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의 품격

나는 공무원수의사 4편

by 예일맨

“작업 즉시 중지하세요! 반장님! 라인에 작업 멈추라고 전달해 주세요!”

“아, 왜요? 수의사님! 오늘 물량도 많고 빨리 시작해야 돼요!”

“작업하기 전에 내장 컨베이어 청소가 안되었다고 말씀드렸는데 아직 그대로잖아요"

“그래요? 얼른 청소할게요! 어이 김 씨! 여기 물 좀 뿌리고 청소 좀 하자고!”


아침부터 요란한 이곳은 살아있는 가축을 도살하여 식육으로 만들어내는 도축장이다. 우리가 흔히 먹는 소고기, 돼지고기, 오리고기, 닭고기 등은 모두 이와 같은 도축장에서 처음 고기의 모습으로 바뀌어 축산물 판매장이나 여러 종류의 작업장과 유통과정을 거쳐 우리 식탁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런데 도축장에 왜 수의사가 있는지 의아해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 같다. 일반적으로 수의사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동물을 치료하는 수의사”일 것이고 도축장은 “동물을 죽이는 곳”이기 때문에 수의사가 왜 필요한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건강한 가축을 깨끗한 환경에서 위생적으로 도축하는 일 또한 인간의 보건을 위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법으로 정한 기준에 따라 수의사가 의무적으로 도축장에 상주하면서 검사와 감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도축장에서 일하는 그러한 수의사를 그 이름도 거창한 “검사관”이라고 한다. 검사관은 먼저 살아있는 가축의 건강상태를 살피고 이상이 없는 경우 도축을 하고, 이상이 있는 개체는 격리하여 전염병 검사를 진행하거나 교차오염을 차단하기 위해 정상적인 가축과 별도로 도축을 진행하도록 한다.


또한, 가축 도살 후에 내장, 근육 등 각각을 세부적으로 검사하고 이상이 없는 부분만 식용으로 사용하도록 하고 인수공통전염병 소견이 있으면 정밀검사를 통해 감염 여부를 확인한 뒤에 해당 도체의 합격 여부를 결정한다.


이외에도 항생제 등의 잔류물질이 고기에 허용된 기준 이상으로 남아있는지 확인하는 검사와 여러 가지 전염병이나 백신에 대한 항체 검사를 진행하기 위한 혈액 시료를 채취하는 일 등 업무를 수행하기도 한다.


가축에 대한 검사뿐 아니라 가축을 처리하는 도축장 시설의 위생 검사 역시 검사관이 하는 중요한 업무 중 하나이다. 인체의 건강을 해치거나 병원성 미생물 오염 우려가 있는 경우 등 위해요소를 해소하기 위해서 검사관은 작업을 중지시킬 수도 있다.


도축장에서 작업은 보통 아침 일찍 시작하여 하루종일 빠듯하게 진행되고, 작업장 내의 근무자뿐 아니라 도축 신청인, 운송업자 등 여러 사람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도축장의 현장 책임자는 검사관이 작업을 중지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


나는 위의 일화와 같이 위생 상태가 불량한 경우 잠시 멈추고 청소를 신속하게 마친 뒤에 다시 작업을 시작하도록 한 경우도 있었지만 도축장의 위생을 책임지는 대장으로서 해이해진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작업을 중지시키기도 했었다.


나는 3년 정도 가축 방역 관련 현장 업무를 수행하였고 그 이후에는 북부지소가 관할하는 남양주 도축장에 배치되었다. 경기도에서 가장 작은 도축장인 데다 시설도 낙후되어 있어 검사관의 역할이 중요한 곳이었다.


고작 3년 정도 일한 새파란 신입 검사관이 팔뚝에 그림이 잔뜩 그려져 있는 거친 아저씨들을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떨리기도 했고, 내 말이 씨알도 안 먹히는 상황이 올까 두렵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 도축장의 위생을 책임지는 대장으로서 열악한 이 도축장을 완전히 바꿀 수는 없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변화의 바람을 일으켜보고자 다짐하며 일을 시작했다.


보통 우려하는 일의 대부분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내 경우는 좀 달랐다. 우려가 거의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감사하게도 인상은 험상궂지만 어리숙한 검사관의 말을 잘 들어주는 반장님이 계시기는 했다. 그렇지만 젊은 혈기로 열심히 돌아다니며 지적을 하고, 관계자 회의를 열어서 좀 바꿔보자고 열변을 토해도 대부분의 것들은 쉽게 달라지지 않았다. 거기에 낙후된 시설까지 더해지니 그냥 포기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게다가 도축장의 HACCP 관리팀장은 전직 선배님이었다. 경기도 사무관으로 퇴직하시고 그 도축장에 취직하여 일하고 계신 것이었다. 내가 이전에 있던 검사관은 요구하지 않았던 것들을 자꾸 시키고 도축검사도 까다롭게 한다고 생각했는지 도축장 측에서는 그분을 통해서 나를 조금씩 압박하기 시작했다.


“조수의사, 차 한 잔 하지”


작업 시작하기 전에 좀 깐깐하게 위생 점검을 하거나 도축 폐기량이 좀 많아진다 싶으면 하루 중 가장 한가한 오후 2시쯤 그분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까마득한 선배님이 차 마시자고 하는데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거절하기 힘들었다.


밀폐된 방에 들어가면 특수효과를 사용한 듯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서 믹스커피를 타 주셨다. 너무 까다롭게 하면 작업자들이 힘들고, 도축장이 열악해서 위생관리에 한계가 있는데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다는 등 도축장의 입장에서 검사관에게 하고 싶은 말을 늘어놓으셨다. 요지는 “검사관이 위생적으로 개선하자는 취지는 좋지만 적당히 하자는 것”이었다.


이제는 공무원도 아니고 도축장에 고용된 사람이기 때문에 그분의 입장도 이해되었지만 후배의 노력을 격려하지는 못할망정 방해하는 그 태도가 영 못마땅했다. 그리고 공무원 출신 수의사를 이용해 검사관이 제대로 일하지 못하게 하는 도축장 측에도 굉장히 화가 났다.


도축장의 검사관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맡았는데 그들의 입맛에 맞춰 적당히 편하게 일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동안 지속적으로 지적했고, 충분히 개선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은 것들이 여럿 확인되자 작업 중지를 명했다. 검사관의 막강한 파워를 보여줄 수 있는 필살기를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도축장의 공장장, 반장, HACCP 팀장 등 관계자 회의를 열었고 계속 나아지지 않는 사항들에 대해 대책을 마련해서 반드시 실행할 수 있도록 강조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회의 중간에 공장장이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린 것이다. 작업장 위생 개선 대책 회의 자체는 좋지만 작업을 중지시킨 것에 단단히 화가 난 것이었다. 공장장의 돌발행동으로 분위기는 급격하게 얼어붙었다. 회의 역시 더는 진행이 어려웠다.


그 순간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동안의 누적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임팩트 있는 결단을 내렸다고 자평하며 검사관의 권위를 세워 도축장 직원들과 HACCP 팀장이 잘 따라오게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반발이 터져 나온 것이다.


그와 유사한 일이 하나 더 있었다. 겨우 일어서기는 하지만 상태가 좋지 않은 일명 “찔찔이” 소를 축주로부터 헐값에 사 와서 도축 후 가공용 식육으로 판매하는 일을 주로 하는 유통업자가 있었다. 소는 도축하기 전 브루셀라병 검사 음성 판정을 받아야만 하는데 그분은 갑자기 상태가 안 좋아진 소를 데려오다 보니 이 검사를 받지 않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남양주 도축장 검사관이 깐깐해서 조금만 상태가 좋지 않아도 도축할 수 있게 허락을 안 해준다는 소문을 여기저기 내고 다닌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래서 그 업자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던 나는 그분이 브루셀라병 검사를 받지 않고 또다시 소를 데려온 것을 확인하고 왜 그런 식으로 일을 하냐고 큰 소리로 역정을 냈다. 그랬더니 그분은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한 30분 정도 지났을까? 그분은 씩씩거리며 검사관실 문을 세차게 열고 들어와서 나에게 온갖 욕을 퍼부었다. 평생 들어보지 못한 쌍욕을 몇 분간 듣고 나니 정신이 반쯤 나갔다. 받아치기는커녕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말려 큰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고, 바로 다음 날 그분은 나를 찾아와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사과를 해와 작은 소동은 일단락되었다.


도축장 검사관이라는 리더 역할은 학창 시절 학급의 반장이나 작은 교회의 청년회장 이후에 처음이었다.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돈 주고도 못 배우는 귀한 가르침을 얻었다.


대장이라고 해서 내 생각을 강요하며 지나친 열정을 부리면 오히려 역효과만 가져올 뿐이다. 구성원들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진득하게 설득하며 기다리는 과정이 필요하다.


상대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함부로 대해서는 안된다. 예의를 갖추어 진심으로 말하면 상대는 그 태도에 감동하여 긍정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나그네의 옷을 벗긴 것이 거센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살이었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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