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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홀로 책거리

by 예일맨

도서관 밖으로 나왔다. 보통 지하식당에서 급하게 백반을 먹고는 다시 올라가는데, 오늘은 다시 안 들어갈 생각으로 나왔다.


'에팅거 내과 책을 다 봤기 때문이다'


책거리라고 하나… 학원 다닐 때 책 한 권이 끝나면 선생님께서 과자나 아이스크림을 사주셨던 기억이 난다.


아내에게도 그런 기억이 있어서일까… 아이가 문제집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풀면 그날 소정의 선물을 주고 있는 것 같다.


임상 수의사로서 기본 중의 기본인 에팅거 내과책을, 그것도 원어가 아니라 한글판으로 다 보았다는 게 그리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다(지금 자랑하고 있다는 건 안 비밀).


그렇지만 임상 최고의 교과서라는 것은 알고 있어도 감히 펴볼 엄두도 내지 못했던 무시무시한 에팅거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했다는 것은 뭔가 나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물론, 당연히, 그 책을 다 읽었다고 해서 거기 있는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 내용이 어렵고 따분해서 집중이 안되고 졸렵고… 의미 없이 책장만 넘긴 구간도 있다.


또한, 그 책을 다 읽었다는 뿌듯함과 성취감 같은 여운과는 별개로 과연 내 머릿속에 무엇이 남았는가 돌아보면 살짝 허탈하기도 하다.


그러나 2000 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을, 2개월 동안 동안 무겁게 들고 다니며, 시간이 날 때마다 병원에서, 집에서, 도서관에서 다 넘겨보았다는 것은…


'내가 했지만 참 스스로 칭찬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 든다'


학원에서 친구들과 같이 파티할 것도 아니고, 부모한테 상 받을 것도 아니니… 스스로에게 상 주려고 맛있는 순대국밥을 사 먹었다.


여전히 해야 할 것은 많고… 이것저것 생각나는 것도 많은데… 시험 끝난 고등학생처럼 집에는 들어가기가 싫다. 아니, 들어가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동네를 하염없이 돌아다닌다. 정말 간만에 만화책이나 보러 갈까… 좋아하는 코노에나 들어갔다 나올까… 생존을 위해 하고 있는 피트니스 짐에나 갈까…


돌고 돌아, 결국 다시 순대국밥집… 바로 옆 커피숍에 들어왔다. 늘 먹는 것 말고… 짭짤한 입에 필요한 달달한 팥빙수를 주문한다(다행히 1인용이 있다).


성격 상 아무것도 안 하고 이 소중한 시간을 보낼 수 없기에 또 이렇게 여기에다 끄적거린다.


시간이 있어도 마땅히 달려갈만한 곳이 없다는 게 슬프기도 하지만… '참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왔구나' 하며 스스로가 짠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즐겁게 공부할 수 있고, 또 무엇보다 2개월 간 열심히 책을 보며 지식을 채울 수 있는 상황이 허락된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그럼에도 앞으로 여전히 갈 길이 멀다. 가는 도중, 오늘의 나홀로 책거리처럼… 하늘도 보고, 하릴없이 동네도 돌아다니며 뭐 하지 고민도 해보는… 작은 선물 같은 휴식을 나에게 선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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