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페이지를 넘길 때 [디카시 045]
햇살이 창을 넘어와
두 사람의 어깨 위에 조용히 내려앉습니다.
오랜 세월을 견딘 한 그루 나무가
이제 막 돋아난 여린 잎에게
기꺼이 자신의 그늘을 내어주듯,
낡은 안경 너머로 흐르는 것은
딱딱한 글자가 아니라
평생을 걸러온 다정한 빛입니다.
한 장의 페이지를 따라
작은 손은 세상을 배우고,
큰 손은 지나온 시간을 다시 읽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사랑은
소리 없이 넘겨지는 한 장의 책.
아이야, 서두를 것 없단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너의 눈동자 속에서 비로소 숨을 얻으니까.
굽은 등 위로 스미는 오후의 온기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계절을 천천히 닮아갑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챙겨야 할 마음의 자리가 늘어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전히 누군가의 자식으로서 연로하신 부모님을 살피고, 가장과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하면서, 이제는 어느덧 '할아버지'라는 낯설고도 따뜻한 이름표까지 가슴에 달았습니다.
요즘 내 삶의 무게중심이 조금씩 옮겨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브런치를 처음 시작하던 재작년만 해도 내 글의 주인공은 주로 어머니였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요양원에 안정적으로 적응하시고 마음의 짐을 조금 덜어낸 사이, 그 빈자리를 손자의 이야기가 빼곡히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설 연휴에는 손자를 만나러 서울에 다녀왔습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아이와 함께 쌓은 추억은 긴 여운이 되어 남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세상에는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참 많습니다. 막상 경험해 보면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결의 감동과 마주하게 되는 일이 대부분입니다.
'내 자식 키울 때와는 또 다르다'던 어른들의 말씀이 이제야 비로소 내 몸에 와닿습니다. 아이의 맑은 눈망울을 들여다보며, 나는 내 삶의 새로운 계절을 지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