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마치 깊은 우물과 같다. 맑고 투명한 물이 표면에 비칠 때도 있지만, 때로는 흐릿하거나 바닥에 감춰진 채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글쓰기는 그 우물 속으로 작은 바구니를 내려 보내, 삶의 한 조각을 건져 올리는 작업이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순간들은 문장 속에서 생기를 얻고, 때로는 새로운 의미를 품게 된다.
어느 날 나는 오래된 가족 앨범을 들춰보았다. 희미한 흑백 사진 속의 사람들, 익숙한 풍경,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어린 나. 손끝에서 사진 한 장을 만지작거릴 때마다 잊혔던 기억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 순간마다 나는 과거의 내게로 여행을 떠났다. 이 작은 여행이 시작되자, 일상에 묻혀 있던 감정들이 솟아오르며 펜 끝으로 흘러나왔다.
가령, 어린 시절 할머니의 손을 잡고 걷던 흙길을 떠올렸다. 그날의 햇살, 바람의 온기, 그리고 할머니가 들려주던 옛이야기 들은 단순한 추억이 아닌 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글로 써 내려가자 그 기억은 단순한 장면이 아니라, 할머니와 나를 잇는 끈으로 다시 살아났다. 글쓰기는 단순히 기억을 복원하는 작업이 아니라, 그것을 현재의 삶에 맞게 재구성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예술이다.
어떤 기억은 쓰기 힘든 순간들을 담고 있다. 잊고 싶었던 고통이나 트라우마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기억은 고통과 함께 성장을 가져다준다. 작가 조안 디디온은 “글쓰기는 삶의 혼란을 정리하는 도구”라고 말했다. 나 또한 쓰기를 통해 고통을 바라보고, 그것을 정리하며 새로운 관점에서 이해하게 되었다. 과거를 글로 표현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과거를 재해석하고 내면화하는 과정이다.
글쓰기는 기억의 거울이자,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다. 이 글이 끝날 무렵, 나는 다시 한번 깨닫는다. 기억은 멈춘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를 비추는 빛이며, 나를 더 깊이 이해하게 만드는 도구다. 우물 속 샘물은 내가 글을 쓸 때마다 끝없이 솟아오른다. 그러니 기억 속으로 더 깊이 가라앉아 보자. 글쓰기는 그 기억을 손에 쥐게 하는 가장 아름다운 그물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