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운전직 오늘도 달린다

나는 공무원수의사 1편

by 예일맨

“아들! 오늘은 아빠랑 자전거 한 번 타보자! 언제 배울 거야?”

“싫어 아빠!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


오늘도 초등학교 2학년인 아들에게 두 발 자전거 연습하자고 꼬셔보지만 영 쉽게 넘어오질 않는다. 넘어지고 무르팍이 깨져도 어차피 한 번은 거쳐야 하는 과정인데 시도조차 하려고 하지 않는 아이를 보면 답답하기도 하지만 내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은 결과라고 생각하니 한편 미안하기도 하다.


어릴 적부터 겁이 많았던 나는 자전거 타기를 두려워했던 것 같다. 내가 초등학생 시절 살던 동네의 길은 인도와 차도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았다. 길도 좁아 사람이 걷다가 차가 오면 가장자리로 비켜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길에서 자전거를 타는 것은 굉장히 위험했고 실제로 차에 치여 다친 아이들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어머니는 나와 형에게 자전거를 타는 것이 위험하다고 늘 말씀하셨다. 그리고 당연히 제법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는 두 발 자전거는 절대 사주지 않으셨다.


그래도 용감한 우리 형은 친구들의 자전거를 빌려 연습했다. 형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고도 능숙하게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의 말에 최선을 다해 순종하여 자전거는 타볼 생각도 하지 않았고, 남들은 자동차를 운전하는 나이가 되어서야 겨우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었다.


차 운전도 자전거와 마찬가지로 또래들에 비해 훨씬 늦게 배웠다. 두 번째 수능을 치러 수의대에 합격하고 나서 운전면허를 따기는 했지만 실제 운전하는 것은 어떻게든 피하려고 했던 것 같다. 대학 졸업 후 강원도에서 공중방역수의사로 근무할 때에 운전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부모님 차를 빌려 운전 연습을 하거나 중고차를 사서 운전을 할 수도 있었지만 나중에는 결국 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고 적극적으로 배우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러한 내 소극적인 태도는 경기도에 입사하고 첫 발령지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말았다.


내가 경기도 공무원으로서 처음으로 일한 곳은 경기도 북부동물위생시험소 북부지소였다. 공중방역수의사로 3년 동안 일했던 강원도 동부지소와 건물 크기가 엇비슷했지만 업무량은 훨씬 많았다. 경기도의 축산 규모가 커서 강원도에 비해 일이 많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내 예상을 뛰어넘는 정도의 업무를 하고 있었다. 북부지소가 여러 경기도 시험소 중에서도 조직의 규모가 가장 작고 업무도 많지 않은 편이라 하니 경기도 수의조직의 일이 얼마나 많은지 짐작도 하기 어려웠다.


1년에 1회 이상 당시 북부지소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업무는 바로 결핵 검진이었다. 우결핵은 인수공통전염병이고 우유를 통해 사람에게 전염되기 때문에 젖소농가의 12개월령 이상의 모든 소는 1년에 1회 이상 의무적으로 검사를 받아야 한다. 소의 미근부 추벽(꼬리와 엉덩이 사이의 주름 부위) 피내에 PPD라고 하는 진단액을 접종한 뒤에 발생하는 피부두께의 차이를 보고 감염 여부를 판정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한 농가에 최소 두 번은 가야 하는 업무이다. 북부지소의 관할 구역은 남양주, 가평, 포천, 구리인데 포천이 업무량의 90% 이상을 차지했기 때문에 거의 일 년 내내 5일 중 4일 정도는 포천 출장을 가야 했다.


보통 3인 1조로 팀이 편성되어 아침 일찍 결핵 검진을 위한 준비물을 차에 싣고 출장지로 떠난다. 출장이 많은 사무소이기 때문에 운전을 업무로 하는 운전직 주사님도 계셨고, 수의사는 아니지만 운전과 함께 동물 보정 등 여러 가지 일을 맡아주는 무기계약직 선생님도 계셨다. 하지만, 하루에도 보통 3~4팀씩 출장 일정이 있어서 그분들 이외에도 하루에 최소 한 두 사람은 운전을 해야 했다. 또한, 길을 익히고 농장을 잘 찾아가는 것도 현장 일을 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신입인 나는 무조건 운전대를 잡아야만 했다.


그래도 입사하기 전 부모님 차를 빌려서 몇 번 운전을 해보았지만 여러 사람을 태우고 1시간씩이나 운전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고, 관용차량도 너무 커서(현재는 단종된 쌍용의 액티언 스포츠였다) 거리감도 잘 잡히지 않았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차도 적고 일직선으로 주욱 뻗어있어서 100km 정도 달릴 수 있는 고속화도로를 겨우 70km로 달리자 함께 차에 탄 성질 급한 선배는 잔소리를 참지 않으셨다.


모든 출장 일정을 마치고 사무실에 돌아오면 영혼이 빠져나간 듯 몸이 축 늘어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해도 다음 날 또 운전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잠도 편하게 자지 못했다.


그렇게 몇 개월 출장을 나가다 보니 오가는 것은 그럭저럭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농장으로 가는 구불구불한 좁은 시골길을 운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한 지 두세 달쯤 지났을 때였을까. 세 분의 선임을 태우고 젖소 농장에 가던 중 우회전을 하는데 핸들을 너무 빨리 꺾는 바람에 오른쪽 뒷바퀴가 길 옆으로 빠진 일이 있었다. 동료들과 이런저런 방법을 써봐도 차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렉카를 불러야 하나 생각하고 있을 때쯤 다행히 방문하려던 농장의 사장님께서 그 광경을 보시고는 자신의 트랙터와 차량을 줄로 연결해 끌어당겨서 차량을 빼내주셨다. 큰 실수에 당황하고 놀란 나는 그날 더 이상 운전대를 잡지 못하고 한 선임에게 넘겨드릴 수밖에 없었다.


운전과 나의 악연은 이 정도에서 끝나지 않았다. 후진하다가 벽에 부딪혀 왼편 뒤쪽 브레이크등 덮개 부분을 깨뜨린 사건과 사무실로 돌아오던 중 눈길에 미끄러져 가드레일을 들이받아 범퍼를 작살낸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점을 찍은 것이 사무실 언덕을 올라가다가 브레이크를 밟는다는 것이 액셀을 밟아 방지턱을 벗어나 가로수를 정면으로 들이받은 사건이었다. 다행히 나는 크게 다치지 않았지만 차는 크게 다쳤다(아직도 기억나는 불쌍한 그 차의 번호는 6336). 당시 그 차의 중고 매매 가격보다 수리비용이 더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치는데 무려 600만 원이 들었다.


나는 수의사로서 특별히 잘하는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들보다 아는 것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다 기본 중의 기본인 운전도 못하고 허구한 날 사고를 치니 가뜩이나 소심한 나는 마냥 쭈구러 들었던 것 같다.


게다가 당시 사무실에는 전국의 수의대 중에서도 서울대와 함께 최고라 불리는 건국대 수의대 출신의 젊은 수의사들이 많았는데 다들 스마트하고 일머리도 좋은 데다 물론 운전도 잘했다. 나는 자신감을 잃은 상태에서 또래의 수의사들과 비교까지 되니 그야말로 날개 없이 추락하는 상황이었다.


그만두고 싶은 생각에 구직 사이트도 돌아다녀보고, 결혼 후에 안정된 직장까지 그만두고 나를 따라온 아내에게 걸핏하면 힘들다고 투정을 부렸다.


그래도 해나갔다. 여기서 그만둬버리면 그 어떤 것을 해도 조금 힘들면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 될 거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냥 하루하루 버티면서 살았더니 어느새 적응하고 발전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일 년 가까이 되니 포천의 읍면 단위 지역은 내비게이션을 보지 않고도 찾아갈 수 있었고 외진 곳의 험난한 길도 어렵지 않게 운전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면 늘 긴장했던 동료들도 이제는 마음 놓고 코 골며 잘 수 있게 되었다.


운전 때문에 고생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찾아 빨리 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언젠가 자연스럽게 하게 될 일이니까 그때 가서 할 거라고 미뤄두는 방식이 틀리다고 볼 수는 없지만 더 큰 값을 치러야 한다. 당시에 누릴 수 있는 것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나중에서야 그때 왜 그것을 하지 않았을까 후회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내가 자전거 타는 것을 10살 때 배웠더라면 바람을 가르는 속도감을 10년은 더 누렸을 것이고 20세 성인이 아무도 붙잡아주지 않는 공터에서 혼자 넘어져가며 처량하게 자전거 타기를 스스로 터득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운전을 20살 때 배웠더라면 대학생 시절과 공중방역수의사의 삶을 보다 풍성하고 다채롭게 즐겼을 것이고, 30살이 다 되어서 운전 때문에 스트레스받아 직장을 그만둘까 고민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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