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Essay2

붉은색에 대한 낯선 기억

by lee nam

어릴 적, 그러니까 두 살 혹은 세 살 무렵의 흐릿한 기억 속에는 커다란 초록색 덩어리가 하나 남아 있다. 겉은 매끄럽고 단단하며, 짙은 초록 줄무늬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고, 그것이 수박이라는 걸 알게 된 건 한참 후의 일이었다. 내 키만 한 그 덩어리가 여름날 돗자리에 앉은 가족들 사이에서 반으로 갈라지는 순간은 어린 나에게 작지 않은 충격이었다. 껍질이 갈라진 틈으로 드러난 것은 생생한 붉은 속살이었다. 마치 땅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른 용암 같기도 하고, 상처 난 짐승의 피처럼 강렬했다. 그것은 내가 알고 있던 사과나 배의 온화한 색과는 전혀 달랐다. 사과의 뽀얀 빛이나 배의 맑은 황금빛은 따뜻하고 안정적인 감정을 불러왔지만, 수박의 붉음은 차갑고 위협적인 낯섦으로 다가왔다.


수박 옆에 놓인 작은 방울토마토 또한 다르지 않았다. 겉은 매끄럽고 둥글었지만, 그 안에 숨겨진 붉음은 더욱 진했다. 붉은색은 곧 피라는 단순한 공식이 어린 마음속에 강하게 각인되었다. 어른들은 맛있다며 수박과 토마토를 건넸지만, 나의 입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수박의 아삭한 질감과 은근한 단맛, 토마토의 새콤하면서도 묘한 풍미는 익숙하지 않은 감각이었고, 그것은 곧 경계의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그에 반해 사과나 배는 안전한 맛의 상징이었다. 아삭하고 단맛이 확실한 사과, 입안 가득 퍼지는 배의 시원함은 내가 이미 알고 있던 세계의 맛이었다. 나는 수박을 멀리하고 사과와 배를 찾았고,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돌리며 보채던 모습은 가족들에겐 웃음을, 나에겐 일종의 생존 본능이었다.


지금은 그 과일들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수박과 토마토는 여름이면 당연히 떠오르는 익숙한 이름이고, 그 붉은색조차 시원함과 풍성함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가끔 수박을 반으로 자르거나, 진열된 토마토를 바라볼 때면, 그때의 낯섦과 거부감이 순간 스쳐 지나간다. 어쩌면 그때 나는 단순히 색에 놀란 게 아니라, 처음 접하는 맛과 감각 자체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꼈던 건지도 모른다. 어린아이에게 익숙하지 않은 모든 것은 위협일 수 있다. 붉은색이 피를 연상케 했고, 새로운 질감은 무의식적으로 위험으로 인식되었을지 모른다. 어린 뇌는 그 낯선 자극에 거부 반응을 일으켰고, 나의 손은 자연스레 익숙한 쪽으로 향했다.


이러한 감각의 기억은 단지 어떤 음식이 좋고 싫었다는 수준을 넘어선다. 어린 시절의 감각은 우리의 초기 경험과 깊이 연결되어 있고,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서도 무의식 깊숙이 남아 이후의 취향과 인식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낯선 것을 경계하고, 새로운 자극을 본능적으로 피하는 태도는 아마도 이처럼 초기의 감각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성장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을 기르고, 경계를 허물기도 하지만, 어린 시절의 강렬한 첫인상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기억은 단지 과거를 저장하는 창고가 아니라, 감정과 감각이 얽힌 살아 있는 앨범이다. 그것은 언제든, 뜻밖의 순간에 조용히 펼쳐져 우리를 어린 시절로 데려다준다.


마트의 과일 코너나 여름날의 뷔페에서 수박이나 토마토를 볼 때, 나는 무의식 중에 한 걸음 멈춘다. 그 색은 더 이상 두렵지 않지만, 처음 그 붉음을 마주했을 때의 낯선 감각은 내 안 어딘가에서 여전히 살아 있다. 그것은 단순한 음식의 추억이 아니다. 세상을 처음으로 경험하던 아이가 느꼈던 진짜 감정, 감각, 거기에서 비롯된 세계 인식의 조각들이다. 수박 한 조각에 얼굴을 찡그리고 고개를 돌리던 어린 나는, 어쩌면 세상의 복잡한 자극을 본능적으로 감지하며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 했던 순수한 존재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은 오늘의 나를 이루는 무수한 감각 조각 중 하나로 여전히 남아 있다.


결국, 어린 시절의 붉은 낯섦은 이제 익숙함과 어울려 미묘한 향수를 남긴다. 그 색은 더 이상 나를 멈춰 세우지 않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익숙해진 세계 속에서도, 낯선 감각이 처음 내게 말을 걸던 순간의 기억은 선명하다. 우리는 모두 그런 기억을 하나쯤은 품고 살아간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계속해서 새로운 세계를 조심스레 배우고 받아들이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나에게 수박과 토마토는 이제 맛있는 여름의 일부이자, 동시에 세상을 처음 배워가던 어린 시절의 강렬한 추억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요람을 흔드는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