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 적 살던 고향 마을은 병원이나 약국 같은 건 한 곳도 없었다. 시골 어린이들은 청진기를 목에 걸고 있는 의사 모습을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었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은 아프면 병원이나 약국이 없어도 당골이나 점쟁이와 같은 무속인들을 부르곤 했다. 그들은 밤새도록 악귀를 쫓아내는 굿으로 사람들의 불안을 덜어주었다. 그리고 음식을 먹고 체하는 사람들에게는 된장 물을 먹이고, 여름에 더위를 많이 탄 사람들에게는 익모초라는 풀을 찧어 쓴 즙을 내어 마시게 했다. 마을 사람들은 산과 들의 약초들을 캐어 달여서 먹거나 갈아서 바르는 등 다양한 자연요법으로 사용했다.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 때의 일이었다. 광주에서 전남여고에 다니는 언니와 그녀의 친구들이 시골집에 놀러 와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언니 친구들은 도시에서 자란 만큼 초록색으로 물든 산과 들, 그리고 숲들을 바라보며 농촌의 신비스러운 자연환경을 즐겼다. 또한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산길을 따라 용암사라는 절을 방문하기도 했다. 까만 플레어 교복 치마에 새하얀 반팔 블라우스를 입고 허리에는 학교 마크가 있는 버클을 건 벨트를 매고, 왼쪽 가슴에 별표 모양의 배지를 달고, 머리에 하얀 빵떡모자를 쓰고, 흰 양말과 하얀 신발을 신고 등장한 언니들의 모습은 시골 꼬마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는 그들을 선망하며 강아지처럼 따라다녔다. 어느 캄캄한 밤에 언니와 나, 언니의 친구들은 참외 서리를 갔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인가가 없는 산자락에 있는 참외 밭으로 갔다. 평소에 나는 검정 고무신을 신고 있었지만 그날 밤은 특별한 외출이라 꽃 코 고무신을 신고 갔다. 추석에 신으라고 어머니가 미리 사다 놓은 꽃 고무신이었다. 신작로를 따라 한참을 걸어서 가다가 우리들은 황새봉 근처에 있는 산자락으로 들어섰다. 풀숲에서 반짝거리는 반딧불의 불빛은 여름밤의 적막을 깨뜨리며 가슴을 조이게 했다.
언니와 언니 친구들은 풀숲에서 들려오는 흥겨운 풀벌레 합창 소리를 들으며 산등성이에 있는 참외 밭에 도착했다. 참외의 향기가 코를 찌르며 온 밭에 가득했다. 그런데 참외를 따서 담을 자루나 바구니를 가져오지 않았다. 그런데 언니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남아, 좋은 수가 있어. 네 고무줄 치마를 벗어봐. ” 나는 허리에 고무줄을 넣은 하늘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언니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치마를 벗어 언니에게 주고 삼베 팬티 하나만 걸치고 있었다. 언니는 내 치마의 고무줄을 당겨 묶더니 신나게 말했다. “ 야, 이거 참 그럴싸한 자루가 됐네.” 언니와 언니 친구들은 팬티만 입고도 서 있는 나를 보며 재미있다는 듯 깔깔댔다. “ 너는 밭가에 서서 망을 보고 있어. 우리가 참외를 딸게.” 하며 언니들은 자루를 가지고 참외 밭으로 들어갔다. 밭가에서 웅크리고 앉아서 망을 보고 있는 내 가슴은 떨리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갑자기 “도둑이야, 도둑놈들 잡아라. “ 하며 소리치며 나타날 것 같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언니들을 기다렸다. ‘잠깐의 시간이 어찌나 길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잠시 후 언니들은 숨을 죽이며 참외를 따기 시작했다. 언니들의 떨리는 손들이 재빨리 움직이더니 어느새 참외 자루가 가득 채워졌는지, ” 이거면 됐어. 우리 먹기에 충분할 것 같아. 그만 따고 가자. “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 휴우, 살았다. “ 하며 큰 한숨을 내쉬었다. 언니들과 내가 참외 자루를 어깨에 들쳐 매고 수풀을 헤치며 숨 가쁘게 산 밑으로 내려오는 순간이었다. 잽싸지 못한 나는 산길을 내려오다가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꽃신 한 짝이 벗겨져 데구루루 굴러 아래쪽 풀숲으로 떨어졌다. 나는 너무나 깜짝 놀라며, “ 언니, 내 꽃신이 벗겨졌어. 내 꽃신 찾아줘.” 하고 애원했다. 언니들은 뒤돌아볼 겨를도 없이, “남아, 지금은 안돼. 그냥 여기를 빨리 빠져나가야 해.” 하면서 급히 도망쳐 산길을 내려갔다. 나는 더 이상 떼를 쓸 수도 없이 꽃신 한 짝을 뒤로한 채 언니들을 따라갔다.
얼마 후, 우리는 황새봉 신작로에 도착했다. 신작로는 저수지 길을 따라 나 있었다. 그곳에서 집에까지는 시오리나 걸리는 먼 거리였다. 언니들과 나는 한참 동안 포장도 되지 않은 거친 신작로 길을 걸어갔다. 얼마쯤 걸은 후 우리는 저수지 가에서 넓적한 바위들을 볼 수 있었다. 숨 가쁜 순간들이 지나고 모두 편안한 마음으로 평평한 바위 위에 앉아 쉴 수 있었다. 우리는 참외 자루를 끌러 참외를 꺼내 들고 우두둑 깨물어 맛있게 먹었다. 참외를 먹다가 익지 않은 것은 저수지 물속에 휙 던져 버리고 다시 새로운 참외를 꺼내 들었다. 어쨌든 우리가 딴 참외는 여기서 다 먹고 가기로 했다. 그래서 참외 먹기 내기 경쟁이라도 하듯 잘게 씹을 겨를도 없이 먹어댔다. 나도 언니들에게 뒤질세라 씹지도 않고 마구 삼켰다. 참외 자루는 다시 내 치마로 변신했다. 흥미진진한 참외 서리 체험을 마친 언니들은 콧노래를 부르면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나는 갑자기 배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뱃속에서 갑자기 천둥소리가 난 듯 배가 뒤틀리면서 아팠다. 나는 갑자기 배를 움켜쥐고, “아이고 배야, 아이고 배야.” 소리를 지르며 길에 털썩 주저 않고 말았다. 언니들은 샛노랗게 변한 내 얼굴을 쳐다보며 몹시 당황하기 시작했다. 언니들은 죽는다고 고함치는 나를 교대로 둘러어고 마을 어귀에 도착했다. 바로 그 순간 조용한 마을에 대소동이 일어났다. 마을의 개들이 놀라 자다가 깨어 컹컹 짖어대고, 잠든 닭들도 새벽인 줄 알고 “ 꼬끼오, 꼬끼오” 울어댔다. 그 바람에 마을 사람들은 도둑이라도 쳐들어 온 줄 알고 놀라 깨어났다. 언니들이 나를 둘러어고 집에 도착하자 주무시던 아버지 어머니도 깜짝 놀라 깨어나셨다. 아버지는 곧바로 마당에 멍석을 깔고 나를 그 위에 눕혔다. 나는 멍석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면서, “ 아이고 배야, 아이고 배야.” 하면서 죽는다고 소리쳤다. 이 소식은 순식간에 마을 전체에 퍼졌고 마을 사람들은 놀라 우리 집 마당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어머니는 장독대에서 된장을 가져와 물에 타서 나에게 마시게 했다. 그러나 아무 효험이 없었다. 사람들은 멍석에서 구르는 나를 보며 발을 동동 굴러보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 순간 한 사람이 마을로 달려가 친척 할아버지를 모셔왔다. 그 할아버지는 어른의 팔 길이만큼 긴 머윗대를 가져오셨다. 할아버지는 긴 머윗대를 내 목구멍 속으로 쑥 집어넣어 뱃속을 휘휘 젓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내가 낫기를 위해 기도라도 하는 듯 조용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할아버지가 머윗대를 입에서 빼자마자 나는 참외 덩어리들을 모두 토해냈다. 그러자 나는 편안한 모습으로 잠이 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즐겁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내가 미국에 이민 와서 산 지도 어느덧 37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당시에 살던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하늘나라로 가셨다. 나의 생명을 머윗대 내시경으로 구해주셨던 친척 할아버지도,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도 이 세상에서는 다시 뵐 수 없다 언니와 나는 멀리 떨어져 살아왔지만, 그날의 추억은 지금도 우리들 마음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참외 서리를 하면서 느꼈던 설렘, 그리고 긴장감은 이제 와서 생각해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오늘은 당진에 사는 언니에게 이 글을 보내야겠다. 언니가 이 글을 읽으면 타임머신을 타고 풋풋한 여고생으로 돌아가 그날의 추억 속으로 빠져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