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잡글

셋이서 짓는 이야기지만 그냥 계속하기

01# 그늘이 필요해

by 두부세모


p. 셋이서 짓는 이야기


#01 그늘이 필요해.



가진 것보다 더 많이 잃어서 실체가 없어진 제 곳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했어요.

우선 도망치자.

짐을 싸고 차 시동을 켭니다. 연료의 힘을 빌려, 저로선 내지 못할 속도로 빠르게 멀어집니다.


어딘가로 멀어진다는 것은 또 무언가에 가까워지는 게 아닐까- 그런 변명같은 기대도 품었어요. 하핳.

뻥 뚫린 도로를 달리며 아산호와 금강을 만나니, 머릿속 꽉 찬 잡념들도 듬성듬성해집니다.

푸른 들판과 흰 하늘, 기다랗게 물든 석양이 비워진 틈 사이를 통과합니다.


많은 터널을 지났고 네 마리의 동물 시체도 봤습니다.

우리가 길을 얻은 대신 길도 잃고, 마땅히 죽어야 할 장소를 잃은 그들에게 그늘 한 장 덮어주고 싶었지만 계속 달려야 했어요.



서울에서는 아무것도 못할 것 같더니, 괜히 자꾸만 감동하면서 순천을 한참이나 거닐었습니다. 또 하핳.

버드나무로 드리워진 옥천을 보자마자 이 풍경에 속하고자 온 것만 같았어요.

그렇게 믿고 싶었어요.

교토의 시라카와를 떠오르게 할 만큼 익숙한 느낌이면서도 상상 속에만 존재했던 초여름 장면처럼 초연했어요.

도심 안에서 이렇게 자연스러운 천변을 마주하는 일은 흔치 않으니까요. 들뜬 채 산책길로 내려갑니다.


길은 주변 지면보다 사람 키만큼 낮게 자리해 곳곳에 리듬이 생기고 것 것이 여러 겹으로 겹쳐집니다.

버드나무와 그의 그늘이 모든 것을 아주 천천히 느낄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수 억 광년의 빛이 잎에 도달해 만든 그림자가 지금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는 생각에 제 움직임도 그들과 연결된 듯했습니다.

우주를 품은 것만 같아서, 잠시 제 미래를 데려올 수 밖에 없었어요.

<미래를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나는 이제 미래를 기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최진영의 소설에서 봤던 글입니다.

알면서도 참 자주 잊곤 해요. 나의 미래.. 아무튼 이곳의 속도에 맞춰 움직이니 선형으로 흘렀던 시간이 푹 퍼집니다.

남을 측은히 여기면서도 정작 스스로에겐 습관적으로 인색했었는 데요. 곁에 있는 돌과 풀, 공중다리와 징검다리, 새소리와 바람소리에 새삼 위로를 받았습니다.

역시, 함께 있어주기는 돌봄에서 가장 기본적인 형태인가 봐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그것에 마음도 쓸 수 있는 여유도 생겨서 알았어요.



물론 그늘이 없었다면, 몰랐을거에요.

뙤약볕 한복판을 걷는 건 죽을 맛이니까. 알 틈이 없죠.

순천만 습지도 갔는 데요. 표를 끊고 ‘진짜‘ 순천만 습지를 볼 때까지 잔디광장, 람사르광장, 또 광장, 그늘 하나 없는 풀밭을 지나야 했습니다.

내가 여기 왜 왔는지? 잊었어요. 저뿐만 아니라 관광객 모두 찌푸린 얼굴, 목표 지점이 돼버린 광활한 습지.

습지를 즐기지 못하고 초입에서 사진만 남기고 떠나는 사람들.

툴툴대며 진주로 갑니다.


덥기는 매한가지여서 욕심 가득 담긴 가방(책, 잡지, 다이어리, 아이패드, 선글라스, 필카, 필통)도 차에 두고 다녔지만, 몸은 여전히 무겁네요.


그늘이 필요해!

반얀트리라는 이름은 인도 상인 ‘바니얀(Banyans)'들이 나무 아래서 휴식을 취하던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해요. 세계에서 가장 큰 반얀나무 그늘에는 무려 2만 명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고.


그렇다면 일상의 빌딩 그늘도 쉼터가 될 수 있을까요? 우연적인 형태로 움직이는 자연의 것과 다르게, 예측가능하고 계산된 음영이지만요.

도시를 그늘로 경험해 봅니다.

빛이 빌딩의 거친 물성도 빽빽함과 단단함도 누그러뜨리며. 광택도 매끈함도 남루함도 덮어버립니다.


건물의 그림자들은 욕망도 콤플렉스도 탈피한 채 질서 속에서 움직입니다.

도시의 진정한 모습이 그늘이라면, 우리는 설계하는 방식을 다시 접근해야 합니다.

직사광선과 그늘을 넘나들수 있도록.


걷다 보니 천수교와 진주교가 보이는 데, 아래까지 가보는 건 무더위에 실패.


< 1997년 7월 22일 경남 진주시 남강변 천수교 밑 그늘에서 더위를 피하는 어르신의 모습.

진주 남강변 다리 밑은 예나 지금이나 가장 인기 있는 피서 장소입니다. >

- 경남도민일보


청계천 다리도 한강 다리도 비슷한 상황이지만, 기사처럼 사물이 본래 목적과는 다르게 잘 쓰이고 있는 모습들을 발견할 때 재밌어요.

무언가 만들고 어떤 행동을 할 때, 결과가 의도 바깥에 놓일 수도 있구나. 그 경우를 담담히 받아들이게도 되고요.


첫 편지를 마치려고 해요.

실체를 잃은 제 곳은, 어쩌면 죽음이었어요. 빛만 가득했거나 그늘만 가득했었을까요.

제가 여기 있다는 걸 알아차릴 대상, 그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은 관두기로 했습니다. 그것도 실체가 없으니까요.

돌이켜보면 볕이 닿지 않는 자리와 볕이 닿는 자리가 만든 무늬에 심술궂은 얼굴도 숨기고, 마음의 흠결도 가리면서 괜찮아지곤 했네요. 자주.

닮고 싶어요. 그늘의 멋진 품!


안녕.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그늘을 상상하고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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