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시카고에 첫눈이 내렸다. 차가운 바람과 함께 하얀 눈송이가 흩날릴 때면, 이민 와서 처음 겪었던 시카고의 겨울이 떠오른다. 낯선 도시, 낯선 날씨, 낯선 언어 속에서 첫해의 눈은 나에게 설렘보다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어느 겨울날, 갑작스러운 전화가 걸려왔다. 데보라의 학교에서 온 전화였다. 영어는 서툴렀지만, “She is sick”이라는 말만은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이가 아프다는 걸 알았지만, 그 이상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운전을 못 하던 나는 한 살, 세 살짜리 두 아이를 돌보며 꼼짝없이 집에 갇혀 있었다. 쏟아지는 눈 속에서 어쩔 줄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 그때마다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막막함이 밀려왔다. 남편은 일터에 있었고, 도움을 요청할 이웃도 없었다. 차가운 눈보라가 창문을 두드리며 마음마저 얼게 했다. 고립감과 무력감에 눈물만 나왔다. 데보라는 여전히 학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손 하나 쓸 수 없는 현실이 답답하게 만들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초인종이 울렸다. 창밖을 내다보니 한 중년 신사가 눈 덮인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문을 열어보니 데보라가 그의 손을 꼭 잡고 서 있었다. 그는 데보라의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인 Gavin이었다. 눈 속을 뚫고 직접 우리 집까지 데려다준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Mrs. Kim. 데보라 괜찮습니다.”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감격에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Gavin 선생님은 내게 단순히 아이를 데려다준 것 이상의 존재였다. 그의 손길은 추운 시카고의 겨울을 녹이는 따뜻한 위로였다. 어린 딸의 손을 꼭 잡고 있던 그의 모습은 잊을 수 없다. 데보라는 교장 선생님의 보호 아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짓고 떠났지만, 그날 그의 친절은 내 마음에 오래도록 남았다.
ㅕ매년 첫눈이 내리는 날이면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추운 눈보라 속에서도, 가슴속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어 준 Gavin 선생님. 훈훈한 이웃이 있기에 시카고는 여전히 살만한 땅이다. 이민자로서 어려운 시간 속에서도 나를 지켜준 그날의 친절은 내가 이곳에서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