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과 죽음의 3일간 여행 (마지막 회) -
나는 베이비부머의 마지막 세대이다.
청동기시대 같은 어려운 환경에 태어나서 최첨단 스마트시대까지 경험하고 있다.
사회전반의 급격한 문명의 발전과 함께 시대정신도 빠르게 변해왔다. 특히 코로나를 경험하고 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결혼식과 장례식 문화도 그러했다.
"장인 어르신과 우리 어머니가 매주 일요일 만나신다."
막장 드라마에 나오는 소설 같은 이야기이지만 사실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다.
나의 형제자매는 3명이고 우리 집사람은 4남매이다. 나의 여동생은 샌프란시스코, 남동생은 서울에 살고 있으며 우리 집사람은 4형제자매의 막내인데 모두 서울과 수원에 살고 있다.
고향이 경남인 우리 부부는 자연스럽게 양가집 부모를 케어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4명의 친가, 처가 부모님 중에서 나는 누가 먼저 가실지 마음속으로 번호표를 정해두었다.
세상은 내 생각대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었다. 가장 건강하고 가장 에너지가 넘치는 우리 아버지께서 79세인 8년 전에 제일 먼저 돌아가셨다. 당시에 받은 충격은 상당하여 여러 번 수술도 했고 많은 비용도 지출하였다. 그리고는 장모님께서 5년 전에 돌아가셨다.
요양보호사가 오지 않는 주말에는 남아계신 장인어른과 우리 어머니를 우리 부부가 케어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사돈지간에 매주 일요일은 같이 식사를 하신다. 처음에는 어색하게 생각하더니 수년간 지속되니 자연스럽게 만나서 식사도 하신다. 오랜 시간 정기적으로 만나다 보니 장인어르신도 은근히 기다리신다. 갑작스러운 사정으로 어머니가 처갓집에 장인 어르신 만나는 장소에 오지 않으면 평소 말수가 적으신 장인 어르신은 딱 한마디 하신다. "할매는?"
초기 치매가 있으신 두 분에게 치매는 오히려 더 도움이 되었다. 누구를 만났는지 잘 기억을 못 하신다. 그런 세월이 약 4년 정도 진행되었다.
"임종의 작별인사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하나?"
2023년 계묘년 새해 아침이 밝았다. 희망찬 새해 인사를 주고받는 설레는 아침이었다. 그런데 병원에서 급한 연락이 와서 달려갔다.
지난가을 추석모임 때 넘어져 고관절을 다친 장인어르신이 입원하여 계시는 병원에서 가장 가까이 살고 있는 우리 부부에게 연락이 왔다.
“어르신 위독하시니 빨리 와주셔야겠습니다.”
오후 4시경부터 병실을 지켰다. 의사 선생님께서 나직이 알려주었다.
“아직 귀를 살아있어 말씀을 다 알아들으시니 하시고 싶은 말씀 다 하세요”
말문이 막혀 제대로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지만,
우리 집사람과 나는 장인 어르신이 가장 듣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일까 생각하면서
‘평생 면사무소에 근무하면서 고생하셨다는 이야기’와 ‘아들, 딸 공부시키신다고 하고 싶은 것 하지도 못하고 힘든 시간 잘 살아주신 이야기’ 등을 말씀드리고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
눈을 뜨지도 못하고 힘겹게 호흡을 이어가던 어르신은 오른쪽 눈가에 이슬 같은 눈물이 맺혔다. 그리고 내 손에 마지막까지 힘을 주면서 잡으려고 하는 것은 느꼈다.
그 순간 참았던 울음이 폭발하여 펑펑 소리를 내 울고 말았다. 이어 30여 분이 지났을까... 의사 선생님이 오셔서 잠시 나가 있으라고 했다.
나의 생에 마지막 날에도 이와 똑같은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임종을 앞둔 시점에 누군가가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특히 내가 사랑하는 딸, 아들이 해주면 더욱더 좋겠다. 나의 딸과 아들이 나에게 이런 얘기를 해주면 좋겠다.
“아버지, 제가 아버지의 딸로 태어나서 너무 행복했습니다. 철이 없어 아버지의 마음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가끔 원망도 했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니 아버지가 얼마나 저를 사랑했는지 이제야 할 것 같습니다. 부디 하늘나라에서 편안하게 지내시고 다음 생에도 저의 아버지가 되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너무 과도한 욕심을 내었는지 모르겠다. 물론 이 메시지는 우리 딸, 아들도 보지 못할 것이고 단지 내가 상상해 본 것일 뿐이다.
조선족 남자 간병인께서 들어오시더니 우리가 가족인 것을 알고 엄지를 올리면서
“이 병실에서 어르신이 제일 얌전하셨어요. 정말 편안하게 잘 지내셨어요”하는 것이었다.
고관절이 부러져 3개월을 병원에 누워 있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정말 힘든 일이다.
걷는다는 것이,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겠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아끼고 아껴 써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나에게 죽음을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리의 인생은 어쩌다, **이 되는 것 같다.
어쩌다 태어났고, 어쩌다 어른이 되었고, 어쩌다 교사가 되었고, 어쩌다 퇴직을 하였다.
그리고 어쩌다 죽는 순간을 맞이하겠지
나에게 죽음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80세 이후에 우리 딸이 60세 생일 선물로 사준 빨간 배낭을 메고 길을 걷다가 심장마비로 죽고 싶다.
아들과 둘이 함께 스위스 알프스의 트레킹여행을 다닌 행복한 기억과 딸과 함께 눈 덮인 한라산에 올라갔던 가슴 벅찬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리고 나의 유골은 문수암과 보현암 깊은 골짜기에 뿌려 달라고 하고 싶다.
장인 어르신은 1933년생으로 20세의 나이로 해병대에 입대하여 22세가 되던 1953년 한국전쟁 전선에 투입되어 참전하신 국가유공자이시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불행한 세대 중에 한 분은 1930년 초에 태어나신 분이다. 태어나서 보니 일제 강점기였고 20대 청년이 되어서는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고, 젊음을 바쳐야 할 3,40대는 우리나라가 아주 가난했던 그런 시대였다.
평생 국가유공자의 마크가 새겨진 모자를 쓰기를 좋아하셨고 손주가 사준 유공자 모자를 보물처럼 여기셨다.
장인 어르신은 오직 고성 시골집 한 집에서만 약 70년을 사셨다. 군대를 갔다 와서 결혼한 20대 초반부터 91세가 되는 날까지 흔한 이사 한번 안 하셨다. 장모님이 돌아가시고 노년에는 내가 퇴직하고 마당에 심어준 수국을 유난히 좋아하여 툇마루에서 수국이 핀 정원을 살펴보는 것을 무척 좋아하셨고 주말마다 우리 부부가 찾아가서 같이 점심 먹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는 길에
하얀 달을 바라보면서
'죽음은 아름다운 것이다'라는 생각을 해본다.
장인 어르신이 참 편안하게 가시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세상의 아름다움을 다시 발견한다”라는 생각이었다.
늘 뜨는 하얀 달도 오늘은 무척 아름답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