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혜산 성철스님 순례길에서 [디카시 048]
경호강 바람이
마른 가지 사이로 흘러가던 날
우리는 걷다가
문득 한 나무 앞에서 멈추었습니다.
이 거대한 생명력,
살아남은 자가 뿜어내는 이토록 완벽한 침묵은
그 자체로 경외(敬畏)의 제단입니다.
사람들은 알레르기를 말하며
서두러 베어버리는 나무였지만
그대는 강가에서 살아남아
홀로 완벽해졌습니다.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뻗은 저 은빛 수형은
한 생이 얼마나 곧게
오래 버틸 수 있는지를
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아래 모였고
같은 나무 아래였지만
우리의 마음은 제각각 다른 길을 걷습니다.
누구는 하늘로 치솟은 그대의 용기를 읽고,
누구는 굽이진 가지 끝에 걸린 바람을 보며,
누구는 그저 그대의 아득한 생의 깊이에 잠깁니다.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아도 괜찮습니다.
그대의 넉넉한 품이 이미 우리 모두를
하나의 풍경으로 묶어두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