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이상 과거를 묻지 않으렵니다

유기견 땅콩이가 지냈을 환경을 생각해 봤어요

by 예일맨

[바들바들 겁쟁이 땅콩이는 오물로 엉켜버린 털 때문에 피부에 딱쟁이들이 많았고, 귀 상태 또한 좋지 않았다. ㅠㅠ 미용 내내 너무 속상하고 마음이 아팠네 이제 대시 예뻐진 만큼 좋은 가족 만나자 땅콩아]


어린 강아지는 말 그대로 "똥꼬발랄" 까분다고 하는데 땅콩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바들바들 떠는 것이 특기입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엘리베이터를 타기만 하면 역시 떨기 시작합니다. 조금 낯선 곳에 가면 여지없습니다. 산책로에서 탄천으로 이어지는 지하터널이 있는데 앞으로 가지는 못하고 추운 것처럼 몸이 떨립니다.


많이 조심스럽습니다. 산책을 나가도 흙 있는 곳이나 풀밭으로는 잘 가지 않습니다. 슬쩍 냄새를 맡아보고는 다시 뒤돌아섭니다. 그나마 산책로에 깔린 블럭은 좋아해서 잘 다닙니다. 그런데 가다가 배수로가 있거나 좀 다르게 생긴 것이 바닥에 깔려있으면 가지 않거나 점프를 해서 뛰어넘어갑니다.


눈치를 많이 보는 것 같습니다. 어쩌다 아이가 엄마한테 혼나거나 저와 아내가 투닥거리면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며 '난 어떻게 해야 하지?' 고개를 들고 쳐다봅니다. 혹시 화살이 자기한테 튀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면 거실에서 가장 숨을 만한 곳인 식탁 밑으로 들어가 몸을 피합니다.


반려견의 성격은 유전자에 따라 타고나는 것도 있지만 어미 뱃속에 있을 때의 환경이나 사회화 기간인 4개월까지의 경험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합니다. 땅콩이는 과연 어떤 환경에서 지난 5개월을 보냈을지... 이미 만들어진 성격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땅콩이의 과거가 매우 궁금합니다.


땅콩이는 사실상 유기견은 아닙니다. 화성의 한 애니멀 호더(hoarder)로부터 구조되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땅콩이가 그 호더에게 가게 되었는지 정확한 경로는 알 수 없지만, 호더가 데리고 있던 개들이 전부 수컷이었던 것을 보면 (암컷이 중요한) 개 번식농장에서 호더에게 헐값에 넘긴 것으로 추정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땅콩이는 짧은 견생 5개월을 개 번식농장과 호더의 집에서 보냈습니다. 땅콩이가 지냈을 그 환경은 상상하기도 싫지만 "오물로 엉켜버린 땅콩이의 털"을 사진으로 이미 봐버린 이상 머릿속에 자꾸 떠오르는 화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간 저는 코를 틀어막고 있습니다. 땅콩이도 할 수만 있다면 귀여운 발로 창문을 활짝 열었을 것입니다.


피부와 귀의 건강은 둘째 치고, 밥과 물은 제대로 먹었을지... 그래도 살아있으니 감사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분명히 죽지 않을 만큼만 겨우 얻어먹었을 뿐 충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마저도 여러 마리의 개들 사이에서 하나라도 더 먹으려고 치열하게 애써 싸워 얻은 결과일 것입니다.


5개월 평생을 좁은 곳에서 갇혀 살았으니 새로운 곳에 가는 것을 두려워할 만도 한 것 같습니다. 이미 충분하게 누리고 경험했어야 하는 많은 것들을 처음 해보니, 땅콩이에게는 즐겁고 신나는 경험이기보다 과감한 용기가 필요한 "무한도전"이지는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땅콩이에게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 보였을까요? '나를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수컷이라고 홀대하며, 나에게 아무 관심도 없는 것이 바로 사람이구나. 나에게 사람은 그런 존재야' 정의 내리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큰 소리가 나면 피하고 싶은 존재' 정도인 것 같습니다. 참 다행입니다.

행복하지 않았을 어미에게서 태어나 가장 보호받고 사랑받아야 할 아가 시절을 혹독하게 보내며 지금의 땅콩이의 모습이 되었겠지요. 땅콩이의 떨림이 이제야 좀 이해가 됩니다. 맘 같아서는 5개월 전으로 돌아가 땅콩이를 데려오고 싶지만 이미 지나간 것을 되돌릴 수는 없기에 더 이상 땅콩이의 과거는 묻지 않으렵니다.


땅콩이를 있는 모습 그대로 아껴주려 합니다. 힘들어하는 것을 무리하게 요구하지도 않으려 합니다. 숨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알게 해주고 싶습니다. 부들부들 떨 때면 가슴으로 포근하게 안아주어 따뜻한 떨림을 느끼게 해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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