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는 미안함으로 사무치고, 자식은 서운함으로 사무친다”
요즘 넥플릭스에서 「폭삭 속았수다」를 보고는 많은 위로를 받는다. 부모세대에 대한 애환과 고충을 이해하게 되고, 혹시나 자식에 대한 서운함이 생긴다해도 ‘퉁’치게 될 것 같다. 보기만해도 가슴이 참 따뜻해지는 드라마이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회상하면서 추모와 반성의 시간을 가져보았다.
사람이 그리운 거지, 시간이 그리운 건 아니잖아
- 琴泉 장추남 아버지 추모 9주년을 맞이하여 -
자식이 아버지를 이해한다는 것은 ‘인생을 알아가는 것’과도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작고하시는 그 순간까지 자식은 아버지의 인생을 이해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식인 내가 그러했다. 이것은 ‘아버지’라는 이름에 주어진 숙명인 것 같다.
작고하신 아버지의 9주기를 맞이하여 회고와 명복을 비는 마음으로 아버지를 회상한다.
<가난한 시절에 진주에 정착하다.>
젊은 시절, 부모님은 재력도 특별한 기술도 없이 시골 금산면에서 진주시로 가셔서 고모집에 얹혀살았다. 진주에 먼저 정착한 고모와 고모부의 도움도 있었지만 진주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시골 금산에서 할머니의 보살핌으로 생활하던 나는 8살이 되어 초등학교에 다니기 위해 진주로 전입하게 된다.
진주의 초등학교를 입학하여 졸업하게 된 것은 자식의 장래에 대한 염려와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예나 지금이나 자녀의 교육이 가장 우선시되는 우리나라의 정서는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그 당시에는 모두가 지독한 가난 속에 살았지만 아버지의 부지런함과 큰 아버지의 도움으로 우리 가족에게는 조그마한 골목집이 생겼고 흑백 TV도 있었다. 당시 국민드라마인 <여로>를 시청하기 위해 이웃 사람들이 우리 집에 모여들곤 했던 추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예술적인 재능이 남달랐던 아버지>
예술적인 재능과 관심이 남달랐던 아버지께서는 당시에 신문물이었던 전축을 장만하시고 장현의 노래 ‘미련’을 자주 듣고 했던 기억이 있다. 언젠가 안간마을에 있는 주말농장 농막에서 우연히 하모니카를 악보도 없이 부르는 것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하모니카 교습을 2년을 해도 겨우 엉성한 소리만 내는 나와는 다르게 아버지는 자연스럽고 고급스러운 음을 내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또한, 통영에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 통영에 손자의 돌잔치에 오셨을 때 노래방에서 ‘민들레 홀씨 되어’라는 노래를 기가 막히게 잘 부르셨던 아버지의 모습을 우리 부부는 잘 기억한다.
사진 촬영에도 남다른 재능이 있으셔서 진주촉석루 설경과 월아산 일출 사진은 진주시를 상징하는 대표작품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아버지의 글씨는 가히 명필이라 할만하다. 우연히 발견한 아버지의 친필글씨를 보면 요즘 사람들이 쉽게 쓰기 힘든 자연스럽고 숙련된 손놀림이 엿 보인다. 인쇄업이 쇠퇴기에 들어서는 와중에서도 출판업을 끝까지 유지하려고 하면서 진주의 다양한 예술인 문인들과 교류를 하고 글을 쓰고자 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한 자식으로 죄송한 마음 가득하다.
<진주를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사셨다.>
아버지의 사업이 번창하던 1979년부터는 아버지의 모습을 만나기 힘들었다. 너무나 바쁜 일정으로 인쇄업의 물량이 넘쳐 어머니와 우리 형제들은 밤낮으로 일손을 보태야만 했다. 너무 많은 일과 사회활동으로 어머니와 다투는 일도 종종 많아졌다. 아버지께서는 사업으로 번 돈은 사회를 위해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계셨다.
그래서 『향토의 정기』라는 책을 출판하기를 시작하여 『촉석루』, 『논개』, 『충무공 김시민』, 『진주사투리 사전』,『진주대관』 등의 책을 차례로 출판하여 판매되지 않은 책은 무료로 배부하였으며 개천예술제가 되면 진주관광 안내지도를 만들어 나누어주며, 은초 정명수 선생님의 서집과 오림 김상조 선생님의 『신등면지』’도 출판한 기억은 문화 예술계에 주요 인사들과 깊은 교류를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향 금산면에는 경상대 강희근 교수님의 시를 받아 고향 시비를 세워 고향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보여주셨다. 활발한 진주사랑 활동을 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주변 분들이 진주시 문화상 후보자로 추천하여 제9대 ≪진주시 문화상≫을 수상하셨으며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시고 개천예술제를 창시하신 파성 설창수 선생님께서는 아버지를 비단샘터란 뜻으로 ‘琴泉’이란 호를 지어주셨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께서 가족보다 진주를 더 사랑하신다던 푸념을 늘어놓았지만, 이제는 아버지를 이해할 것 같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학력도 낮은 상황에서 맨손으로 진주에 와서 사회적 저명인사, 교수, 지역 유명 예술가분들과 교류를 하기 위해서는 나눔을 실천함으로써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판단한다.
< 정이 유난히 많았던 아버지와 헌신적인 어머니 >
8남매 중에서 6번째인 아버지는 형제와 자매를 유난히 잘 챙기셨다. 그리고 홀로 남은 할머니도 돌아가실 때까지 보살폈다. 실질적으로는 어머니께서 할머니를 보살폈으며 할머니는 7년 동안 치매로 어머니의 희생과 헌신이 아주 많았다. 어머니께서는 세탁기가 나오고 펑펑 울었다고 한다.
“세탁기가 진작 나왔다면 할머니도 덜 고생하고 나도 덜 고생했을 텐데, 똥기저귀 빠는 것이 보통 힘든 것이 아니었다”
라면서 당시를 회상하곤 하신다.
아주 어린 시절 잠시 일본 땅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는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대신 일본에 계신 큰 형님을 아버지처럼 여기며 존경하고 잘 따랐다. 일본 큰아버지께서도 할머니를 잘 보살피는 우리 부모님에게 각별하였다. 일본 큰아버지께서는 진주에 오실 적마다 ‘올드파’라는 양주를 가지고 오셨는데 저도 큰아버지께서 주신 이 술을 마신 추억이 있다.
유머 감각이 뛰어나고 엄격하시면서도 부드러운 일본 큰아버지께서는 아버지의 가장 큰 후견인이자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아버지의 5형제 중 고향에 남아 고향을 지킨 것은 막내 작은 아버지였고 아버지께서는 막내가 시골에서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 최선을 다해 도와주었다.
<추진력 강하고 부지런하고 모습을 물려받다.>
자식에 대한 관심도 많았지만, 표현을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자식들은 아버지의 문화사업과 사회사업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요즘 같은 가족 중심, 개인 중심, 물질 만능시대의 분위기와는 다른 당시의 사회 분위기로 남자가 일과 가정을 다 지키기 어려운 시기였다. 더구나 아버지는 가문의 배경도 학력도 재산도 없는 맨손으로로 진주에 와서 자립해야 하는 상황이니 사회생활에도 헌신적으로 해야 인정받을 수 있는 흙수저였던 것이었다.
아버지는 저돌적인 추진력으로 그 일을 과감히 실천해 내었다. 인쇄업을 시작하면서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1억 원의 기계를 수입해서 서부 경남 최초이자 경남에서 2호 칼라인쇄를 시작한 것이다. 1979년 당시 기계비용 1억 원은 요즈음 10억 원의 가치로 환산할 수 있을지... 1979년의 이 결단은 대성공을 이루어 경상국립대학교 홍보책자 및 주요한 인쇄물은 금호인쇄에서 독점을 하였고 문화사업도 활발히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던 것이었다. 또한,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남동생의 지원 차원에서 고향 시비를 3,000만 원 들여 금산면 덕의 마을에 세워주었다. 당시 3,000만 원으로는 아파트를 사고도 남을 돈이었다. 이런 일들로 어머니랑 다투는 모습도 자주 보기도 하였다.
우리 3남매 중에서 나는 아버지의 외모와 성격을 많이 닮았다. 젊은 시절 아버지를 닮았다는 소리는 나를 비난하는 것처럼 들려 몹시 싫기도 하였지만, 지금은 자랑스럽다. 아버지의 좋은 점만 닮으려고 노력할 것이며 가족과 자식을 더 위하면서 살아가려고 다짐해 본다.
<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라고 했다. 부모는 후대를 위한 좋은 거름 역할을 해야 한다. >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有名)이라 했던가, 아버지는 장. 추. 남. 이름 석자를 세상에 확연하게 남기시고 떠났다. 세상에 태어나는 행운을 가졌다면 의미 있는 일을 하고 떠나야 할 것이다. 세상을 살면서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사람은 많지만 헌신적으로 자신을 내어주면서 살아낸 사람은 흔치 않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진을 집안에 늘 걸어두고 부모님 생각을 늘 하시면서 사셨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많았던 것 같다.
좋은 조상님을 만나 훌륭한 유전자를 물려받은 학봉가문 ‘월강정사’는 대한민국 남부지방의 대표 가문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36대의 훌륭한 유전자를 물려받아 37대가 헌신적으로 노력하여 기반을 조성하였고 38대는 열심히 노력하여 안정적으로 튼튼히 뿌리를 내렸으며 뛰어난 자식들을 많이 배출한 39대에서 활짝 꽃이 필 것으로 기대한다.
살아생전 아버지의 깊고 넓은 뜻을 이해하지 못한 자식의 이기적인 마음을 용서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서거 9주기를 맞이하여 아버지를 추모하면서 이 글을 바친다.
미안함과 감사, 그리고 깊은 존경의 마음을 담아...
아버지, 폭삭 속았수다.
편안히 쉬십시오.
표지사진 설명: 사진 속의 젊은 아버지를 보면서 박보검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폭삭 속았수다」를 보면서 우리 세대의 아버지 모습 그리고 우리 세대의 모습을 투영해 보는 것 같아 많이 위로가 된다. 양관식, 오애순이란 이름의 부모 세대와 금명이란 이름의 우리 세대에는 가난으로 하고 싶은 일 못해본 것이 너무 많다. 나도 유학 가고 싶은 꿈이 간절했지만 결국 말을 끄집어내지 못하고 말았다. 가난했을 시절에 개천에서 용 나면 그 개천은 좋은 것일까? 그럼 또 용한테 좋은 것은 뭐지?
이 드라마는 대사 한 구절 한 구절 버릴 게 없다. 마치 대학시절 셰익스피어 연극 대사를 읽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드는 것 같다.
도둑 누명 벗고 풀려난 금명이가 버스 안에서 했던 대사가 머릿속에 오래 남아있다.
“부모는 모른다. 자식 가슴에 옹이 진 때를
알면 다 막아줄 터이라 신이 모르게 하신다.”
“옹이 없이 크는 나무는 없다고 모르게 하고
자식의 옹이가 아비 가슴에서
구멍이 될 것 알아서 쉬쉬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