 보지 않고는 정말 그 심정을 다 헤아릴 수가 없다. 섣부르게 위로한다고 던진 말은 오히려 상처가 될 뿐이다. 정말 병원에 가서 링거 한번 안 맞아 본 사람도 많다. 코로나로 지금은 손소독제를 많이 쓰지만 딸이 수술 후 손소독제를 쓰니 그 냄새나는 거 안 쓰면 안 되라며 묻는데 마음이 쓰렸나 보다. 어찌 보면 당연한 거다. 모르니까. 가까이서 제일 잘 아는 엄마가 위로자가 될 수밖에.....

      난 아파도 엄마가 한 번도 병원에 같이 간 적도 머리를 쓰다듬은 적도 없었다. 내 엄마는 가정의 경제를 도맡아야 하셔서  새벽에 나가고 밤에 들어오셨다. 친척 할머니가 살림을 돌봐주셨다. 아버진 화가셨고 예술인은 가난했다. 생모가 아니지만 그 덕에 편안한 삶을 누려 늘 감사했고, 옆에 있어주는 게 엄마인걸 깨닫는다.

     엄마로서 난 참 서툴렀다. 사랑한단 말도 잘 못했고 껴 안아 주지도 잘 못했다. '엄마도 엄마가 첨이야 아픈 딸을 키우는 게 처음이라서...' 그런데 아픈 딸을 키우며 서로 부둥켜안고 우는 것만으로 큰 위로가 되는 걸 알았다. 아파도 밝고 통통 튀는 성격의 딸 때문에 웃는다. '너 때면에 울고 너 때문에 웃는다 네가 있어 엄만  행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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